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민은 '벚꽃엔딩'을 싫어한다. 벚꽃이 지면 활약이 둔해지기 때문이다. ⓒpixabay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길거리엔 롱패딩을 입은 이들이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추위에 떨며 걸어 다녔다. 그런데 벌써 봄인가 싶더니 대낮에 운전을 할 때면 에어컨을 잠시 틀어야 할 정도로 덥다. 계절은 이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 흘러가고 흘러온다. 그리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 K리그에서는 누군가 활약하고 누군가 잊혀진다. 그런데 유독 한 계절에만 더 빛나는 선수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늘은 봄과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오면 유독 더 펄펄 날고 있는 선수들을 살펴보려 한다. 이 선수들이 활약하거나 떠오르면 ‘아 지금 계절이 바뀌었구나’라고 하면 된다.

봄엔 문선민

누가 봄엔 도다리라고 했는가. 봄엔 문선민이다. 강원도 철원 뺨 후려치는 추운 스웨덴에서 6년 간 선수로 활약한 문선민은 지난 시즌 한국으로 돌아온 뒤 여전히 날이 쌀쌀한 봄에 유독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문선민은 펄펄 날았다. 2017년 3월 18일 열린 전북전에서 교체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문선민은 바로 그 다음 경기였던 수원삼성과의 맞대결에서 첫 선발 출장해 두 골을 몰아치며 맹활약했다. 문선민은 K리그 두 번째 경기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이 라운드 리그 MVP에 선발되기도 했다. 이후 공격 포인트는 많지 않았어도 최전방에서의 움직임은 꾸준했다. 4월 30일 울산과의 경기에서도 도움을 뽑아냈고 5월 21일 전북전에서도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날이 따뜻해지자 문선민은 힘을 쓰지 못했다. 이후 공격 포인트를 전혀 올리지 못하며 부진에 빠졌다. 문선민은 “스웨덴에서 추운 날씨에만 운동을 하다 한국에 돌아와 더울 때 운동을 하려고 하니 몸이 축 늘어졌다”고 했다. 한국에서 꽤 쌀쌀한 봄 날씨가 문선민이 뛰던 스웨덴 외스터순드 지역에서는 한 여름 날씨다. 이후 문선민은 지난해 11월 날이 추워지니 또 귀신 같이 두 경기 2골 1도움이라는 맹활약을 이어가며 시즌을 마쳤다. 올 시즌에도 지난 달 10일 열린 전북전에서 혼자 두 골을 뽑아내며 거함 전북을 제압하는데 일등 공신이 됐다. 이 라운드에서도 리그 MVP는 문선민의 몫이었다. 문선민은 두 시즌 동안 확실히 봄에 강하다는 면모를 보여줬다.

문선민은 시즌 초반 활약이 좋지만 지난 시즌 봄이 지나면서 슬럼프에 빠졌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지난 시즌에도 초반에는 딱 지금과 같은 페이스였다. 그래서 시즌 초반 활약에 만족할 수 없다. 신경이 쓰인다. 지난 시즌처럼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즌에 임할 생각이다.” 이런 문선민에게 요즘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아직 봄인데 날이 너무 따뜻해졌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훈련을 하면서 날이 확 풀린 게 느껴진다. 이렇게 벌써 따뜻해지면 안 된다.” 여름이 일찍 오는 걸 좋아하지 않는 문선민은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한 걱정이 크다.

데얀이 보이는가. 나는 이 사진을 보면 웃고 있는 데얀의 모습이 보인다. ⓒpixabay

여름엔 데얀

데얀이 골을 몰아치기 시작하면 달력을 보라. 7월이나 8월일 것이다. 그리고 더워서 러닝에 팬티만 입고 부채질을 하며 선풍기를 틀 시기일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듀스’의 <여름 안에서>가 흘러나오고 있을 것이다. 해운대 해수욕장 파라솔 장사가 한철이듯 데얀도 딱 이때만 되면 한철 ‘골 장사’를 시작한다. 한두 해 일이 아니다. 데얀은 여름만 되면 펄펄 날았다. 해시계와 물시계, 배꼽시계보다도 정확한 게 바로 데얀이다. 데얀은 날이 더워지면 여지 없이 골을 넣는다. 데얀은 여름이 되면 한 경기에 막 두 골씩 넣는다.

지금껏 데얀은 K리그에서 무려 174골을 기록 중이다. 2007년 K리그에 입성해 중국으로 떠났던 시기를 제외하고 지난 시즌까지 9시즌 동안 모두 두 자리수 득점을 기록했다. 이 자체로도 K리그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다. 특히나 여름에는 더더욱 무섭다. 174골 가운데 7~8월에 기록한 골만 61골이다. 24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랐던 2011년에는 여름에만 11골을 몰아쳤고 31골을 뽑아낸 2012년에도 7~8월에 11골을 넣었다. 중국에서 돌아와 맞은 2016년에도 한물 갔다는 평가가 무색하게 13골 중 7골을 여름에 뽑아냈다. 데얀은 지난 시즌 역시 날이 더워지자 4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는 등 펄펄 날았다. ‘여름 데얀’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더 놀라운 건 데얀 스스로 “여름에 따로 강한 특별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 것이다. 보양식을 따로 챙겨먹지도 않는데 데얀은 여름만 되면 힘을 쓴다. 여름에 삼계탕을 그렇게 챙겨 먹으면서도 힘 한 번 못쓰는 나는 데얀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데얀은 그저 “어린 선수들과 경쟁하기 위해 웨이트트레이닝을 열심히 한다”면서 마치 수능 만점자가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는 식의 말만 내뱉었다. 올 시즌 수원삼성으로 이적하고는 어떤 모습일까. 데얀은 일단 이번 봄에는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다. K리그1 세 경기 만에 첫 골을 넣은 게 전부다. 하지만 조금씩 날씨가 더워지고 있다는 건 수원삼성 팬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여름이 오면 데얀의 몰아치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데얀이 보이는가. 나는 이 사진을 보면 웃고 있는 데얀의 모습이 보인다. ⓒpixabay

가을엔 박성호

노량진 수산시장에 전어가 나오기 시작하는 가을이 되면 그라운드에서는 박성호를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을하면 집 나간 며느리가 전어 굽는 냄새를 맡고 돌아오고 박성호의 골을 보기 위해 팬들이 축구장으로 돌아온다. 박성호는 자타가 공인하는 ‘가을 사나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을이 되면 가장 바빠지는 두 남자가 바로 <잊혀진 계절>의 가수 이용과 박성호 아닐까. 아마 월드컵이 6월이 아니라 가을에 열렸다면 우리는 월드컵에서 펄펄 나는 박성호를 봤을지도 모른다.

2012년 전반기 19경기에서 단 1도움에 머물며 온갖 비난을 온몸으로 감수해야 했던 이 남자는 9월 이후 정규리그에서 5골을 뽑아내며 팀의 상승세를 이끌더니 10월 열린 경남과의 FA컵 결승전에서는 극적인 결승골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2013년에도 마찬가지였다. 8월까지 단 세 골에 머물렀던 그는 9월 8일 전북과의 경기에서 두 골을 뽑아내더니 이어 벌어진 FA컵 4강 제주전에서도 결승골을 터뜨렸다. 여기에서 끝난 게 아니다. 9월 30일 인천 원정에서는 후반 교체 투입돼 14분 동안 두 골을 넣으며 팀의 귀중한 2-2 무승부를 이끌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수원과의 홈 경기에서 후반 막판 믿을 수 없는 동점골을 뽑아내 또 한 번 팀을 패배의 수렁에서 구해내며 2-2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는 2013년 FA컵 포함 7경기에서 6골을 기록하며 ‘가을 사나이’의 진가를 확실히 보여줬다. 이후 박성호는 J2리그를 거치며 나이를 먹고 임팩트가 다소 약해졌지만 지난 시즌에는 K리그2 성남에서 주전 공격수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특히나 지난 시즌에는 이상 기후 때문인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맹활약하며 9골을 뽑아내기도 했다. 앞으로도 가을이 되면 누군가 활약해 우리를 열광케 할 것이다. 하지만 ‘가을 전어’ 박성호 만큼 강렬함을 남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데얀이 보이는가. 나는 이 사진을 보면 웃고 있는 데얀의 모습이 보인다. ⓒpixabay

겨울엔 에닝요

봄과 여름, 가을에 좋은 활약을 펼쳐도 결국엔 겨울에 제일 잘하는 선수가 가장 많은 걸 얻는다. 시즌이 겨울에 끝나기 때문이다. 결과를 수확할 수 있는 겨울 시즌의 활약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단연 돋보이는 선수는 전북현대에서 뛰었던 에닝요다. 에닝요는 꾸준히 잘한 선수지만 특히나 날이 추워지면 더더욱 강렬한 모습을 자주 선보였다. 2009년 12월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 나선 에닝요는 성남을 상대로 전반에만 두 골을 뽑아내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이 우승은 전북이 창단 15년 만에 처음 경험한 우승이어서 의미는 더 컸다. 당시 활약으로 에닝요는 전북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됐다.

이뿐 아니다. 이듬해에도 에닝요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겨울로 완전히 접어든 2010년 11월 20일 경남과의 챔피언십 6강 플레이오프에 나선 에닝요는 혼자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2-0 완승을 이끌어냈다. 2011시즌 초반 재계약 문제로 다소 주춤했던 에닝요는 서서히 컨디션을 끌어 올린 뒤 찬바람이 불자 또 한 번 완벽하게 부활했다. 2011년 12월에 열린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에닝요는 ‘겨울 사나이’의 진가를 유감 없이 발휘했다. 울산을 상대로 한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 두 골을 뽑아낸 그는 2차전에서도 한 골을 기록하며 팀을 또 한 번 우승으로 이끌었다.

에닝요는 챔피언결정전에서만 5골을 기록하며 역대 최다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6강 플레이오프까지 포함하면 6골이다. 이 역시 K리그 기록이다. 에닝요는 늘 꾸준한 선수지만 가장 중요한 겨울에 더 빛났다. 비록 우승은 놓쳤지만 에닝요는 2011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결승 알 사드와의 맞대결에서도 골을 기록하며 진가를 발휘하기도 했다. 찬바람이 불고 길거리에 붕어빵이 등장할 때면 여전히 전북의 ‘녹색 독수리’ 에닝요가 생각난다. 전북에는 산타클로스보다 더 많은 선물을 주고 떠난 선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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