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수는 한국 파라 아이스하키의 1세대다. ⓒ대한장애인체육회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지난 17일 강릉 하키 센터에서 벌어진 2018 평창 패럴림픽 파라 아이스하키 한국과 이탈리아의 3,4위전. 1-0으로 한국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관중은 다같이 목 놓아 남은 시간을 카운트했다. “10, 9, 8, 7…3, 2, 1” 그리고 마침내 한국의 동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선수들과 관중이 하나가 돼 부른 애국가는 이 대회 최고 명장면으로 남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경기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가 있었다. 바로 한민수였다. 18년간 이어온 국가대표 생활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멋지게 패럴림픽 메달을 따낸 ‘장애인 아이스하키의 전설’ 한민수는 누구보다도 감격했다. 한민수의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인생 이야기를 전한다.

목발 짚은 채 공 차고 대청봉까지 오른 아이

1970년 태어난 한민수는 두 살 때 침을 잘못 맞은 게 문제가 됐다. 나중에 알게 된 병명은 류머티스 관절염이었다. 왼 무릎을 움직일 수 없었고 목발을 짚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지금도 “수술비 5천만 원만 있었으면 아들이 걸을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안타까워한다.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목발은 신체의 일부나 다름 없었다. 늘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스스로가 장애인이 아니라고 우겼다. 운동을 좋아해 목발을 짚고 남들과 똑같이 뛰어다녔다. 초등학교 때부터 목발을 짚고 친구들과 공을 찼다. “국가대표 축구 선수 출신 박남열과 최문식이 제 또래입니다.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제 친한 친구들과 그 친구들이 꽤 친해서 같이 공도 차고 했어요. 그때 최문식이 동대부고 주장이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통령배에서 우승한 걸로 기억해요. 저는 목발을 짚으면서도 똑같이 축구를 했어요. 애들이 잘 껴줬죠.”

20살이 된 한민수는 검도를 배우고 싶었다. 장애인 스포츠가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상황에서 비장애인이 운영하는 한 검도장으로 향했다. “이제 나이도 스무 살인데 여자친구도 보호해주고 싶고 운동도 좀 해보고 싶었어요. 제가 ‘짝대기’를 들고 다니잖아요. 이걸로 호신술을 배우면 여자친구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검도장에서는 “안 된다”고 했다. “몸이 불편해 같이 운동은 할 수 없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했다. 한민수는 크게 실망했다. “아주 기분 잡쳤죠. 내가 검도를 배워서 무슨 대회를 나가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돈 다 내고 호신술 좀 배우겠다는데 그것도 몸이 불편해서 안 된다고 했어요.”

하지만 곧바로 한민수는 운명적인 운동을 만났다. 바로 웨이트트레이닝이었다. “그래서 돌아 나오는데 바로 뒤에 헬스장이 있는 거예요. 친구가 ‘야 우리 검도 말고 이거나 하자’고 해 그때부터 웨이트트레이닝을 시작하게 됐죠. 처음엔 검도장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게 참 짜증이 났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검도장 관장님이 거절해준 게 고마운 일이었네요.” 한민수는 목발을 짚고 산 덕분에 상체 근력이 누구보다도 좋았다. 심지어 목발을 짚고 설악산 대청봉까지 오를 정도로 운동 신경과 체력이 대단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장애를 안고 살아온 그에게는 이 장애가 큰 불편함은 아니었다. “저는 육교를 오를 때 비장애인보다 훨씬 더 빨리 오를 수 있어요. 한쪽 난간을 잡고 한쪽은 목발을 짚고 쭉쭉 당기면 한 번에 3~4계단씩 올라갈 수 있거든요.”

한민수를 직접 만나 그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스포츠니어스

그가 만난 첫 번째 운동, 역도

이 시기부터 웨이트트레이닝을 통해 몸을 더 키웠다. 그에게 운동은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온전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먹고 살아야 해 세상으로 나왔지만 편견과 싸워야 했다. 고등학교 3학년 졸업 무렵 전자과 졸업을 앞둔 한민수는 첫 직장을 구하러 갔다가 거절 당했다. “우리는 짐도 날라야 하는데 몸이 불편한 사람은 같이 일을 할 수 없어.” 한민수가 처음 접한 사회는 이토록 냉담했다. “그 아저씨가 저를 과소평가한 거죠. 저 목발 짚고도 쌀 40kg을 메고 뛰어 다니거든요. 그래서 너무 화가 나 ‘에이, 나 이 일 안 할 거야’라고 팽개치고 자동차 열쇠 깎는데서 1년 정도 일을 했죠.” 이후 한민수는 음악 다방에서도 1년 동안 DJ를 하기도 했다. 이 무렵 몸이 불편하지 않은 친구들은 모두 군대로 떠났다.

이때까지 한민수는 자신을 장애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목발을 짚고도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믿었고 실제로도 그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한민수는 여러 차별을 겪으며 ‘나도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처음 먹게 됐다. 그리고는 23살의 나이에 장애인 국립재활원을 처음으로 찾았다. 장애인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취업을 연결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한민수는 이곳에 가 충격을 받았다. “저는 장애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곳에서 많은 장애인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죠. 처음에는 ‘난 너희와 달라’라는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한민수는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게 됐다. 자신도 장애를 가졌다는 걸 처음으로 인정하게 됐다.

그는 이곳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컴퓨터 프로그래밍 이론 시험에 붙고 실기를 앞두고 있을 때였는데 한 오디오 스피커 회사에서 장애인 국립재활원에 연락이 왔다. “거기 계신 장애인 분들 중 몇 분만 우리 회사로 보내주세요.” 기업마다 의무적으로 장애인을 고용해야 했고 국립재활원 측에서는 이 제안을 받은 뒤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 전자 쪽을 공부했던 한민수가 좋겠다고 추천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실기 시험을 앞두고 있던 그는 고민했다. 그러다 한민수는 선택을 내렸다. “그래. 돈을 좀 벌어보자.”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실기 시험을 포기하고 곧바로 취업했다. 오디오 제작 관련 일이었다. 그의 나이 23살이었다. 입사 후 두 달 만에 옆에서 같이 일하던 한 여성과 사랑에 빠졌고 퇴근 후에는 늘 웨이트 트레이닝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민수를 직접 만나 그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스포츠니어스

청천벽력 같은 진단 “다리를 절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25살 때부터 다리가 이상했다. 두 살 때부터 제대로 쓰지 못했던 왼쪽 다리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순간 왼쪽 무릎에 구멍이 나 있는 걸 발견했다. 큰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병원에서 진단을 한 의사는 깜짝 놀랄 말을 했다. “다리를 절단하셔야 합니다. 골수염입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이 염증이 온몸에 퍼져요. 다리를 자르시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동안 왼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해 목발을 짚고 다녔지만 그래도 다리가 있는 것과 없는 건 달랐다. 한민수는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내 다리를 잘라달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치료만 하면 나을 거 같았거든요.” 한민수가 다리를 자를 수 없다고 하자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한민수가 절단보다는 치료로 버텨보겠다고 완강히 이야기하자 의사는 하반신을 마취 시킨 뒤 바로 치료에 들어갔다.

“아프지는 않은데 뭘 막 갈아내는 요상한 소리가 들려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자 의사 네 명이 달려들어 저를 막더라고요. 이거 보면 충격 받아서 쇼크가 올 거라며 못 보게 했어요. 무릎에 고름이 찼다 굳었다를 반복해 완전히 찰고무처럼 붙어 있다고 하더군요.” 어린 시절부터 목발을 짚고 다니던 한민수는 유독 자주 넘어졌다. 목발 맨 아래 고무가 닳아 없어지면 목발의 나무가 그대로 노출됐고 이 나무는 계속 바닥에 닿으면서 반질반질해졌다. “학교 복도를 한 번 청소하고 왁스를 발라 놓으면 바닥이 미끄러워지잖아요. 그러면 이 목발을 짚고 가다가 그냥 대짜로 넘어져요. 제 왼쪽 다리가 무릎이 굳어 뒤로 꺾여 있었는데 이렇게 넘어질 때마다 무릎으로 넘어진 거죠. 그러면서 물이 찼다 빠졌다 하면서 염증이 심해진 거예요.”

한민수는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치료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누구나 그렇지 않았을까요? 남들은 어차피 굽어진 다리가 보기에도 흉한데 그냥 자르라고 했지만 그건 죽어도 싫었어요. 입장을 바꿔서 자기 다리라면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하겠죠. 불편해도 이건 내 다리인데요. 저는 불편하지만 이 다리가 있어서 나무도 잘 타요. 이 다리가 정말 저에게는 소중했습니다.” 한민수는 치료를 받으면서도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헬스장에서 한민수는 남들보다 압도적인 힘을 선보였고 근력도 엄청났다. 이렇게 아픈 와중에도 27살 때 장애인 역도가 있다는 걸 알고 이때부터는 선수로도 활약하기 시작했다. 무게를 올리다보니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할 정도가 됐다. 휠체어 농구도 겸했고 꾸준히 치료도 했다.

한민수를 직접 만나 그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스포츠니어스

“제발 다리만은 자르지 않게 해주세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운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계속해도 치료도 받았다. 장애인 역도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힐 정도로 실력도 인정받았고 6년 열애 끝에 결혼에도 골인했다. 결혼을 하니 돈을 더 벌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회사를 나와 퇴직금으로 치킨집을 차렸지만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성인 오락실의 지배인으로도 일했고 이후 이 오락실이 문을 닫으면서 다시 작은 스피커 제작 업체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왼쪽 다리 치료도 열심히 받았다. 그렇게 무려 다리 절단 진단을 받고도 5년을 버텼다. 그 사이 사랑스러운 첫 째 딸이 태어났다. 하지만 왼쪽 다리 상태는 점점 다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소독을 하며 버티면서 일을 했다. “그래도 가장이 책임감이 있어야 하잖아요. 아내도 있고 딸도 태어났는데 제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죠. 돈을 벌어야 했어요.” 어린 시절 “두 다리로 걷게 해달라”고 빌던 이 아이는 서른 살이 돼 “제발 다리를 자르지만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골수염 판정을 받고 5년을 버텼지만 결국 염증이 전이가 되고 말았다. 허벅지까지 새빨개지더니 온몸이 오한이 찾아왔다. 염증이 폐나 장기로 가면 생명이 위험했다. 하지만 한민수는 그래도 꾹 참았다. “병원에 가면 다리를 자르라고 하는데 어떻게 병원을 가겠어요. 그렇게 2주를 끙끙 앓았죠.” 무릎에는 계속 고름이 찼다. 한의원에 가 “제발 고름만 안 나오게 해달라고 해 약을 지었는데 그걸 먹었더니 이번엔 허벅지 반대쪽에서 고름이 철철 나오더라고요.” 결국 한민수는 그렇게 2주를 버티다가 병원으로 향했다. “죽기 직전이 되니까 그래도 죽기는 싫어서 병원을 가게 되더군요.” 하지만 병원에 가니 특진을 받아야 한다면서 2주 후에 예약을 잡아주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당장 죽을 것 같은데 또 다시 2주를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한민수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한 대형병원을 소개 받아 달려갔다. 그런데 한민수의 다리 상태를 심각하게 살펴본 의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죽을래요? 아니면 다리 자르고 살래요?” 아내와 4개월 된 첫 아이가 바로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봤다. 한민수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운전해서 아내하고 아이를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병원으로 오겠습니다.” 하지만 의사는 여전히 단호했다. “오늘 당장 자다가 죽을 수도 있어요.” 결국 그 자리에서 한민수는 바로 입원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병원의 한 간호사가 한민수의 집 근처에 살고 있어 아내와 아이를 매일 병원으로 출퇴근시켜 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한민수는 다리 절단은 죽어도 싫어 상처 부위를 모두 도려내는 치료를 택했다. 한민수는 “빨리 돈 벌러 가야한다”면서 “치료 받고 퇴원시켜 달라”고 했다. 그만큼 그에게는 생계가 중요했다.

두 다리가 있을 때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것

의사는 치료를 하면서도 다리 절단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했다. “어차피 계속 재발하면 또 입원하고 또 입원하고 할 텐데 그러면 사회 생활이 안 되니 절단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명한 선택입니다.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 끼고 다니는 게 더 낫습니다. 목발 버리고 의족 차고 생활하시는 게 어떨까요?” 양다리를 절단한 여자 후배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이 후배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의족하면 되겠네. 목발 안 짚어도 되고 지금보다 낫겠어.” 한민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주변에서는 다리를 절단하고 새 인생을 사는 게 미래를 위해 더 좋은 선택이라고 했다.

염증이 전이된 허벅지 살을 거의 반 이상 도려내고 한 번 소독을 할 때마다 거즈를 한 박스씩 도려낸 부위에 처박았다. “하루 종일 대고 있던 거즈를 다음 날 아침 떼어내는데 그때마다 10만 볼트 전기가 오는 느낌이었어요. 소독약을 들이 부을 때면 비명을 질렀죠. 욕을 한 적도 많아요. 아파서 운 적도 있고 이 모습을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에게 미안해서 운 적도 있어요.” 한민수는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또 눈물을 흘렸다. “원래 이 이야기할 때는 그래도 덤덤해져 눈물이 안 나는데 오늘은 이상하네요. 울보가 됐어요.” 한민수는 이렇게 하루하루 지옥 같은 병원 생활을 했다.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생활한 그는 결국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리를 자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꼭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의사가 소원이 뭐냐고 묻자 한민수가 답했다. “마지막으로 두 다리가 있을 때 장애인체전에 나가고 싶습니다.”

의사는 “혹시 미친 거 아니냐”고 물었다. 하지만 한민수는 꼭 금메달이 아니더라도 마지막으로 두 다리가 있을 때 뭔가 해보고 싶었다. 이미 몸은 정상적이지 않았고 힘도 부족했지만 그가 원한 건 성적이 아니었다. “그냥 참여하고 싶었어요. 병원에 재활시설이 붙어 있어서 그래도 틈만 나면 가서 운동을 좀 했거든요. 힘이 없었고 살도 쪽 빠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한민수는 다리 절단 수술이 예정돼 있는 하루 전날 2000년 인천장애인체육대회에 참가했다. 몸에는 염증이 퍼지고 있었지만 그는 이 대회에서 102.5kg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차지했다. 평소 들던 110kg에는 실패해 금메달은 놓쳤지만 말 그대로 인간승리였다. 그리고 그는 메달을 딴 바로 다음 날 다리 절단을 위해 수술대에 누웠다.

한민수를 직접 만나 그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스포츠니어스

잊을 수 없는 2000년 6월의 어느 날

2000년 6월이었다. 뭘 아는지 4개월 된 딸은 하루 종일 울었다. “그날은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어요.” 마약 성분인 강력한 진통제 모르핀을 맞으면서 계속 잠만 잤다. “자다가 잠깐 깨면 엄마가 와 있고 또 깨보면 작은 엄마가 와 있고 또 계속 자다가 깨보면 장모님이 와 계셨어요.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내 다리 내놓으라’고 했대요. 그래서 다들 너무 가슴 아파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왼쪽 다리를 잘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리 절단 이후에도 세 시간에 한 번씩 모르핀을 맞아야 할 정도로 통증이 극심했다. 절단 부위가 너무 아파 한 시간 후 간호사에게 가 “모르핀 좀 더 놓아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간호사들은 “세 시간 채우고 오셔야 한다”며 한민수를 돌려 보냈다. 한민수는 하루에 잠을 한 시간도 못 잤다. 너무 아파 비명을 질렀다.

통증이 이렇게 극심한 건 다리를 절단하면서 신경을 다 한꺼번에 잘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보름 후 퇴원해도 좋다는 진단이 내려졌지만 한민수는 나아진 게 없었다. “이대로 집에 가면 가족들이 너무 가슴 아파할 것 같아요. 보름만 병원에 더 있겠습니다.” 처음에는 “돈 벌어야 하니 빨리 치료하고 퇴원시켜달라”던 한민수는 그렇게 스스로 병원에 더 있겠다고 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그래도 하루 하루 버티는 힘이 있었어요.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안 아프겠지’라는 생각으로 버텼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어요.” 퇴원 후에도 절단 부위의 통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한민수는 꾹 참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날들이다. “어휴, 세월이 지나니까 이제는 적응이 돼서 괜찮아요.”

한민수는 곧바로 일을 다시 시작했다. 목발을 짚었을 때는 한 손밖에 쓰지 못했지만 의족을 차고 양손으로 일을 시작했다. 먹고 살아야 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면서 밤과 주말을 이용해 역도와 조정, 휠체어 농구를 하며 몸을 만들었다. “직원들이 저를 좋아했어요. 저는 몸이 불편하다고 몸 쓰는 일을 빼지 않거든요. 걷는 게 불편한 거지 물건을 쌓는 일이 안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생활고는 점점 더 심해졌다. “주변에서는 아내도 같이 일을 하면 조금 더 형편이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저는 아이한테 엄마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가족이 먹고 살 돈은 내가 벌어 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죠.”

서른 살에 찾아온 새로운 도전, ‘썰매 하키’

스피커 회사에서 3년간 몸 쓰는 일을 한 그는 이 무렵 운명적인 종목을 만나게 됐다. 바로 장애인 아이스하키였다. 다리를 절단한 뒤 6개월 만에 만난 운명이었다. 휠체어 농구 팀 이성근 감독이 처음 한국에 장애인 아이스하키를 도입하면서 한민수에게 권유한 것이었다. 이성근 감독은 비장애인 아이스하키 선수로 촉망받았지만 대학 선수 시절 강력한 바디 체크를 당한 뒤 신경이 끊어져 장애인이 됐다. 이후 휠체어 사업을 하며 휠체어 농구 팀을 이끌던 그는 국내에 장애인 아이스하키도 처음 들여왔다. 장애인 아이스하키가 보급된 일본에서 썰매 한 대를 들여와 시작한 것이었다. 휠체어 농구와 역도 선수가 주축이 돼 8명의 선수단을 꾸렸고 코치 두 명과 감독 한 명이 자리를 채웠다. 팀 이름은 ‘연세 이글스’였다.

한민수는 이때 창단 멤버로 우리나라 1세대 장애인 아이스하키 선수가 됐다. 이때가 그의 나이 30살이었다. 2000년 11월 한민수는 그렇게 운명적으로 아이스하키와 만났다. 물론 직장 생활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한민수는 평일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는 역도를 하면서 주말에는 아이스하키를 하기 시작했다. 운동에만 전념하고 싶어도 전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둘째가 태어났고 가정을 책임져야 해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무려 6년 동안 이 생활을 이어갔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그에게 운동선수의 길을 병행하는 건 대단히 힘겨웠다. 몸이 힘든 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가 너무 힘들었다. “생활고가 심했어요. 월급이 적고 많고가 문제가 아니라 소기업에 다니다보니 월급이 제때 나오지도 않았죠. 월급날에 맞춰 카드값도 나가야 하고 공과금도 내야하는데 그게 일주일이나 이주일씩 밀리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되죠.”

“월급이 적으면 그거에 맞춰 없는 대로 살면 되는데 그 적은 월급도 제때 나오지 않으니까 계속 연체가 쌓였죠. 한 번은 3천 원이 없어서 아이 분유값이 모자란 적도 있었어요. 주변에 돈을 빌려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때 아내와 함께 울었어요.” 한민수는 이렇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리고 아이스하키를 시작하고 6년이 지난 뒤에야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2006년 강원도청에서 장애인 아이스하키 팀을 창단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장애인 아이스하키 팀이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강원도청이 실업팀 창단에 나선 것이다. 이전까지 생업을 따로 유지하며 시간을 내 운동을 해야 했던 장애인 아이스하키 선수들이 온전히 월급을 받으며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한민수의 나이 36세 때였다. 그는 그렇게 이 늦은 나이에 운동으로 돈벌이를 하는 선수가 됐다.

한민수를 직접 만나 그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스포츠니어스

일취월장한 실력, 첫 올림픽 출전의 영광

이 팀에는 잘나가던 태권도 7단 선수도 있었고 주먹 좀 쓰던 조폭 출신도 있었다. 야구선수의 꿈을 키우다 다쳐 장애인이 된 이도 있었고 군대에서 장갑차에 깔려 양 다리가 절단된 선수도 있었다. 각자 사연 있는 선수들이 뭉쳤다. “조폭 행동대장이 칼을 맞은 뒤 장애인이 됐어요. 그런데 부하 서른 명이 찾아와서 ‘형님 저희가 끝까지 모시겠다’고 하고 회식을 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났다고 하더라고요. 바지에 실례를 해놓고 그걸 몰랐던 거죠. 이후 이 조폭은 사람들을 만나려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장애인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요.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나오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그 계기는 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과 멀어졌던 이들이 운동을 통해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악에 받쳐 운동을 했다. 강원도청 소속으로 아이스하키를 하면서 전국 하계 장애인 체육대회가 열리면 또 다른 종목 메달도 싹쓸이했다. 휠체어 펜싱을 비롯해 휠체어 럭비, 조정 등 각자 원래 주종목으로 가 메달을 따왔다. 그렇게 2주 정도 하계체전에 나가 메달 사냥을 한 뒤 다시 강원도청으로 돌아왔다. 상체 근력을 주로 이용하는 경기에서는 이 선수들이 한국 최고였다. 한민수도 역도 대회에 나가 늘 메달을 따고 상위권을 유지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강원도청 팀이 창단돼 다른 일을 하지 않고도 전문적인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무렵 한 대기업에서는 자체 제작 썰매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물론 비장애인과 함께 아이스링크를 써야해 새벽 한시부터 훈련을 한 적도 많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한민수는 이렇게라도 운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지원이 이뤄지니 실력도 갈수록 성장했다. 2010년에는 꿈에 그리던 첫 올림픽에도 나갔다. 올림픽 예선에서 독일, 스웨덴, 에스토니아를 꺾고 자력으로 출전권을 따냈고 밴쿠버 패럴림픽 아이스하키에서 6위를 차지하며 잊을 수 없는 올림픽 첫 출전의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소치 패럴림픽에도 참가했다. 과정 자체만으로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2014년 소치 장애인동계올림픽 최종예선 플레이오프에서 한 수 위로 평가받던 일본, 스웨덴, 독일, 영국을 연파하며 5전 전승으로 다시 올림픽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졌다. 극찬이 이어졌다. 캐나다 대표팀 주장 그렉 웨스트레이크는 “한국은 10년 전 슬레지하키를 처음 시작했다. 밴쿠버 패럴림픽에서 경기했을 때만 해도 우리가 16-0, 20-0으로 이겼다”면서 “한국은 이후 모든 대회에 출전하면서 꾸준히 실력을 키웠다. 난 한국의 노력을 존경한다. 그들은 경쟁력 있는 팀이 됐다”고 전했다.

러시아전의 환희와 메달 획득 실패의 좌절

2010년 소치 패럴림픽 당시 한민수의 나이는 어느덧 45살이었다. 주변에서는 “이 대회가 끝나면 은퇴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가 이어졌다. 한민수는 일단 올림픽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내심 메달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첫 경기에서 홈팀 러시아를 상대해 놀라운 경기를 선보였다. 최강 중 하나로 평가받는 러시아의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경기장에는 푸틴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고 홈 팬들의 뜨거운 응원이 쏟아졌다. 경기 초반 당황한 한국은 먼저 두 골을 내주며 흔들렸지만 이때 한민수가 대역전 드라마를 시작했다. 0-2로 뒤진 2피리어드 종료 직전 한민수가 통쾌한 중거리 슛으로 러시아 골문을 갈랐고 3피리어드 시작과 함께 조병석이 한 골을 더 넣으면서 승부를 연장전으로 이어갔다. 이후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한국은 러시아와의 승부치기를 펼쳤다.

세 명의 선수가 연이어 승부치기를 펼쳤지만 경기는 2-2로 팽팽했다. 올림픽과 달리 패럴림픽 승부치기에서는 슈터를 미리 정해 한 차례씩 나서도록 합의했지만 러시아는 드미트리 리소프가 두 차례나 슈터로 나왔다. 그러자 한국도 이미 한 차례 승부치기를 한 조영재를 다시 슈터로 내세웠지만 심판의 제지를 받았다. 이해할 수 없는 판정이었다. 결국 한국은 마지막 슈터로 한민수를 내세웠다. 한민수는 승부치기를 앞두고 오른쪽 스틱을 번쩍 들고 관중석을 쳐다봤다. 꽉 찬 홈팬들 사이에서 응원을 보내는 100여 명의 한국 관중을 향한 메시지였다. “‘걱정마세요. 제가 꼭 넣겠습니다’라는 뜻이었어요. 제가 자주 쓰는 스킬이 몇 개 있는데 가장 확실한 스킬을 쓸 생각이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상대 골리를 100% 낚아 골을 넣을 자신이 있었거든요.” 한민수가 오른쪽 스틱을 번쩍 들고 드리블을 하기 위해 나아가자 갑자기 심판이 한민수를 멈춰 세웠다.

“심판이 출발 지시를 해야 출발하는 건데 이미 한참 멀리에 있을 때부터 저는 심판의 출발 지시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심판이 출발 지시를 안 했다며 저를 다시 출발점으로 돌려 세우는 건 흐름을 깨기 위한 거였죠.” 하지만 한민수는 이 흐름이 끊긴 뒤에도 골을 넣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센터 라인에서 드리블을 하며 골리를 한쪽으로 몰고 다시 방향을 바꿨다가 원래 방향으로 돌아 강력한 슈팅을 연결했다. 그가 날린 퍽은 그대로 골문 천장으로 꽂혔다. 한국의 역사적인 승리였다. 강호 러시아를 적지에서 잡은 것이었다. 한민수는 다시 한 번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푸틴 대통령한테 ‘봤지?’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우리 응원단에게 ‘제가 넣는다고 했잖아요’라는 의미이기도 했어요.” 한민수는 평창 패럴림픽 이전까지 최고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이 경기를 꼽는다. 분위기도 좋아 메달도 충분히 가능할 줄 알았다.

한민수를 직접 만나 그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스포츠니어스

그에게 찾아온 마지막 패럴림픽

하지만 이후 한국은 이후 미국에 0-3로 패한 뒤 이탈리아에도 1-2로 패하며 조별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이 순간만을 위해 땀 흘렸던 한민수를 비롯한 선수들에게는 허탈한 결과였다. 은퇴까지 생각했던 한민수는 다짐했다. ‘꼭 안방에서 열리는 4년 뒤 패럴림픽에서는 메달을 따자.’ 한민수는 은퇴를 미뤘다. 한민수는 대표팀에서 무려 10년간 이어오던 주장직도 반납하고 운동에만 매달렸다. 2015년 아이스슬레지하키 세계선수권대회 B풀에서는 5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획득, A풀로 진출했다. 그렇게 소치 패럴림픽이 끝난 뒤 4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서광석 감독은 “마지막 패럴림픽이니 다시 주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처음엔 고사했지만 책임감을 가지고 다시 주장이 되기로 했다. 4년 동안 다시 패럴림픽을 준비한 한민수의 나이는 어느덧 49세가 돼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마지막 패럴림픽을 준비했다.

올림픽 개막 6개월 전 한민수에게는 또 하나의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평창 패럴림픽 성화 최종 점화자로 그가 후보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파라 아이스하키의 전설과도 같은 선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 은퇴 무대에 이런 영광이 있을 수 있겠나 싶었죠.” 한민수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20명의 후보자 중에 최종 세 명의 후보를 추렸는데 한민수는 여기에도 포함됐다. 하지만 의외의 소식이 전해졌다. 남북 단일팀 협상이 이뤄지면서 최종 점화자가 남북 화해 무드에 도움이 될 이로 선정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평창 패럴림픽 석 달 전 현장에서 리허설을 한 번 했는데 한민수는 여러 모로 불리했다. 의족을 차고 난간도 없는 계단 120개를 올라가 성화를 점화하는데 무려 4분 30초가 걸렸다. 한민수는 여러 이유로 최종 점화자 후보에서 배제되는 분위기였다. “처음엔 성화 점화자의 희망에 부풀어 올랐는데 그 마음을 다시 내려놓는 게 쉽지는 않더라고요.”

한민수는 그래도 혹시 성화 최종 점화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체 운동을 열심히 했다. 계단을 120개나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숙소 6층을 늘 계단으로만 걸어 다녔다. 그런데 패럴림픽 일주일을 앞두고 다시 연락이 왔다. “성화 최종 주자로 선정됐다”는 것이었다. 휠체어 컬링 서순석과 비장애인 컬링 김은정이 최종 점화를 하는데 그 바로 직전 주자가 한민수라는 소식이었다. 성화 주자는 극비리에 준비해야 했고 훈련 시간도 피해야 해 밤 12시에 가 리허설을 했다. “처음에는 그라운드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밧줄을 잡고 올라갈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보니 시간이 엄청 많이 걸렸죠. 그래서 다시 중간에서부터 올라가기로 계획을 바꿨는데 리허설을 하러 간 날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리허설을 못했어요. 그래도 밧줄 타고 올라가는 건 자신 있어서 ‘괜찮겠다’ 싶었죠. 턱걸이도 20개씩 가볍게 하는데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죠.”

세계의 이목이 한민수의 등정에 쏠리다

그렇게 한민수는 평창 패럴림픽 성화 최종 주자가 됐다.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되고 그 자리에 서니 문제가 있었다. “현장에서 바뀐 방식으로 리허설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잖아요. 안전바와 고리를 차고 이동하려니 문제가 생긴 거예요. 인이어를 차고 있었는데 귀속으로는 ‘이제 일어나세요’라는 말이 들려왔지만 안전바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그 주변에 앉아 계시던 관중은 제가 낑낑대며 당황하고 있는 걸 다 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성화는 경기장에 입장해 한 바퀴 돌고 있었어요. 곧 제 차례인데 너무 당황스럽더라고요. 결국 그 자리에서 일어나려면 안전바를 풀어야 했어요. 당황하다가 안전바를 풀고 탁 일어서는데 그때 정말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성화가 계단 앞에 등장해 불이 쫙 들어오는 거예요. 아마 몇 초만 늦었어도 문제가 생겼을 텐데 타이밍이 잘 맞았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어나 다시 안전바를 슬쩍 걸었어요.”

그에게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건 두 번도 더 할 수 있었어요.” 그는 헬멧에 두 딸의 이름과 아내를 위한 하트를 붙인 뒤 그렇게 밧줄을 타고 평창 패럴림픽 개막식장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그가 밧줄에 의지해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는 순간 이 모습을 지켜본 전세계인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인간 승리의 상징이 됐다. “저도 다 오른 뒤에는 울컥했어요. 일단 안전바가 살짝 말썽이었지만 문제 없이 임무를 마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많은 분들의 박수를 받아 저 역시 울컥했죠.” 이 장면은 평창 패럴림픽의 하이라이트였다. 몸이 불편해 회사에서 문전박대를 당해야 했던 청년이,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도 다시 일어섰던 이 청년이 이제는 어느덧 쉰 살 가까운 나이가 돼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전세계인의 축제에서 주인공이 돼 있었다.

하루 뒤 곧바로 아이스하키 일본과의 승부가 펼쳐졌다. 한민수는 이 경기에서 안정적인 수비력을 선보이며 한국의 4-1 승리를 이끌었다. “성화는 성화고 경기는 경기잖아요. 성화 봉송을 한 건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저는 성화를 옮기기 위해 올림픽에 온 건 아닙니다. 일부러 관심이 우쭐해 질까봐 인터넷도 안 했어요. 영광스러운 일은 다 잊고 경기에 모든 걸 쏟고 싶었거든요. 첫 경기 일본과의 대결에서부터 죽을 힘을 다했습니다.” 이후 체코와의 연장 승부 끝에 승리를 거둔 한국은 미국에 패해 조2위로 4강행을 확정지었다. “미국과 캐나다는 18살, 19살 선수들도 많아요. 한두 해 선수 생활을 한 게 아니라 유소년부터 올라온 애들이죠. 퍽 스킬이나 이런 게 정말 좋아요. 그런데 이런 자식뻘 되는 애들한테 ‘퍽큐’ 소리 들어가면서도 악착 같이 했어요.” 4강에서 캐나다에 패해 3,4위전에 진출한 한국은 이탈리아와 운명의 경기를 준비했다.

한민수를 직접 만나 그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스포츠니어스

한민수의 마지막 경기, 그리고 애국가

4년 전 소치에서 불의의 일격을 가했던 이탈리아와의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였다. 한민수에게는 18년 아이스하키 인생을 정리하는 마지막 승부였다. 올림픽에 세 번째 도전하는 그가 메달에 도전하는 마지막 기회였다. 7천여 관중석은 이들을 응원하는 관중으로 꽉 들어찼다. 티켓이 매진돼 발길을 돌리는 이들도 많았다. 그동안 팬들의 관심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한민수를 비롯한 한국 선수들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한민수는 패럴림픽에 관심을 가져준 영부인 김정숙 여사에게 자신의 유니폼을 선물했다. 평창 패럴림픽 50일을 앞두고 다섯 번을 만난 김정숙 여사를 위한 선물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드리는 것보다는 그래도 마지막 경기 때 선물해 드리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어요.” 이 유니폼은 한민수 아내의 손을 거쳐 김정숙 여사에게 전달됐고 김정숙 여사는 ‘68번’ 한민수가 새겨진 이 유니폼을 입고 관중석에 앉았다.

국가대표로서 마지막 경기를 안방에서 치르는 한민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경기장에는 김정숙 여사와 함께 문재인 대통령이 등장했고 관중은 경기 내내 한민수를 비롯한 한국 선수들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한국이 주도하는 경기는 2피리어드가 끝날 때까지도 0-0이었다. 소치 패럴림픽에서 이탈리아에 발목을 잡혔던 한국은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3피리어드를 앞두고 라커룸에서 선수들끼리 “서로 믿자. 경기 끝나고 웃으면서 숙소로 돌아가자”는 약속을 했다. 한국에 등록선수가 40명 뿐인 장애인 아이스하키는 이미 선수 모두가 한 가족이었다.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이들은 서로를 믿고 있었다. 그리고 3피리어드 종료 3분 18초를 남기고 마침내 이 경기의 유일한 골이 터졌다. 정승환의 돌파 이후 패스를 이어 받는 장동신의 극적인 결승골이었다. 경기장을 찾은 이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한민수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애들한테 ‘눌러. 눌러’라고 했어요. 마음을 누르고 경기에 집중하자는 것이었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침착하자고 했습니다. 이탈리아가 공세를 펼치는데 아마 거기에서 한 골 먹혔으면 경기가 뒤집혔을 거예요. 죽기살기로 막았습니다. 이 시간이 한 두 시간처럼 느껴졌어요. 10초를 남기고 관중이 다같이 카운트다운을 하는데 너무 선명하게 잘 들렸지만 시간이 너무 안 가는 거예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경기가 끝나고 막 눈물이 쏟아지는데 나만 우는 줄 알았더니 다 우는 겁니다. 덩치 큰 조영재도 아주 엉엉 울더라고요.” 이들은 링크 한가운데 모여 “대~한민국”을 외친 뒤 서광석 감독이 제안한 애국가를 목 놓아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덧 관중석에서도 애국가를 따라 부르며 여기 저기에서 눈물을 쏟았다. 정승환은 이 장면을 “생에 가장 벅찬 애국가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 장면은 한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을 장면 중 하나가 됐다.

한 자원봉사자가 한민수에게 전한 말

한민수에게는 국가대표로서 마지막 경기가 인생 최고의 경기로 남았다. 선수들과 부둥켜 안고 기쁨을 나누는데 누군가 아이스링크로 들어왔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수고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옆에 선 김정숙 여사는 한민수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이 자체로도 한민수에게는 엄청난 영광이었다. 한민수는 이번 패럴림픽에 모든 걸 쏟았다. “후회는 없습니다. 죽기 살기로 5경기를 뛰었고 응원의 힘도 느꼈습니다. 늘 관심이 필요했는데 과분할 정도로 많은 응원과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경기를 회상하며 다시 울먹였다. “다리를 절단할 때 태어난 그 첫 딸 아이가 어느덧 고등학교 3학년이 됐어요. 경기장에서 제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는 울컥했습니다. 지금도 자꾸 눈물이 나네요. 저에 대한 칭찬을 잘 안 하는 편인데 그래도 이번 패럴림픽은 조금 칭찬해 주고 싶어요. 저도 잘했고 우리 동생들은 더 잘했거든요.

그러면서도 잊지 않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같이 열심히 했는데 패럴림픽에 나오지 못한 선수들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요. 감동적이면서도 슬픈 경기였습니다.” 한민수는 이제 국가대표 생활을 마무리했다. 강원도청과는 올해까지 계약이 남아 있어 선수 생활을 마감할 여유가 남아 있다. 은퇴 후에는 장애인 아이스하키 지도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할 예정이다. 하지만 걱정도 있다. “강원도청에는 이미 훌륭한 지도자 분들이 계십니다. 팀이 하나 정도 더 생긴다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지도자를 꿈꾸고 있지만 사실 제가 지도자로 갈 팀이 없어요.” 한민수는 이제 또 한 번 미래를 선택할 기로에 놓였다. “일단은 아이스하키 지도자로 후배들을 지도하고 싶고 강연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제 이야기에 누군가 조금이라도 희망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보람이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면서 한민수는 이번 패럴림픽에서 만난 한 자원봉사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훈련이 끝나고 돌아가는데 한 자원봉사자가 숙소 앞에서 사인을 부탁하더군요. 사인을 해드리는데 ‘저의 아버지도 장애인이셨어요. 30년 전에 장애인 육상을 하셨는데 아버지는 메달을 따지는 못하셨어요’라고 이야기하기에 ‘그랬구나. 반갑다’라고 답했죠. 그런데 메달을 딴 뒤 이 친구를 다시 숙소 앞에서 만났어요. 저를 기다렸다가 편지 한 장을 주고 가더라고요. 이 편지를 읽으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저는 장애인 아버지를 한 번도 자랑스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한민수 선수와 아이스하키 팀을 보고는 이제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게 됐습니다’라고 써 있는 거예요. 제가 누군가에게 이런 희망을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강연 기회가 있다면 비장애인에게도, 장애인에게도. 장애를 가진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에게도 희망을 드리고 싶어요.”

한민수를 직접 만나 그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스포츠니어스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

패럴림픽에서 감동을 선사한 한민수는 오히려 응원을 보내준 이들에게 감동 받고 있다. 그의 모교인 토평초등학교에서는 한민수 앞으로 무려 500여 통의 편지가 보냈다. 아이들은 “아저씨, 다리도 없는데 넘어졌다 일어나는 게 왜 이렇게 빨라요. 멋있어요”라면서 “줄 잡고 성화봉을 옮길 때 감동했어요”, “저도 이다음에 커서 아이스하키 선수가 될 거예요”라는 편지가 쏟아졌다. SNS를 통해 응원 메시지와 댓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민수는 시간이 걸려도 이들에게 모두 감사의 인사를 전할 계획이다. “SNS 댓글을 일일이 다는 것도 시간이 걸리지만 감사한 마음에 하고 있어요. 토평초등학교 후배들에게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 답장을 보낼 생각입니다. 누군가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기쁜 일이잖아요.”

한민수는 아내와 두 딸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제가 벌어준 걸로도 아내가 알뜰하게 큰 빚 없이 잘 살아왔어요. 너무 고마운 일입니다. 집안이 편하고 마음이 편해야 운동도 할 수 있잖아요. 아내의 희생이 없었으면 제가 마음 편하게 운동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1년에 300일씩 나가 있는 아빠를 늘 기다려주고 맞이해준 우리 두 딸들도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18년 동안 아이스하키를 할 수 있었던 건 가족들 덕분입니다. 제가 딸들한테 세뇌시킨 게 있어요. ‘아빠는 몸이 불편하지만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대표다. 나가서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으니까 기죽지 말라’는 말을 항상 해줬어요. 제가 너무 세뇌를 시켰는지 딸 친구들이 ‘너희 아빠 너무 멋지고 심지어는 40대에서 나올 수 없는 광이 난다’는 얘기도 했대요. 부끄러운 아빠는 아니었나 보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행복합니다.”

한민수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들이 희망을 품었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장애를 안았다는 이유로 세상에 나오길 꺼려하는 이들에게 꼭 이 이야기가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저는 늘 자신감 있게 살았어요. 20살 때부터 운동에 집중하고 몸에 힘이 생기니 어디 가서도 자신감이 넘쳤죠. 꼭 상대와 싸우자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면 내 의견도 당당히 이야기했어요. 운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장애가 있다고 숨지 말고 세상으로 나와 당당해 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소아마비 장애만 있어도 집안에 장애인이 있는 게 창피하다고 집밖에도 못 나가게 했어요. 하지만 스스로가 강해지고 세상과 부딪혀야 합니다. 자꾸 숨어서는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

그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길

“요즘에는 사고로 인해 중도 장애를 얻는 이들이 많습니다. 팔다리 다치는 데 나이도 없고 순서도 없어요. 어느 한 순간의 사고로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이런 중도 장애인은 세상이 자꾸 품으려고 해요. ‘다쳤는데 뭘 또 하려고 해. 내가 보살필게.’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말이 결국 그 사람을 망치는 겁니다. 운동을 통해 자신감도 얻고 사회성을 길러야죠. 몸은 불편해도 생각하는 거나 먹고 싶은 건 다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왜 장애를 가졌다고 위축되고 살아가야 하나요. 장애인을 보호한답시고 세상과 단절시키면 결국 이 사람들은 사회성을 잃고 자신감도 잃어요.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이런 정서가 깔려야 많은 장애인이 ‘어? 나보다 몸이 더 불편한 사람도 저렇게 사네. 나도 세상으로 나갈래’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 현재 등록된 장애인만 250만 명입니다. 그런데 비등록 장애인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두 배는 될 걸요. 숫자로만 따져도 국민 10명 중에 한 명은 장애인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길 가다가 10명 중에 한 명꼴로 장애인을 만날 수 있나요? 없습니다. 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거죠. 같이 운동하는 우리 선수들 중에도 세상과 등지고 있다가 10년 만에 나온 경우도 있어요. 어느 순간 닥친 이 장애로 인생을 포기하려 했다가 세상에 나온 이들입니다. 이런 사례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저도 이런 분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제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한민수는 패럴림픽 기간 동안 우리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전해졌으면 한다. 다리 한 쪽이 없어도 밧줄에 의지해 정상에 선 한민수처럼 많은 이들이 시련을 딛고 일어섰으면 한다. 한민수는 긴 시간 인터뷰를 마친 뒤 웃으며 말했다. “아마 이 꿈을 이루지 못했다면 이렇게 우는 것도 사치였을 겁니다. 울보라고 놀리지 말아주세요.”

(한민수 선수를 강연자로 모셔 희망의 이야기를 공유하고픈 분들이 있다면 아래 이메일 주소로 문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한민수 선수와 연결해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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