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창수는 10년째 한국에서 도전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서귀포=김현회 기자] 한 선수가 있다. 도움 받을 길 없는 재일교포 3세는 오로지 축구를 계속 하고싶다는 일념으로 생전 와본 적 없는 한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이었고 도움 받을 곳 하나 없었다. 그에게 모든 것은 낯설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곳은 열악하기로 유명한 K3리그였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아주 조금씩 성장해 마침내 프로 무대에 있다. K리그 챌린지 부천FC1995 진창수에 관한 이야기다. 2008년 낯선 땅에 홀로 섰던 진창수는 이제 어느덧 부천FC의 최고참으로서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수 많은 좌절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진창수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한다. 제주 서귀포에서 진창수를 직접 만났다.

재일교포에게 축구라는 의미는?

진창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시절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할머니는 제주도에서 물질을 하던 해녀였다. 일본에 가서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해 고향인 제주도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냈다. 진창수 말에 따르면 당시 “제주도가 너무 못 사는 동네여서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돈을 벌어 보내야 했다”고 했다. 억압과 핍박을 받아오던 그 시절 진창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시대의 풍파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고향 땅인 제주로 돌아오길 바랐지만 다른 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1970년대 당시 정부에서는 재일교포의 귀환에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허가를 받을 수 없어 일본에서 제주도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렇게 진창수도 1985년 재일교포 3세로 일본에서 태어났다.

진창수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했다. 재일교포들에게 축구는 해방구였다. 억압 받는 남의 나라에서 축구는 유일하게 일본인을 앞섰기 때문에 재일교포들에게 축구는 자부심 그 자체였다. 진창수도 재일교포 축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요즘은 일본 축구가 대세라고는 하지만 과거에는 재일교포들이 일본 사람들에게 축구도 가르쳐 주고 그랬어요. 지금은 요코하마 F마리노스가 된 닛산 축구단도 프로화 되기 전에는 우리 교포들이 하는 재일조선축구단이 한 수 가르쳐 줬죠. 도쿄 베르디 아시죠? 그 팀도 재일교포 팀하고 붙어 축구를 배워갔습니다.” 재일교포들에게 축구는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존재였다. 진창수도 어린 시절부터 다른 재일교포들과 마찬가지로 축구에 푹 빠져 살았다.

진창수는 일본인 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민족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부모님은 진창수가 비록 일본에서 태어났어도 한국인인 걸 잊으면 안 된다면서 가까운 일본인 학교 대신 먼 민족학교로 보냈다. “집 바로 앞에 일본인 학교가 있었는데 저는 그 학교에 가지 않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민족학교에 갔습니다. 일본인 학생들은 편한 옷을 입고 다닐 때 우리는 늘 교복을 입었어요. 그때는 많이 불편했죠. 그런데 민족학교에 다니면서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게 됐어요.” 도쿄조선초등학교를 졸업한 진창수는 지금도 재일교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어를 또렷하게 구사한다. 이때 일본인 학교를 선택하지 않고 우리 문화와 역사,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민족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진창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23살 때까지 한국에 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진창수 제공

차별 이겨내고 성장한 진창수

진창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일본은 학원 축구 위주인 우리와 다르게 당시에도 클럽 축구 위주로 운영되고 있었다. 진창수는 민족학교를 다니면서 클럽 축구에서도 타고난 운동 신경을 앞세워 좋은 활약을 펼쳤다. “운동 신경이 일본 친구들보다는 좋았어요.” 그와 함께 같은 팀에서 펄펄 날던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이충성(리 타다나리)이다. 이 재일교포 두 명은 일본인들이 뛰는 축구 클럽에서 군계일학의 실력을 보여줬다. “둘이 경기에 나가면 재미있게 잘했죠. 그때는 둘 다 잘했거든요.” 진창수는 도쿄조선초등학교 졸업 이후 도쿄조선중학교와 도쿄조선고등학교를 거쳤다. 그러면서도 또래 선수 중 돋보이는 기량을 선보였다. 당시 재일교포 선배인 안영학에게도 축구에 대해 많이 배웠다.

하지만 재일교포를 향한 차별은 심했다. 어린 나이에 친구들은 일본식 이름이 아닌 진창수의 이름을 놀렸다. ‘간꼬꾸진’ ‘조센진’이라면서 진창수에게 시비를 걸었다. “축구를 하면서 일본 친구들한테 무시를 당하면 싸우기도 했어요. 일본 축구 클럽에 다니면서 재일교포라는 걸 숨길 수도 있었거든요. 일본식 가명을 쓰고 학교에 다니는 재일교포도 있었어요. 교포들 사이에서는 ‘일본 연예인 중 누가 재일교포인데 숨기고 있다’는 소문도 많이 돌았죠. 그 정도로 일본인들 사이에서 재일교포는 차별적인 존재였고 당당히 내가 재일교포라고 말하는 게 어려운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진창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당당히 자신이 누구인지를 친구들에게 밝혔다. 이렇게 일본인 친구들과 싸우면서 친해지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이충성은 실력을 인정 받아 FC도쿄 유소년 팀에 입단했고 진창수는 아르헨티나로 스카우트됐다. 아르헨티나에서 1년을 생활한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축구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일본 축구계에서 일본인 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민족학교 출신으로 도전한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민족학교 출신은 곧바로 일본 대학 진학을 할 수가 없었다. 일본 정부에서 민족학교를 정규 교육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1년 동안 방송 통신 교육을 받아야 고졸 학력을 인정해줬다. 일본 내에서의 학력이 고졸이 아니니 어디 회사에 취업을 하기에도 쉽지 않았다. 더 문제인 건 축구를 계속하고 싶은 진창수가 일본에서 뛰려면 외국인 쿼터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시에는 아시아 쿼터제도 없었다.

진창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23살 때까지 한국에 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진창수 제공

귀화 제안, 단번에 거절한 이유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진창수가 일본 무대에서 월등한 힘과 신체조건, 기술을 가진 다른 외국인 선수들과 경쟁하는 건 무리였다. 팀마다 외국인 선수는 즉시전력감을 뽑았다. 진창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돈을 내고 임하는 테스트만 해도 10번이나 넘게 응시했지만 다 떨어졌다. J리그는 물론 J2리그와 JFL(일본실업축구) 문을 두드려 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학교에 갈까도 생각했지만 그럼 1년 동안 방송 통신 교육을 받아야하고 그렇지 않으려면 조선인 대학교에만 갈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저는 축구를 더 하고 싶었지 대학교 진학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진창수는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동안 선수 경력이 전혀 없었다. “파친코 업계는 재일교포가 하는 회사가 많아요. 1년 동안 밤1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업장에 파친코 기계 설치해 주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한 번에 20대씩 설치하고 그랬죠.”

진창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모님을 도왔다. 개인 운동을 하고 불고기 전문점을 하는 부모님 식당에서 서빙도 하고 불판도 닦았다. 일본 아마추어 팀을 찾아가 함께 운동했고 고등학교 팀도 그가 운동을 할 수만 있다면 찾아갔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낸 뒤 2005년 다시 입단 테스트에 도전했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J2리그 도쿠시마 보르티스 입단에 성공한 것이었다. 1년 동안 팀도 없이 힘든 시기를 보냈던 진창수는 너무 기쁜 마음에 도쿠시마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에게 기회는 없었다. 외국인 쿼터 한 자리만 잡아 먹는 진창수가 뛸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일본인으로 귀화하는 것이었다. 구단에서도 진지하게 진창수에게 일본 귀화를 권했다. 그러면 일본 선수들과 경쟁해 조금은 경기 출장이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창수는 단 번에 귀화 제의를 거절했다. “귀화는 안 합니다. 다른 팀을 알아보겠습니다.” 그에게 일본인으로의 귀화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귀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겪어왔던 힘든 일을 다 기억합니다. 일본 철도와 국회의사당, 도로도 다 우리 교포들이 피와 땀을 흘려 만들었어요. 일본에서 힘든 일은 다 우리 교포들 몫이었죠. 이렇게 우리 민족이 당한 역사가 있는데 제가 일본인이 되는 건 그런 우리 민족을 배신하는 일입니다.” 진창수는 귀화 제의를 뿌리치고 팀을 나와 다른 팀을 알아봤다. 하지만 좋은 조건에 구할 수 있는 팀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실업팀에서 그에게 입단 제안을 했다. 택배 회사가 운영하는 사가와 익스프레스라는 팀이었다. 진창수는 2006년 이 팀에 입단했다.

차별과 부상, 그리고 어머니의 투병

아침 7시부터 물건을 나르고 12시에 점심을 먹을 때까지는 꼬박 일만 했다. 그리고 오후 3시부터 운동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진창수도 열심히 물건을 날랐다. 하지만 이 팀은 보통의 실업팀이 아니라 실업 무대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하는 강팀이었다. 워낙 실력 좋은 선수가 많아 경기에 나서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게 이 팀에서 2년 동안 경기 출장을 노리는 백업 멤버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 무렵 안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에서 북한의 소행으로 보이는 일본인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는 게 연일 뉴스에 터졌다. 진창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었지만 일본인들은 재일교포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고 있었다. 재일교포가 일본에서 살려면 감당해야 할 ‘핸디캡’이었다.

“조총련 계열을 북한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데 우리는 그런 걸 다 떠나서 남과 북이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일본에서 차별을 받으면서도 살아가려면 같은 민족끼리 도와야 하거든요. 우리에게 남과 북은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데 북한 소행으로 보이는 일본인 납치 사건이 터지면서 재일교포 전체를 좋지 않게 바라보는 시각이 늘어났어요. 온전히 축구로만 경쟁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제가 경쟁자들에 비해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야만 경기에 나갈 수 있었는데 제 실력도 많이 부족했습니다.” 진창수는 결국 팀을 나와 또 다시 새로운 팀을 찾아야 했다. “또 해보고 싶어서 포기하지 않고 도전했어요. 그런데 잘 되지 않더라고요.”

그는 이 무렵 또 한 번 좌절을 겪었다. 오른쪽 무릎 반월판이 찢어지는 큰 부상을 당해 6개월 동안 운동을 할 수 없다는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된 것이었다. 팀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 수술과 재활을 진행해야 했다. 그러던 중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됐다. 어머니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소식이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이렇게 한꺼번에 찾아왔다. 하지만 진창수는 무릎 수술을 받은 다음 날부터 아버지 혼자 지키는 식당으로 출근해 일을 도왔다. 아픈 무릎을 이끌며 서빙을 하고 불판을 씻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머니가 암 투병에 들어간 상황에서 아버지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무릎 수술을 한 진창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창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적 신분으로 팀을 구할 때의 생활로 다시 돌아갔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시간을 쪼개 운동을 했다.

진창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23살 때까지 한국에 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진창수 제공

생애 처음 밟은 한국 땅, 그렇게 시작된 도전

그러던 중 재일교포들이 운영하는 FC코리아에 들어가 운동을 시작했다. 우리로 치면 5부리그격인 팀이었다. 3개월 정도 FC코리아에서 몸을 만들고 있는데 재일교포 사회에서 알게 된 형이 진창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너 축구 좀 했었다며? 이번에 한국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대회에 나갈 건데 너도 같이 가자.” 진창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이때까지 진창수는 23년 인생에 단 한 번도 한국에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만 민족 교육을 받고 한글과 한국 문화를 배웠을 뿐 그는 단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한국을 너무나도 알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던 차에 들어온 제안이라 곧바로 수락했다. 진창수는 2008년 아마추어 축구대회를 위해 부산 땅을 처음 밟았다.

처음 와 본 한국은 신기했다. “일본은 밤 12시만 되면 조용한데 부산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부산에서도 시골에 가 경기를 했는데 그래도 밤에도 되게 활기 넘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나라마다 냄새가 있잖아요. 한국 냄새를 그때 처음 맡아봤습니다. 신기했어요.” 진창수는 아마추어 대회에서 펄펄 날았다. 그래도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축구만 해왔고 J2리그까지 진출했던 선수였으니 공 좀 찬다는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경기력을 선보였다. 한 때 공 좀 찼던 ‘선출’ 정도인 줄 알고 처음 부산행을 제안했던 지인이 진창수의 실력을 보더니 깜짝 놀라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진창수는 이렇게 답했다. “집안 환경도 좋지 않아서 돈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많은 돈이 아니어도 되고 리그가 어디여도 상관은 없는데 돈을 받고 뛸 수 있는 팀이 있다면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 길로 한국 성인팀 몇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다. 하지만 물론 축구선수로서 이렇다 할 경력을 세우지 못한 진창수에게 주목한 국내 팀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딱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바로 K3리그 포천시민축구단이었다. 포천은 2008년 창단 첫 해 K3리그 16개 팀 중 14위에 오른 최약체였다. 하지만 진창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생애 처음 밟아본 한국 땅에서 축구선수의 꿈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포천에서 직접 부산으로 내려온 차승룡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계약을 마쳤다. 하지만 일본에 있는 부모님은 반대했다. “집안이 힘든 상황인데 가게 일을 돕거나 다른 직업을 구하길 바라셨어요. 재일교포 중에 축구를 했던 사람은 정말 많았는데 성공한 건 안영학 형과 정대세 형밖에 없었거든요. 그만큼 어려운 조건이었고 제가 축구가 아닌 다른 길을 가길 바라셨죠.”

진창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23살 때까지 한국에 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진창수 제공

K3리그 거쳐 내셔널리그 입성한 진창수

진창수는 한 번은 꼭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진창수는 2009년 K3리그 포천에 입단하며 한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천만 원을 들고 한국에 정착했다. 하지만 그에게 K3리그는 현실이었다. 이제 막 출범한 구단은 체계적이지 못했다. 일본어에 유창한 진창수는 중학교 숙소에서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면서 일본어도 지도했다. 그리고 저녁 때 훈련을 하러 가면 훈련에는 5~6명만이 나와 있을 때도 많았다. 진창수는 깜짝 놀랐다.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모든 게 다 아마추어적이었죠. 월급은 잘 안 나오고 훈련 수당도 한 달에 30만 원 정도 받았던 거 같아요. ‘당일치기’로 영광까지 가 김밥 한 줄 먹고 경기하고 다시 6시간 버스 타고 포천에 온 적도 있어요. 겨울에는 추운데도 온수가 나오지 않아서 찬물로 씻기도 했고요. 일본의 실업 축구 정도 환경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열악할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이후 포천은 점점 더 강해졌다. 이기는 경기가 많아지면서 수당도 늘었고 내셔널리그 등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배치 받은 선수들을 수혈했다. “포천시축구협회장님과 본부장님, 그리고 감독님 등 많은 분들이 고생하셨고 신경을 많이 써주셨죠. 팀이 팀 같아졌습니다.” 포천은 2009년 K3리그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진창수의 활약은 엄청났다. 2009년 시즌 무려 10골 19도움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특히나 도움왕 경쟁을 하던 마지막 라운드에서 믿을 수 없는 도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도움왕까지 올랐다. K3리그에서는 최고 수준의 기량이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여기저기 이력서를 많이 넣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K3리그에 대한 인식은 부족했다. “K3리그 인지도가 부족할 때였죠. K3리그? 포천? 그게 뭔데? 이런 반응도 많았습니다.”

진창수는 K3리그 챔피언에서 배출된 도움왕이라는 타이틀을 안고 내셔널리그 여러 팀을 알아봤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고양 국민은행과 대전한수원 등의 문을 두드렸지만 입단 테스트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강릉시청에서 그에게 입단 테스트를 제의했다. 하지만 진창수는 강릉시청 입단 테스트 도중 발목이 퉁퉁 붓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진창수는 박문영 감독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저 떨어지면 안 돼요. 꼭 해야 합니다.” 이런 간절함이 통했을까. 아니면 K3리그에서 보여준 실력을 믿은 것일까. 강릉시청은 그와 2년 계약을 맺었다. 물론 연봉은 내셔널리그 최저수준이었다. 진창수는 그렇게 2010년 강릉시청 유니폼을 입게 됐다.

한국 도전 6년, 마침내 프로에 서다

진창수에게는 그래도 성인이 된 후 제대로 된 팀에서 처음으로 연봉을 받으며 뛸 수 있는 기회였다. 간절하게 잡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내셔널리그 강릉시청에서 3년간 뛰며 68경기 출장 15골 7도움의 기록을 올렸다. 최저연봉 선수의 엄청난 활약이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구단 버스 운전하시는 분도 너무 잘해주셨고 서포터스가 ‘멀리서 와서 고생한다’며 밥도 사주고 그랬어요. 다들 가족처럼 챙겨주셨죠. 행복했어요.” 하지만 그에게는 프로로 가고 싶은 꿈이 있었다. 여러 좌절과 시련을 겪으며 계속 성장했지만 프로 무대의 벽을 깨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은토하기 전엔 꼭 한 번 프로 무대를 밟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2013년 K리그는 승강제를 도입하며 K리그 챌린지 출범을 공표했다. 내셔널리그 팀 중 프로화를 선언한 팀과 창단팀 등이 K리그 챌린지의 일원이 됐다. 당시 드래프트를 통해 K리그 챌린지 팀이 선수들을 우선적으로 뽑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진창수도 드래프트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러자 광주FC 쪽에서 직접 남기일 감독을 통해 영입 의사를 전했다. 진창수의 진가를 알아본 것이다. 고양 Hi FC 측에서도 진창수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지금은 서울이랜드 감독이 된 당시 고양 Hi FC 인창수 코치가 이영무 감독에게 진창수를 적극 추천한 것이었다. 드래프트 바로 전 날 고양 Hi FC에서도 연락이 왔다. 진창수를 뽑고 싶다는 것이었다.

진창수는 어느 팀이건 자신을 원하는 프로팀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두 구단에서 저를 뽑고 싶다고 하니 좋았어요.” 결국 진창수는 드래프트에서 고양 Hi FC의 선택을 받아 그토록 그리던 프로 무대에 입성하게 됐다. 2008년 한국에 처음 와 K3리그와 내셔널리그를 거쳐 6년 만에 이룬 위업이었다. “비록 K리그 챌린지였지만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게 돼 행복했습니다.” 진창수는 3년 간 뛴 강릉시청을 떠나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처음 느껴본 가족이라는 감정 때문이었다. 강릉을 떠나는 버스를 타고는 “프로에 가서 꼭 성공하자”며 눈물을 보였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교적 색채가 강한 팀에 들어가게 돼 처음에는 적응을 잘 못했다.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진창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23살 때까지 한국에 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진창수 제공

그가 프로 무대에서 스스로 나온 이유는?

하지만 시즌이 시작하니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프로 데뷔 시즌이라는 말이 무색했다. 33경기에 출장해 5골 3도움을 기록하며 펄펄 날았다. 비록 K리그 클래식 무대는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건너온 무명의 재일교포가 K3리그와 내셔널리그를 거쳐 프로 무대에서 통한다는 건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의 한 선수가 펄펄 날자 그의 이름을 처음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가 K리그 챌린지에서 맹활약을 하자 에이전트도 그에게 접근했다. “더 좋은 팀으로 갈 수 있어. 나하고 같이 하자.” 이때까지 단 한 번도 에이전트를 고용하지 않았던 진창수는 처음으로 에이전트와 손을 잡았다.

그 에이전트는 더 좋은 팀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진창수를 원하고 있다고 했다. 고양 Hi FC와 3년 계약을 맺은 상황에서 에이전트가 진창수에게 말했다. “구단에는 네가 잘 말해서 계약을 풀고 나와.” 진창수는 에이전트의 말을 믿고 이영무 감독을 찾아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이영무 감독은 “선수가 잘 되는 게 우선”이라면서 흔쾌히 계약 해지에 동의해줬고 진창수는 자유의 몸이 됐다. K리그 챌린지에서 펄펄 날았던 진창수가 새롭게 가게 될 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런데 에이전트는 새 팀과의 협상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진창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이 잘 안 풀려서 갈 곳이 없어졌어.”

이때가 2014년 1월 중순이었다. 이미 많은 팀들이 선수 수급을 마친 상태에서 진창수는 결국 미아가 됐다. “정말 이영무 감독님께 어렵게 말씀드려서 팀을 나온 건데 갈 데도 없고 나이는 벌써 29살이고 그렇다고 축구를 그만 둘 수도 없는 상황이 됐어요.” 그러던 중 진창수의 사연을 들은 한 구단에서 연락이 왔다. 바로 2010년 입단 테스트에서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던 경주한수원(과거 대전한수원)이었다. 서보원 감독은 갈 곳 없는 진창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때는 저에게 선택권이 없었어요. 경주한수원에 가는 것 말고는 생각할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4년 전 저를 선택하지 않았던 팀에서 나를 알아준다는 걸 감사하게 여겼죠.” K리그 챌린지에서 주전으로 맹활약하던 선수가 한 단계 더 낮은 내셔널리그로 내려가는 일이 벌어졌다.

내셔널리그로의 복귀 그리고 부천행

하지만 진창수는 경주한수원으로 이적한 뒤 오른쪽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수술을 하면 6개월 이상 쉬어야 하는 큰 부상이었지만 진창수는 수술 없이 재활 훈련만으로 이를 극복해 보기로 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수술대에 올라 보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활에 5개월이 걸린다던 당초 의료진의 예상과는 달리 진창수는 3개월 만에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진창수는 경주한수원에서 한 시즌 동안 뛰면서 다시 프로 무대 복귀를 꿈꿨다. 생애 처음 손을 잡았던 에이전트와도 작별했다. 그리고는 염치 불구하고 고양 Hi FC 이영무 감독에게 손편지를 썼다. “감독님과 다시 함께 하고 싶습니다.”

경기에 출장해 좋은 활약을 펼쳤고 누구보다도 진창수를 잘 아는 이영무 감독은 다시 진창수를 받아줬다. 그렇게 진창수는 2015년 다시 K리그 챌린지 무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너무 고마웠죠. 먼저 팀을 나간다고 할 때도 보내주시고 다시 돌아온다고 하니 또 받아주셨어요. 저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일입니다.” 진창수는 고양에 복귀해서도 한 시즌 동안 무려 39경기에 나서 7득점 6도움이라는 대활약을 펼쳤다. 진창수가 팀의 진정한 에이스였다. 진창수는 2015년 시즌이 끝난 뒤 K리그 챌린지 몇몇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다. 이제 그가 팀을 선택할 수 있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진창수가 가장 관심 있게 본 구단은 부천이었다. “일단은 연봉을 가장 높게 책정해줬어요. 사실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서른 살까지 연봉 3,000만 원을 못 넘긴 선수였거든요. 31살이 되면서 처음으로 그래도 연봉다운 연봉을 제안 받았어요. 그리고 부천은 K3리그에서부터 경험해 본 팀이었는데 무척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무너지는 팀이 아니었습니다. 팬들도 열정적이잖아요. K3리그 포천에서 뛸 때 경기장에서 한 헤르메스 서포터스의 얼굴을 기억해뒀어요. 엄청 많은 관중은 아니라 눈에 들어왔죠. 그런데 그 분이 구단 팀장님으로 계시더라고요. 그 팀장님과 당시 송선호 감독님이 저에게 ‘부천에서 함께 하자’고 연락도 많이 주셨어요. 제 도전을 이어가도 좋은 팀이라고 생각해 부천을 택하게 됐습니다.”

진창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23살 때까지 한국에 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진창수 제공

20년 만에 부모님 앞에서 넣은 감동적인 골

그는 2016년 부천으로 이적해서도 듬직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두 시즌 동안 부천에서 73경기에 출장해 16골 9도움의 기록을 올렸다. 지난 시즌엔 9골을 넣으며 두 자리수 득점을 아깝게 놓쳤지만 확실한 주축 공격수로 자리매김했다. 비록 부천이 2년 연속 승격 문턱에서 아깝게 미끄러졌지만 진창수가 보여준 활약은 인상적이었다. 특히나 그는 지난 해 6월 FC안양과의 홈 경기는 평생 잊을 수 없다. 이 경기를 앞두고 부모님이 일본 식당 문을 닫고 한국으로 와 아들을 응원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축구선수가 되는 걸 반대했고 장사 때문에 더더욱 신경을 못 썼던 아들의 경기를 보러 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진창수가 초등학교 때 축구하는 걸 본 뒤 무려 20년 만에 아들의 경기장을 찾았다. 어머니 또한 고등학교 이후 아들의 경기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날 경기를 앞두고 진창수는 유독 긴장했다. “지면 어쩌나. 내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어요. 원래 다른 선수들은 늘 부모님이 경기장에 오셔서 응원해 주시잖아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서 너무 긴장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진창수는 이날 두 골을 기록하며 부모님 앞에서 제대로 된 효도를 했다. 아들이 아무 연줄도 없는 한국 땅에서 10년 동안 홀로 부딪히며 이뤄낸 결과였다. 이날 부천은 진창수의 두 골을 앞세워 안양에 6-2 대승을 거뒀다. 진창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기였다.

하지만 부천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 바로 K리그 클래식 진출이다. “재작년에 특히나 너무 아쉬웠어요. 제가 올해 부천과의 계약이 끝나요. 올해는 꼭 K리그 챌린지에 만족하지 않고 승격해 K리그 클래식 무대를 밟아보고 싶어요. 그러면 K리그 클래식 경기장에서 눈물을 흘릴 것 같아요.”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까. 진창수는 현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생전 그렇게 돌아오고 싶어했던 제주도에서 전지훈련 중이다. “한국에서 10년째 축구를 한다는 것도 놀랍고 제주도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는 것도 신기해요. 거짓말 같은 일의 연속이네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두 분 다 제주도로 다시 오고 싶어하셨고 지금도 친가 산소가 다 이쪽 동네에 있거든요. 지금 제가 제주도에서 훈련하고 있는 게 무슨 운명인지 모르겠어요.”

진창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23살 때까지 한국에 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진창수 제공

어느덧 그가 34세 노장이 됐다

진창수는 이제 한국 나이로 34살이 됐다. 24살의 어린 나이에 홀로 한국으로 건너와 10년을 도전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노력과 집념만으로 지금의 결과를 이뤄냈다. 한국 땅을 처음 밟았던 어린 선수는 어느덧 베테랑이 됐다. 김형일과 정성훈이 팀을 떠나면서 이제는 진창수가 팀내 최고참이다. “아직 20대 같은 느낌인데 어느덧 나이를 이렇게 먹었네요. 이제는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한 번씩 장난으로 ‘너 이제 못하면 은퇴할 나이야’라고 해요. 하지만 더 오래하고 싶어요. 한 40살까지는 뛰어야죠. 한국에서 계속 더 도전하고 싶고 그게 안 되면 다른 무대에라도 가보고 싶어요.” 하지만 일단 당장의 목표는 승격이다. “부천에서 2년 동안 아쉬움이 남았어요. 조금만 더 잘했으면 K리그 클래식에 갈 수 있었는데 그걸 못했잖아요. 올해는 그걸 꼭 이루고 싶어요. 작년에는 9골을 넣었는데 올해는 10골에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어떻게든 승격을 이루고 싶습니다.”

진창수에게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인지 물었다. 갈 곳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홀로 훈련해야 했을 때? 큰 부상을 당하고도 어머니가 암 투병을 하면서 곧바로 아버지 일을 도와야 했을 때? 일본 귀화를 거부해야 했을 때? 열악한 K3리그에서 뛰어야 했을 때? 아니면 에이전트 말만 믿고 팀을 나왔을 때? 하지만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매년 11월에서 12월이 되면 늘 힘들었어요.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도 ‘내년엔 어떻게 되는 거야?’라는 말을 늘 들었거든요. 항상 연말이면 다음 시즌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는 게 저에게는 가장 힘든 일입니다. 1년, 1년으로 평가받고 더 작게는 한 경기, 한 경기로 평가를 받잖아요. 경기력이 좋지 않거나 골을 넣지 못하면 예민해져요. 연봉도 올려야 하고 계약도 해야 하는데 플레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초조해지죠.”

진창수의 말을 들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에게 가장 두려웠던 건 내년 시즌에는 당장 축구를 할 곳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진창수는 말을 이었다. “다른 분들은 축구선수를 돈도 많이 버니까 부럽게 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아요. 전 30세까지는 연봉이 3,000만 원을 넘지도 못했고 그 이후에도 부천에서 혼자 살고 있어 생활비도 많이 나갑니다. 결혼도 못했고 지금은 여자친구도 없어요. 매일 매일 경기력에 대해 평가받고 매 시즌 평가받습니다. 쉽지 않은 직업이죠.” 진창수가 한국 무대에서 10년 동안 조금씩 더 큰 무대로 나올 수 있었던 건 피 말리는 경쟁을 받아들이고 싸워온 결과 아닐까. 끌어주는 선배와 지도자가 없으면 성공하기 쉽지 않은 곳에서 진창수의 10년은 실로 엄청난 결과임에 분명하다.

“저는 늘 전쟁 하러 이곳에 옵니다”

진창수는 시즌이 끝나면 부모님이 살고 있는 일본에 있다가 금방 아무 연고도 없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왜 그런지가 이유를 들어보면 진창수의 마음가짐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밑바닥부터 힘들게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일본은 시즌이 끝났을 때만 가끔 가요. 일본에 있으면 부모님이 계셔서 마음도 편하고 안심이 되거든요.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습니다. 일본 집에 있으면 즐겁죠. 가면 한국에 오기 싫어요. 왜냐하면 한국은 저에게 전쟁 같은 경쟁을 하는 곳이거든요. 그래도 계속 싸우기 위해 또 이 전쟁터로 와야죠. 저는 늘 전쟁하러 이곳에 옵니다. 그런 마음으로 10년째 버티며 도전하고 있습니다.” 10년 간 늘 전쟁 같은 시즌을 보내며 어느덧 34세의 노장이 된 진창수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존경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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