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월드컵 3회 연속 출전, 안양 김대욱의 새로운 도전

안양 김대욱

[스포츠니어스|서귀포=조성룡 기자] 참 독특한 이력을 가진 선수가 있다.

세계 최고 권위의 프로축구 대회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FIFA 클럽 월드컵이다. 각 대륙 챔피언들이 모여 세계 최고를 가리는 대회다. 이런 대회에 3회 연속으로 출전한 한국인 선수가 있다. 클럽 월드컵 출전 횟수만 따지면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올 시즌 FC안양에 입단한 김대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김대욱의 커리어 그 이면에는 수많은 노력과 눈물이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은퇴를 고민했던 이름값 없는 선수였다. 그리고 홀연히 뉴질랜드로 사라졌다 다시 우리 앞에 등장했다. 그동안 그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스포츠니어스>가 안양의 전지훈련장인 제주도를 찾아 김대욱을 만났다. 그의 구구절절한 인생 이야기를 지금부터 소개하려고 한다.

보이지 않는 미래, 돌파구 마련하기 위한 뉴질랜드행
선수 김대욱은 자신의 표현처럼 ‘특출난 선수’가 아니었다.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2010 시즌 K리그 드래프트에 신청했지만 지명을 받지 못했다. 그렇게 프로 입성에 실패할 것처럼 보였지만 대전시티즌에 번외 지명으로 입단하며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1군 무대에서 단 두 경기를 뛰었다. 지금까지 김대욱이 가지고 있는 K리그 1군 경력의 전부다.

이후 그는 경찰청 축구단에 입단해 군 복무를 해결했지만 상황은 첩첩산중이었다. 제대 이후 대전시티즌은 그를 방출했다. 새로운 행선지였던 내셔널리그 한국수력원자력(現 경주한수원)과의 인연도 고작 1년이었다. “당시 상황이 굉장히 좋지 않았어요. 현실적으로 저는 특출난 선수가 아니었거든요.” 그는 치열하게 자신의 미래를 고민했다. 그리고 한국에 계속 남아 있는다면 자신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제가 꿈꿔오던 축구선수의 모습이 제 생각과 많이 달랐어요. 고민을 많이 했죠. 과연 내가 여기 있으면서 더 상장할 수 있을까? 만일 축구화를 벗더라도 무언가 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 계속 한국에 있는다고 생각해보니 어떻게 될지 너무 뻔해 보였어요.” 그는 한국 대신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은 뉴질랜드였다.

ⓒ 오클랜드 시티 공식 페이스북

단순히 축구 만을 위해 뉴질랜드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뉴질랜드는 프로축구 리그가 없다. 세미 프로 리그다. “제 인생에서 뉴질랜드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만일 제가 운동을 관두더라도 그곳에서는 다른 것을 배울 수도 있고 다른 세상을 보면서 시야도 넓어질 것이라 생각했어요. 제 미래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드니 결정이 쉽지 않았지만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내인 당시 여자친구가 어릴 적 뉴질랜드에 살았던 것도 그에게 도움이 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축구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축구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뉴질랜드 축구의 정보를 찾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 때 구원의 손길이 등장했다. 축구를 좋아하는 한 교민이 그를 도운 것이다. “축구를 하셨던 분도 아니고 그냥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이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오클랜드 시티의 테스트에 참가할 수 있게 주선해 주셨어요. 반신반의하면서 봤는데 마침 감독님도 저를 원했고 상황도 제가 오클랜드에 뛸 수 있게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어요. 정말 운이 좋게 입단한 셈이죠.” 결국 김대욱은 뉴질랜드로 향했다.

무작정 떠났지만 쉽지 않았던 외국 생활
뉴질랜드에서 김대욱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단순히 축구에 대한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많은 것이 달라져야 했다. “당시에는 영어도 잘 못했어요. 안녕 정도만 아는 수준이었어요.” 뉴질랜드는 이민자들의 나라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민자에게 관대한 나라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속에 녹아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한국 문화를 다 버리려고 노력했어요. 그렇지 않고서는 제가 살아남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뉴질랜드에서 친구들도 한국 친구는 사귀지 않았어요.”

오클랜드 시티에 입단했지만 냉정하게 이 팀은 세미 프로팀이다. 축구로 생계가 완전하게 보장되지 못하는 곳이다. 대신 구단은 김대욱을 위해 일자리를 알선했다. 축구 코치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자리를 줬어요. 생계에도 도움이 됐지만 구단이 사회로 녹아 들어가 어린이들에게 희망도 주고 축구가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구단이 하는 사회 공헌 사업을 뉴질랜드에서 배운 셈이죠.”

하지만 이 팀은 오세아니아의 최강이기도 했다. 2011년부터 2017년까지 7회 연속 오세아니아 대표로 FIFA 클럽 월드컵에 나간 팀이다. 통산 9회로 클럽 월드컵 최다 출전 팀이라는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팀 자체가 ‘위닝 DNA’라는 것을 굉장히 강조해요. 매 경기를 이겨야 클럽 관계자들도, 팬들도 즐겁다는 것이죠. 그래서 연습 경기 하나도 반드시 이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요. 그러다보니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것 같아요.”

김대욱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남은 시간을 모두 축구에 투자했다. 학교에서 일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고, 급여도 비교적 적다. 게다가 팀은 세미 프로니 남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더 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대욱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축구에 매진했다. “저도 그랬지만 오클랜드의 분위기는 ‘축구가 먼저다’였어요. 다들 하는 일이 끝나야 훈련을 하지만 우리의 우선순위는 축구였어요. 그게 팀이 잘나가는 비결일 수도 있겠네요.”

오클랜드는 김대욱과 같이 사연 많은 선수들로 가득했다.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자 먼 오세아니아의 나라로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세미 프로라길래 오클랜드라는 팀을 쉽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들 실력이 결코 나쁘지 않았어요. 초반에는 적응하기도 어려웠고 힘들었습니다.” 유럽과 남미, 아시아에서 온 선수들의 절박함은 오클랜드의 치열한 내부 경쟁으로 이어졌고 이는 오클랜드가 뉴질랜드를 넘어 오세아니아의 최강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 오클랜드 시티 공식 페이스북

생계도 팍팍했고 팀에서의 적응도 쉽지 않았던 김대욱은 또다른 것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인종차별이었다. “뉴질랜드가 이민자의 나라라지만 그곳도 어떻게 보면 백인의 나라죠.” 그라운드에 들어서면 “중국인이 왜 여기서 공을 차냐”는 비아냥과 함께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기 부지기수였다. 이는 그라운드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건을 사고 지폐를 내밀면 거스름돈을 몽땅 동전으로 주기도 했다. “정말 사소한 부분에서도 인종차별이 있었습니다. 불쾌했어요. 하지만 당할 수 밖에 없었죠.” 김대욱은 인내하며 뉴질랜드에 녹아들었다.

잊을 수 없었던 클럽 월드컵에서의 한 방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클랜드는 오세아니아 축구의 최강자였다. 그리고 김대욱은 그 팀의 일원이었다. 덕분에 그는 누구도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클럽 월드컵을 누구보다 많이 출전한 한국인이 됐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회 연속으로 클럽 월드컵에 출전했다. “사실 2014년 모로코 대회 때도 나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대회 전에 두바이에서 연습 경기를 하다가 부상을 당했죠. 그래서 그 대회는 한 경기도 뛰지 못했어요.”

2014년 클럽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다는 것은 김대욱에게 큰 아쉬움일 것이다. 당시 오클랜드는 클럽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플레이오프에서 모그레브 테투안(모로코, 개최국 대표)을 승부차기 끝에 꺾고 준준결승전에서 ES 세티프(알제리, 아프리카 대표)를 꺾고 4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준결승전에서 산 로렌소(아르헨티나, 남미 대표)와 연장전 혈투 끝에 1-2로 패했지만 이어진 3-4위전에서 크루스 아술(멕시코, 북미 대표)을 승부차기로 꺾으며 3위를 차지했다. 세미 프로팀이 만들어낸 이변이었다.

그는 부상으로 인해 관중석에서 이를 지켜봐야 했다. 그래도 그는 많은 것을 느꼈다. “가는 것 자체로 큰 경험이었어요.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 모인 곳이잖아요. 그리고 FIFA가 주관하는 대회이기도 하잖아요. 대회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행정적인 부분이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 지, 그리고 세계적인 선수들의 생활 습관이나 훈련하는 모습 등 정말 제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1년 뒤 그는 실제로 클럽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김대욱의 첫 클럽 월드컵 상대는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였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렸다. 이 경기도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확실히 일본 선수들이 잘했어요. 그런데 공 점유율은 오클랜드가 더 높았어요. 오클랜드는 항상 높은 점유율을 추구하는 축구를 하거든요. 일단 우리의 축구는 한 셈이죠. 해볼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작은 차이가 승패를 가르더라구요. 그 차이가 뭔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 작은 차이가 결과에서 굉장히 큰 차이를 만들더라구요.”

1년 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갔다. 클럽 월드컵이라는 대회도 요코하마라는 장소도 1년 전과 똑같았다. 달라진 것은 상대팀이었다. 이번에는 히로시마 대신 가시마 앤틀러스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과거의 아쉬움을 씻기 위해 오클랜드는 열심히 뛰었다. 전반전을 0-0으로 마치고 후반 5분, 오클랜드는 프리킥 찬스를 잡았다. 우측 측면에서 키커 에밀리아노가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렸다. 이를 누군가 빠르게 쇄도하며 헤더로 꽂아 넣었다. 그 주인공은 김대욱이었다.


▲ 김대욱이 득점했던 클럽 월드컵 가시마전 하이라이트

김대욱은 아직도 이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원래는 약속된 플레이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상대 수비의 형태가 약속된 상황과는 달랐어요.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플레이를 하지 못했어요. 무작정 쇄도했는데 제게 공이 잘 왔죠. 헤더로 넣었어요. 사실 자신은 있었어요. 3~4년 정도 함께 뛰던 동료들이라 이런 상황에서 공이 어디로 올 지 대강 알고 있었고 비슷한 상황에서 골도 넣어봤거든요.”

비록 경기는 아쉽게 1-2로 패했지만 K리그에서도 제대로 뛰지 못하던 김대욱이 세계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김대욱은 오클랜드에서 그렇게 자리를 잡았다. 점차 그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뉴질랜드의 생활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물론 아시안이기 때문에 팬이 많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래도 믿고 쓰는 한국 선수’ 정도의 인정은 받았던 것 같아요.”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씩 웃었다.

한국에서의 러브콜, 김대욱을 처음으로 되돌리다
몇 년 동안의 생활로 김대욱은 한국보다 뉴질랜드가 더 편하게 느껴졌다. 그의 두 자녀는 한국이 아닌 뉴질랜드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뉴질랜드는 그들에게 고국이었다. 김대욱도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해졌다. 주변의 사람들도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살기 좋은 나라 뉴질랜드에서 그의 험난했던 축구 인생이 안정적으로 변해갔다. “뉴질랜드가 살기는 좋아요. 특히 아이들과 여자들을 위한 제도가 잘 갖춰져 있어요. 가족을 꾸리기 좋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잔잔해진 물가에 누군가 작은 돌을 던진 것이다. 그 누군가는 바로 FC안양의 고정운 감독이었다. 2018 K리그2(챌린지) 시즌을 앞두고 팀을 개편하던 고 감독은 김대욱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김대욱은 과거 뉴질랜드로 향했을 때처럼 다시 한 번 치열하게 고민했다. “과연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안정적인 삶이 좋은 것일까?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또다른 도전에 나서는 것이 좋을까?”

사실 그는 뉴질랜드에 뛰면서 귀화에 대해 몇 차례 고민하기도 했다. “영주권이 있는 상황에서 귀화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만일 귀화를 했다면 뉴질랜드 대표팀도 도전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한국 국적을 포기하기 싫었어요. 그리고 오세아니아와 아시아의 축구는 또 엄연한 차이가 있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축구인의 삶을 살려면 오세아니아 여권보다는 아시아 여권이 낫겠죠. 그리고 사실 귀화해서 뉴질랜드 대표팀에 가더라도 나이가 많아서 얼마 못 뛸 거 같았어요.”

그가 내린 선택의 기준은 축구였다. 더 좋은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그리고 축구선수라면 가지고 있는 더 나은 곳을 향한 꿈이 있기 때문에 그는 결단을 내렸다. 뉴질랜드의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어떤 것이 제게 더 도움이 될 지 고민했어요. 고 감독님과 안양이 기회를 준 상황에서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 도전해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아내 또한 그의 결정에 흔쾌히 지지를 보냈다.

ⓒ FC안양 제공

오클랜드는 함께 동고동락했던 선수가 떠난다는 것에 아쉬움을 드러내면서도 그의 프로 입성에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은밀한 청탁 아닌 청탁도 있었다. 특히 스페인 출신 선수들이 김대욱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혹시 안양에 외국인 선수 자리가 있으면 추천좀 부탁해.” 한 번은 오클랜드 감독이 지나가는 말로 그에게 한 마디 툭 던지기도 했다. “나중에 안양 감독직 비면 꼭 알려줘.” 프로에 입성하는 김대욱에게 부러움 섞인 농담을 던진 셈이다. 그렇게 20대 중반에 뉴질랜드로 무모한 도전을 떠났던 한 청년은 이제 30대가 되어 가족들을 이끌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안양이 중하위권? 그것도 작년까지 얘기”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은 결코 쉽지 않았다. 어느새 김대욱은 뉴질랜드 문화에 익숙해진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분명 저는 한국인인데 한국 문화 적응에 쉽지 않더라구요. 처음 안양에 왔을 때는 말도 잘 안나왔어요. 한국어로 말하다가 갑자기 단어가 기억 안날 때도 있고 저도 모르게 영어가 입에서 튀어나올 때도 있었어요. 뉴질랜드에서 빨리 적응하려고 생각도 영어로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특히 선후배 문화 같은 건 뉴질랜드에 없었으니 후배들의 인사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김대욱의 첫 번째 목표는 안양에 빨리 녹아드는 것이다. 그가 뉴질랜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현재 그는 제주도의 안양 전지훈련장에서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가 안양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팀에 도움이 될 만한 경기력을 갖추는 것이 제일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고 있어요. 많이 힘들긴 한데 좋은 것 같아요. 재밌기도 합니다.”

그는 안양과 함께 할 올 시즌을 기대하고 있다. 중위권 또는 그 이하로 평가하는 세간의 시선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대답한다. “안양이 중하위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지난 시즌 순위는 그랬죠. 하지만 그것은 작년까지의 일입니다. 과거라는 것이죠. 올해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몰라요. 안양이 올 시즌 K리그2를 놀라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들이 열심히 해야겠죠.”

한 무명 선수가 홀연히 뉴질랜드로 떠났다. 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 성공을 이뤘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한 가정의 가장이라면 안정적인 삶을 추구할 법도 하지만 김대욱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도전을 과감히 선택했다. 그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고 아직도 축구선수로 살 때 가장 가슴이 뛰기 때문이리라. 김대욱의 스토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018 K리그2에서 그의 또다른 스토리가 시작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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