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여성민우회

[스포츠니어스 | 홍인택 기자] 검찰 내 성추행 폭로로 한국판 '미투 운동'이 사회문제로 인식되면서 체육계에도 미투 운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폭로가 사회 전체의 문제로 번지고 있다. 여성들은 "나도 피해자였다"라며 고백하고 있다. 직장인 앱 '블라인드'에서는 연일 피해 경험을 토로하는 글이 쏟아지고 있다.

'미투(#metoo)'는 미국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 추문 사건에 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트위터에 해시태그를 달기 시작해 알려진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이다. 흑인이자 여성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10년 전부터 뉴욕 할렘 커뮤니티에서 최초로 같은 의미의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국내 미투 운동도 검찰 내 성추행 폭로로 번진 듯 보였으나 여성인권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그 이전부터 있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인권활동가 A씨는 <스포츠니어스>와의 통화에서 "2015년부터 문단 내 성폭력, 미술계 성폭력 등으로 트위터 내에서 번진 고발 캠페인이 있었다"라고 전했으며 인권침해예방활동연구소 김희진 대표는 "2003년부터 성폭력 피해자들의 '생존자 말하기 대회'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사회로 번진 '미투' 운동 ⓒ Pixabay

체육계 성폭력, 드러난 민낯들

체육계도 예전부터 성추문 사건은 꾸준히 있었다.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체육선수 성폭력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5년까지 한 해 평균 41건의 체육선수 성폭력 사건이 스포츠 인권센터에 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체육계에도 미투 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체육계에 만연하는 성폭력 실태조사의 시작점이 된 사건은 2007년 우리은행 한새여자프로농구팀을 이끌던 박명수 감독의 성추행 혐의가 보도된 사건이다. 2007년 해외 전지훈련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박 감독은 소속팀 선수 B씨를 호텔 방으로 불러 반나체 상태로 침대에 누워 B씨에게 옷을 벗으라고 한 뒤 "내 배에 올라와라"라고 말하며 성추행을 시도했다.

2013년에는 역도 국가대표 장미란을 지도한 오승우 감독이 제자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훈련 중 자세 교정을 빌미로 마사지를 제의하며 신체를 더듬은 행위를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재판부는 그에게 무혐의를 선고했지만 당시 사건을 맡았던 전문가들은 재판부 결정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오 감독은 피해 선수에게 "내가 너 마사지해줘서 되게 좋았지?"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피해자 어머니는 재판부의 무혐의 판결에 낙심하며 항소를 포기했다.

동년 11월에는 WK리그 간판스타이자 국가대표 선수 박은선의 성별 논란이 제기됐다. 서울시청을 제외한 6개 구단 감독들은 비공식 간담회에서 박은선의 성별에 의혹을 제기했다. 그들은 박은선의 출전 여부를 판정해주지 않으면 2014년도 시즌 출전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WK리그에 보내기도 했다. 박은선은 당시 SNS를 통해 "성별검사를 월드컵과 올림픽 때도 받으며 경기에 출전했다. 그때도 어린 나이에 수치심을 느꼈는데 지금은 말할 수도 없다"라고 밝히며 심경을 토로했다.

2014년에는 한국 여자 컬링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경기도청에 모두 사표를 제출한 사건이 있었다. 사직 이유 중에는 코치진의 성추행도 포함됐다. 선수들은 최 모 코치가 자신들을 3~4시간씩 세워놓고 욕설을 했으며 선수들의 손을 잡고 "내가 손을 잡아주니까 좋지"라는 등의 성추행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최 코치는 "성추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선수들이 그렇게 느꼈다면 사과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기도체육회는 최 코치를 해임했다.

작년 10월에는 테니스 선수 출신으로 현재 지도자 과정을 밟고 있는 김은희 씨의 용기 있는 고발로 테니스 김모 코치의 만행이 세상에 드러나기도 했다. 김은희 씨는 10세 때 김 코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김 코치는 당시 김은희 씨를 따로 불러 테니스장 라커룸, 관사 등에서 "죽을 때까지 너랑 나만 아는 거다. 말하면 보복할 거다"라고 협박하며 성폭행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김은희 씨는 이게 '성폭행'이라는 사실 자체도 인지하지 못했다. 오로지 김은희 씨 혼자만의 노력으로 당시 사건을 저질렀던 김 코치의 징역 10년 형을 받아냈다. 현재 김 코치 성폭행 재판은 항소심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다.

체육계 성폭행 피해 대상은 선수들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7월 중순 천안시체육회 소속 직원 8명은 천안시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진정서에는 당시 체육회 C상임부회장과 D사무국장이 지난해 1월 부임한 후 7월 초까지 6개월간 부하 여직원들을 상대로 저지른 10여 회 성추행 사례가 담겨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천안시 체육회는 해당 진정서를 공식 접수했으나 조사, 고발 처리하지 않고 가해자 2명의 사표를 수리하는 선에서 사태를 종결한 것으로 알려져 사건 은폐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스포츠를 즐기는 여성 팬들도 수시로 위험에 노출됐다. <스포츠니어스>는 지난해 1월 축구장 내 여성차별 사례를 보도했다. 여성 팬들을 대상으로 한 남성 팬들의 플러팅, 외국인 선수가 저녁 시간에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시도했다는 제보도 있었다. 2016년에는 'K리그녀'라는 제목으로 팬들의 신체 일부를 찍은 불법 촬영 사진이 온라인에 유포되기도 했다.

사회로 번진 '미투' 운동 ⓒ Pixabay

"감춰진 사건이 더 많을 것이다"

2007년 우리은행 농구팀 사건을 기점으로 여성 선수 권익실태 조사가 시작됐다. 직장운동부 내 성폭력 경험을 조사한 결과(2007, 당시 문화관광부) 전체 323명의 모집단 중 16.1%(52명)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행위별 피해 실태로는 '신체 부위 등 외모에 대한 성적인 비유나 평가'(9.9%), '불쾌감을 주는 성적 농담'(7.1%)과 '가슴이나 다리, 엉덩이 등 신체 부위를 주시하는 행위'(6.2%) 등 언어적, 시각적 유형의 성희롱이 다수를 차지했다.

놀라웠던 점은 피해 경험 연령대의 비율이었다. 성인 선수에 비해 청소년 선수들의 피해 경험률이 높았다. 30대 이상 피해 경험은 9.8%, 25세~29세 10%였으나 20~24세 19.2%, 10대 28%로 나이가 어릴수록 피해 경험률이 증가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주종미 호서대 교수가 서울시 고등학교 운동부 선수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성폭행 피해 실태조사에는 전체 422명의 선수 중 34.4%(145명)가 다양한 형태의 성희롱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체 부위 등 외모에 대한 모욕적인 성희롱이 주를 이뤘다. 학생운동부에서부터 수차례 피해에 노출된 선수들은 프로팀이나 실업팀의 선수로 뛰는 성인이 되면서 성폭력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체육회는 2010년부터 2년 주기로 선수, 지도자, 학부모 등 1350명을 대상으로 성폭력 실태조사에 들어갔는데 2010년 당시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대답한 비율은 26.4%였다. 2012년 9.4%, 2014년 12.5%, 2016년 3.6% 등 대체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율로만 따지면 다른 분야보다 적게 느껴질 수 있는 결과다. 다만 전문가들은 "간과할 수 없는 수치"라고 말하면서 통계의 허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김희진 대표는 "실태조사 과정은 상담가 혹은 연구자와 조사대상 간의 신뢰감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전하면서 "지식적 접근이 부족하면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감출 수 있는 위험이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어차피 얘기해도 해결되지 않을 텐데'라는 정서도 무시할 수 없다"라며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라고 전했다. 2007년부터 체육계 성폭력 행태를 꾸준히 연구해왔던 경인여대 허현미 교수도 이에 동의했다. 허 교수는 실제 피해보다 수치가 더 적게 나올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조사 기관, 대상, 피해 유형에 따라 수치가 다르게 나올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문화관광부 실태조사(2007)에 따르면 체육계 성폭력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 이유로 신체접촉이 잦은 운동부 특성상 성폭력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47.4%)이 가장 큰 이유로 드러났다. 스승이나 다름없는 감독, 코치에 대해 선수 입장에서 적극적인 대응이 어렵기 때문에(42.1%), 보수 및 경기 출전 등 전권을 지닌 감독, 코치 등에 대해 선수의 저항이 어렵다(38.1%)는 이유가 뒤를 이었다. 또한 운동부 내 성폭력 문제가 불거질 경우 소속팀의 이미지가 훼손될 것을 염려(22.0%)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회로 번진 '미투' 운동 ⓒ Pixabay

성폭력 문화 만연한 사회, 체육계도 예외 아니다

<스포츠니어스> 취재 결과 여성 체육인으로 구성된 '100인의 여성체육회'가 테니스 성폭행 피해자 김은희 씨를 중심으로 체육계 미투 운동을 지지하려는 움직임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단체 측은 "체육계 미투 운동을 지지하기 위한 신고센터를 마련하자는 제안이 있어 준비 중이다. 김은희 씨 사례를 계기로 조직적으로 지원하고 끝까지 함께하기로 했다"라면서 "단체 사무국이 창구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단체 측은 "현재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어 본격적인 지지 활동 발표 시기에 대해 고민 중"이라며 "내부적으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미투 운동의 의미가 성폭력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문화를 근절하고 이와 같은 현실이 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알리는 데 있다고 짚었다. 허현미 교수는 미투 운동의 의미에 대해 "피해 여성들이 피해 사실을 알려도 되겠다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지금까지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에 대해 자신의 탓으로 돌리거나 주변의 2차 피해로 이어지는 경험을 했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서지현 검사는 피해 당시 "자신의 잘못인가라고 생각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작년 말 한샘 성폭행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에도 피해자를 '꽃뱀' 프레임으로 가둔 일도 있었다.

A씨는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런 엄청난 사건이 있었구나'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성폭력은 문화로 자리 잡혀 있다"라면서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이야기하거나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일들이 더 어려웠었다"라며 현실을 꼬집었다.

이어 "미투 운동의 핵심은 이런 문화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알려줬다는 점이다. 피해자가 고발하는 사건이 있더라도 일시적, 개별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특별히 행실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겪는 게 아니라 문화 자체가 만연해 있고 이때까지 모두가 침묵하고 용인했기 때문에 벌어졌던 일이라고 알게 되는 것이다"라고 전하며 "핵심은 각 사람의 피해 수위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까지 많이 있었던 거야? 이렇게 까지 사회에 만연했던 거야? 그런데 왜 몰랐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피해를 당할 동안 우리는 모를 수 있었지?'라는 부분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라고 분석했다.

서지현 검사는 "범죄 피해자들에게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라며 울먹였다. 여성단체들도 서지현 검사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움직이고 있다. 체육계에 만연한 성폭행 문화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 체육계 여성들은 오늘도 '우연히' 살아 남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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