우리는 늘 현실을 즐기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만을 본다. ⓒ수원삼성

[스포츠니어스 | 수원=김현회 기자] 수원삼성과 FC서울의 맞대결은 K리그에서 가장 치열한 승부다. 우리는 이 경기에 특별한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슈퍼매치’다. 수원삼성과 FC서울이 맞붙는 날은 하루 종일 K리그 전체가 들썩인다. 여기에는 엄청난 스토리도 있다. 양 팀을 모두 경험한 서정원 감독도 있고 삼성과 GS라는 재계 라이벌의 맞대결도 팽팽하다. 여기에 이상호는 수원삼성에서 뛰다 FC서울로 이적해 수원삼성 팬들이 던진 물병을 들고 목을 축여 화제를 낳기도 했다.

데얀의 이적은 슈퍼매치에 엄청난 역사가 됐다. FC서울의 상징과도 같은 데얀이 수원삼성으로 이적한 건 K리그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슈퍼매치는 스토리가 넘쳐난다. 프로축구연맹은 이례적으로 이 두 팀이 맞붙기 전에 축구회관에 양 팀 감독과 주요 선수들을 모시고 따로 기자회견을 열기도 한다. 슈퍼매치는 K리그에서 가장 흥행하는 초대형 상품이다. 이제는 더 이상 특별한 스토리를 따로 구성하지 않더라도 슈퍼매치는 그 자체로도 대단한 상품이 돼 있다.

슈퍼매치에 맞는 경기력은?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요즘 슈퍼매치를 보러 가는 길에 ‘두 팀이 어떤 멋진 승부를 펼쳐줄까’라는 기대는 별로 없다. 최근 들어 슈퍼매치는 스토리만 넘쳐났지 경기력은 기대이하였다. 경기장 밖에서만 서로 치열하게 싸울 뿐 막상 경기장 안에서는 다른 K리그 경기와 비교해 전혀 특별한 느낌을 주지 못했다. 말이 좋아 서로 치열한 중원 싸움이지 사실은 꽁무니를 빼고 공을 돌리다가 한 순간 ‘우당탕탕’하며 골이 들어가는 게 전부였다. 애초에 슈퍼매치 경기력에 대한 기대는 접었다. 하지만 오늘(8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진 슈퍼매치는 더더욱 심각했다. 이걸 과연 K리그의 히트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창피함이 몰려오는 경기였다.

슈퍼매치에서 볼 만한 장면이라고는 두 팀 서포터스의 응원이 전부다. 그리고 데얀이나 이상호의 스토리 정도다. 경기 전에 카드섹션을 펼치고 서로 상대를 디스하는 응원가 정도만 볼만하다. 경기가 시작하면 경기력은 심각할 정도로 떨어진다. 마치 겉만 번지르르한 포장지를 뜯으니 선물로 벽돌이 들어있는 것 같다. 이미 수년 전부터 슈퍼매치 경기력이 실망스러운 수준이었지만 오늘 슈퍼매치는 더 심했다. 다시 추워진 날씨 때문에 옷장에 넣어뒀던 두툼한 외투를 꺼내 입고 나온 팬들에 대한 직무유기다. 이쯤 되면 슈퍼매치가 아니라 ‘동네 슈퍼 매치’다. 공은 몇 번 제대로 연결되지도 않고 유효 슈팅은 없다.

어제(7일) 본 경기는 이렇지 않았다. 인천유나이티드와 전남드래곤즈의 경기를 취재했는데 이 경기는 대단히 박진감 넘쳤다. 슈퍼매치에 비해 훨씬 덜 주목받는 경기였지만 두 팀은 후반 막판까지 치열하게 서로 포기하지 않고 맞붙어 명승부를 연출했다. 후반 추가 시간에만 한 골씩 주고 받는 바람에 급하게 기사를 고쳤다가 다시 고치기를 반복했지만 이런 수고는 언제든 환영한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경기를 지켜봤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경기였다. 지난 주 K리그2 서울이랜드와 부천FC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이랜드도 경기력이 떨어지는 팀 중 하나지만 슈퍼매치에 비하면 ‘그랜드 슈퍼매치’였다.

이번 슈퍼매치에서 볼거리라고는 이것 뿐이었다. ⓒ스포츠니어스

K리그 빅클럽의 의무감은 어디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슈퍼매치를 신나게 본 기억이 요즘엔 없다. 굳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2010년 8월 다카하라가 두 골을 넣었던 그 슈퍼매치가 근래 가장 경기력이 괜찮았던 슈퍼매치였던 것 같다. 눈이 오던 날 수원삼성이 우승을 확정짓던 그 슈퍼매치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그것도 벌써 10년이나 된 일이다. 10년 동안 스토리는 더욱 풍성하게 쌓였는데 경기력은 점점 더 떨어진다. 오늘 경기에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이 정도라면 대단히 큰 문제가 있다. 화가 나 경기가 끝나지도 않은 후반 도중부터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한 팀이건 ‘우당탕탕’하는 순간 한 골이 들어가고 그걸로 이 승부는 끝날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냥 서로 진땀만 뺀 0-0 승부이거나.

하프타임에 만난 축구인들은 하나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K리그 챌린지 시절 고양자이크로와 충주험멜이 붙어도 재미는 이 경기보다 나았다”고 한탄하는 축구인도 있었다. 경기장을 찾은 한 선수는 “그냥 집에 갈까 생각 중”이라고 웃기도 했다. 옆에선 오늘 상보 기사를 쓰기로 한 우리 홍인택 기자가 지금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다. 유럽 축구와 비교하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오늘 새벽 맨체스터시티와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경기를 괜히 보고 온 것 같다. 그 경기로 눈높이가 높아진 상황에서 슈퍼매치 현장에 있는 건 참 힘들다. 아니 어제 본 인천-전남전이 아른거린다. 아길라르도 잘하고 무고사도 잘하고 최재현도 쩔었는데 지금 내 눈 앞에선 패스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나라 ‘1류’ 선수들이 계속 뛰어다니고 있다.

이 선수들도 다른 팀과 맞붙으면 또 경기력을 곧잘 보여주기도 한다. 이 선수들 수준이 다른 K리그 팀들보다도 현저히 낮은 건 아니다. 아무리 수원삼성과 FC서울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팀 선수들은 한국 축구계에서 가장 성공한 선수들이다. 그런데 왜 이 두 팀만 서로 만나면 계속 경기력이 이 모양일까. 라이벌끼리 맞붙어 심리적인 부담이 크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런 부담 정도 이기지 못하는 선수들의 경기를 빅매치로 포장하는 건 한계가 있다. 서정원 감독과 황선홍 감독은 상대를 이기고 싶은 마음보다 지기 싫은 마음이 훨씬 더 큰 것 같다. 서로 꽁무니를 빼고 넣는 것보다 내주지 않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 이건 K리그 빅클럽을 이끄는 지도자들의 자세가 아니다.

이번 슈퍼매치에서 볼거리라고는 이것 뿐이었다. ⓒ스포츠니어스

슈퍼 ‘핵노잼’ 매치

경기 전부터 이례적으로 연맹에 가 기자회견을 하고 팬들이 경기장에서 ‘패륜송’을 부르거나 카드섹션 응원을 하면 뭐하나. K리그에서 최대 원정 응원단을 파견하면 뭐하나. 데얀과 이상호가 유니폼을 맞바꿔 입고 등장하면 뭐하나. 경기력이 처참한 수준인데 아무리 경기장 밖에서 치열해도 의미가 없다. 서로 원정경기를 할 때면 유니폼 색이 겹치지 않지만 자존심 때문에 상대 홈 유니폼을 입는 것도 못하게 하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축구를 재미없게 하는데 다른 걸로 자존심 싸움을 할 것도 없다. 차두리와 정대세가 서로 친한 척을 했다고 양 팀 팬들에게 욕을 먹던 게 슈퍼매치였다. 그런데 그것도 다 기본적으로 경기력이 바탕이 돼야 한다. 요즘 슈퍼매치는 그냥 서로 싸울 생각도 없는 두 고등학생이 서로 욕만 하고 멱살만 잡고 폼만 잡는 것 같다.

단정 짓고 말하는 건 위험하다. 한 경기 내용으로 두 팀의 경기력을 비판하는 것도 무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분노하는 건 이 두 팀이 오늘 경기 뿐 아니라 최근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경기력이 꾸준히 바닥을 쳤기 때문이다. K리그는 늘 스토리가 없다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껏 스토리를 발굴하지 못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슈퍼매치에는 우리가 다들 잘 알고 있는 스토리가 넘쳐난다. 그런데 여기에는 스토리만 있을 뿐 경기력이 없다. 슈퍼매치를 보고 있자니 아무리 스토리가 넘쳐나도 팬들을 즐겁게 하지 못하는 처참한 경기력으로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슈퍼매치의 인지도가 있으니 이 라이벌전이 팬들로부터 당장 외면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기력이라면 조금씩 슈퍼매치에 실망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점점 이 상품성은 닳아 없어질 게 뻔하다. 양 팀 선수들과 감독들은 반성해야 한다. 선배들이 일궈놓은 슈퍼매치를 이런 식으로 의미 없게 소비하는 건 수원삼성과 FC서울에 속한 사람들의 직무유기다. 경기가 끝난 뒤 기자회견장에서 FC서울 황선홍 감독은 "상대가 수비적으로 내려서서 힘들었다"고 했고 수원삼성 서정원 감독은 여기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하면 우리도 마찬가지다. 서울도 수비적이었다"고 했다. 핑계만 난무한다. 이게 과연 슈퍼매치인가. ‘슈퍼 핵노잼 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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