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회] 스포츠계 ‘슈가맨’ 7인을 소개합니다

임춘애
ⓒ국가기록원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짧지만 강렬한 전성기를 맞이하고 사라진 이들을 우리는 ‘슈가맨’이라고 부른다. ‘슈가맨을 찾아서’라는 영화 이후 ‘투유 프로젝트-슈가맨’이라는 예능 프로그램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는 추억의 가수를 만나고 그 시절 추억에 젖는다. 스포츠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 할 것 같았지만 짧고도 강렬하게 활약한 뒤 홀연히 사라진 스포츠계의 슈가맨을 지금부터 소환해 보려고 한다. 지금부터 한 명 한 명 소개하는 잊혀져 있던 슈가맨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내보자.

“이번 슈가맨은 축구선수입니다. 아마 요즘 10대, 20대는 잘 기억을 못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한 시즌 활약 만큼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이동국과 안정환이 등장한 바로 그때 이들보다 더 ‘핫’했던 선수입니다. K리그 플레이오프 사상 최고의 명승부를 만들어 낸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바로 지금 이 슈가맨을 소환합니다. 1998년 K리그를 뒤흔들었던 백승철 선수입니다.”

백승철
K리그에서 한 시즌 임팩트로는 백승철을 따라올 선수가 없다. ⓒ포항스틸러스

백승철 (1998년)
1998년 포항과 울산의 K리그 플레이오프는 역대 최고의 명승부로 아직까지도 기억되고 있다. 특히 후반 51분 터진 포항의 극적인 중거리슛은 여전히 K리그 팬들의 머리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바로 이 골의 주인공이 백승철이다. 1998년은 이동국과 안정환이 등장한 해였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임팩트 있는 장면을 연출한 신인은 백승철이었다. 당시 포항의 박성화 감독은 백승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선수 중에 발목 힘이 가장 좋다.” 하지만 백승철에 대한 기억은 딱 거기까지다. 오랜 시간 우리를 즐겁게 해줄 것만 같았던 백승철은 딱 두 시즌만 뛰고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56경기 중 32경기를 교체로 출전해 20득점 4도움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기고 말이다.

1999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 작은 부상을 방치한 채 경기장을 누비던 백승철은 시즌 종료 후 병원을 찾았다.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반월판이 완전히 찢어지고 무릎인대도 정상이 아니라 자칫하면 휠체어에 의존해야 한다는 선고를 받은 것이다. 진통제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릎 붓기가 빠지질 않아 쇠바늘을 일주일 동안 무릎에 꽂아 넣고 생활했고 경기에까지 나섰으니 몸 상태는 심각했다.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수술을 했지만 이 과정에서 외부 병균에 감염돼 무릎 전체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병원 측에서 실수를 인정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결국 그는 2년 동안 혼자 죽을 힘을 다해 재활에 매달렸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K리그에서 짧은 시간 동안 가장 강력한 임팩트를 남겼던 백승철은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이번 슈가맨은 노래의 가사로도 나왔던 분입니다. 세상을 한 번 들었다 놨던 선수죠. 이 선수의 등장 이후 은메달을 대하는 풍토 또한 바뀌었습니다. 올림픽에서 실력 뿐 아니라 외모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던 선수인데요. 사격 선수입니다. 누군지 아시겠어요? 이 슈가맨을 지금 소환합니다. ‘원조 국민 여동생’ 강초현 선수입니다.”

강초현 (2000년)
2000년 시드니올림픽 최고 스타는 금메달을 딴 선수가 아니라 의외로 은메달리스트였다. 바로 여자 공기소총 10m에서 은메달을 딴 강초현이었다. 강초현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은메달 이후 일약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본선을 1위로 통과한 강초현은 결선 마지막 한 발을 남겨둔 상황에서 낸시 존슨(미국)과 동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강초현은 마지막 10발 째에 실수에 가까운 9.7점을 쏴 결국 존슨에게 0.2점차 뒤지며 은메달을 땄다. 한국의 시드니올림픽 첫 메달이었지만 다 잡았던 금메달을 놓치자 숨죽이던 국민들은 탄식했다. 강초현도 사대에서 눈물을 보였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고도 눈물을 터트리자 우리 스스로에게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은메달도 잘한 건데 우리나라는 은메달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강초현의 은메달 이후 은메달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사회적 이슈’가 됐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강초현의 인기는 엄청났다. 앳된 얼굴과 수줍어하면서도 조곤조곤한 말솜씨는 강초현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도 불구하고 밝고 명랑한 강초현은 원조 국민 여동생으로 떠올랐다. 조성모의 팬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언론은 강초현과 조성모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스포츠스타와 연예인이 난다는 게 특별하지 않은 일이지만 이 일은 강초현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강초현의 은메달 이후 언론에서도 ‘은메달에 그쳤다’는 표현 대신 ‘은메달을 땄다’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강초현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세상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이후 강초현은 큰 대회에서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하고 잊혀져 갔다. 지누션의 노래 ‘A-YO’에 나오는 “은메달 따고도 너 울 때. A-YO”라는 가사는 강초현을 보고 만든 것이다.

강초현
강초현의 은메달은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한화갤러리아

“이번에 소개할 슈가맨은 한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짜릿했던 경기에 나섰던 선수입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만19세였는데요. 아직까지도 이 여드름 소년의 모습이 생생하네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활약한 기간은 3년에 불과했습니다. 배구계의 슈가맨을 소개합니다. 하늘의 별이 된 남자 故김병선 선수입니다.”

김병선 (1991년~1994년)
1991년에 일본에서 열린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 독일과의 경기는 명승부라는 칭호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적의 승부’였다. 한국 스포츠 역사를 모두 따져도 손에 꼽을 만한 경기였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키는 2m에 이르렀지만 앳돼 보이는 한 선수가 맹활약했다. 바로 성균관대 1학년에 재학 중인 센터 김병선이었다. 그는 이 어린 나이에 주전으로 뛰면서 한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기적과도 같은 승부의 주인공이 됐다. 이후에도 김병선은 확고한 대표팀 주전으로 활약했다. 한국 배구의 미래를 10년은 거뜬히 책임질 선수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1993년에는 대학교 3학년의 신분으로 한국을 아시아 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졸업을 하기도 전인 1994년 12월 ‘명문’ 현대자동차서비스에서 이미 그를 스카우트했고 대학생 신분으로 실업 무대에도 섰다. 당시 스카우트 비용만 2억 원이 들었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김병선은 어린 나이에 최고 수준의 기량을 선보였다.

그는 1995년 2월 25일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졸업 나흘을 앞둔 21일 믿기 어려운 소식이 전해졌다. 김병선이 갑자기 숙소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지만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대동맥 박리증, 일명 ‘말팡 증후군’이었다. 주로 장신 선수들에게서 나타나는 병으로 갑자기 키가 크면서 동맥이 얇아지고 혈관이 터지면서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희귀병이었다. 사망 직전 경기에서 흉부 통증을 호소해 병원 심장 검진 예약을 잡아놓고 하루 전에 일어난 안타까운 사고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 두 살이었다. 아마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지금쯤 김상우, 신진식, 권순찬 등과 함께 감독으로 우리들과 함께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짧지만 강렬한 활약을 남기고 하늘로 간 김병선은 이렇게 우리의 영원한 ‘슈가맨’이 됐다.

“이번 슈가맨은 동계 종목 선수입니다. 바로 여자 쇼트트랙 계보를 이은 선수인데요. 이른 나이에 등장해 너무 빨리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전이경 이후 진선유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여자 쇼트트랙을 이끈 선수입니다. 이 이름을 들으면 어렴풋이 기억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자, 슈가맨을 소환해 보겠습니다. 한국 동계 개인 종목 사상 최연소 금메달리스트, 고기현 선수입니다.”

고기현 (2002년)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은 국민들에게 억울하고 화가 나는 대회로 기억돼 있다. 이 대회에서 김동성이 안톤 오노(미국)에게 금메달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선수가 있다. 바로 쇼트트랙 여자 대표팀의 고기현이다. 당시 고기현은 중학교 3학년 신분으로 올림픽 무대에 나가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1000m에서도 은메달을 획득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어린 선수가 세계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던 중국의 양양A와 양양S를 제치고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는 역사를 쓴 것이다. 고기현은 지금까지도 한국 동계 개인 종목 사상 최연소 금메달리스트다. 더 놀라운 건 이 금메달은 고기현이 연습도중 팔꿈치 뼛조각이 떨어지는 부상을 당해 한 달 이상 정상적인 훈련을 하지 못하고도 이뤄낸 성과라는 점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고기현을 더 오랜 시간 올림픽이나 국제무대에서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고기현은 금방 잊혀졌다. 이후 부상과 슬럼프에 빠진 고기현은 대표팀에서 멀어졌고 2006년 현역에서 물러났다. 더 오랜 시간 우리 곁에서 활약해주길 바랐지만 이른 나이에 은퇴해 유학을 다녀온 뒤 심판 자격증을 땄다. 이후에는 국내 쇼트트랙 경기에서 심판으로 활약하다 스페셜올림픽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운영부장을 맡았고 현재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고기현은 올림픽에서 두 개의 메달을 따고 슬럼프에 빠진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올림픽 금메달이 유일한 목표였다. 올림픽 이후 삶에 대한 설계가 없었다. 그런데 올림픽 금메달을 따니 너무나 긴 인생이 남았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참고로 고기현은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서 여자 3000m 계주 금메달을 딴 조해리와 동갑이다. 심지어 안현수보다는 한 살이 어리다. 그가 얼마나 이른 나이에 꿈을 이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슈가맨은 ‘부산사나이’입니다. 얼핏 보면 운동선수 같아 보이지 않는 외모였는데요. 금테 안경을 썼고요. 야구선수입니다. 1990년대 초반 부산을 들썩이게 했던 주인공이죠. 벌써 여기저기에서 불이 들어오네요. 30대 이상, 부산 분들이라면 ‘올불’을 예상합니다. 추억의 슈가맨을 지금 소환하겠습니다. 슈가맨은 바로 롯데가 배출한 역사상 유일한 신인왕, 염종석 선수입니다.”

염종석
1992년 염종석은 신인으로 팀을 우승까지 이끌었다. ⓒ롯데자이언츠

염종석 (1992년)
1992년 부산고를 졸업한 염종석은 롯데자이언츠 지명 후 고려대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비 마련을 위해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곧바로 롯데에 입단했다. 그가 첫 시즌 보준 활약은 엄청났다. 만19세의 염종석은 35경기에 출장했고 이중 22경기에 선발로 나왔다. 그러면서 무려 17승 9패의 엄청난 성적을 거뒀다. 평균 자책점은 2.33에 불과했다. 데뷔 후 첫 9승을 모두 완투승으로 장식했고 완투한 13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만19세의 나이로는 믿기지 않은 대활약이었다. 금테 안경을 쓴 이 어린 선수는 혜성처럼 등장해 타자들을 돌려세웠다. 염종석의 대활약은 1992년 포스트시즌에서도 빛났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 등을 연이어 거치며 4승 1패 1세이브 방어율 1.47을 기록하면서 그해 롯데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비록 한국시리즈 두 경기에 등판해서는 만족스러운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롯데가 팀 역사상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된 건 정규시즌부터 포스트시즌까지 놀라운 활약을 보여준 염종석의 공이 가장 컸다. 염종석은 이 해에 팀 우승과 신인왕,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평균 자책 1위 등 휩쓸 수 있는 모든 상을 휩쓸었다. 첫 시즌 활약이 이 정도였으니 최동원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수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엄청났다. 하지만 염종석은 이후 단 한 번도 데뷔 시즌 성적을 넘지 못했다. 1992년 혹사로 인해 팔에 무리가 갔고 결국 이후로는 단 한 번도 10승 이상을 거두지 못했다. 롯데에서만 17년을 뛰었지만 사람들은 그 어느 시즌보다 1992년 염종석을 추억한다. 평범한 선수가 돼 롯데에서 뛰다가 2008년 시즌 이후 방출돼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1992년 염종석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선수였다.

“강초현 선수는 노래 가사에 등장했었죠? 그런데 이번에 소개할 슈가맨은 영화의 명대사 주인공입니다. 어려우시다고요? ‘라면’이라고 하면 큰 힌트가 될 것 같네요. 40대 이상에서는 이 힌트만 듣고도 벌써 ‘올불’이 들어왔네요. 네. 그럼 슈가맨을 소환해 보겠습니다. ‘라면 소녀’ 현정화, 아니 임춘애 선수입니다.”

임춘애
임춘애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일약 스타가 돼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봉송에서 나섰다. ⓒ국가기록원

임춘애 (1986년)
임춘애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치른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해 국가대표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한국신기록을 내며 좋은 성적을 거두자 극적으로 뒤늦게 국가대표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엄청난 역사를 썼다. 여자 육상 800m와 1,5000m, 3,000m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한국 육상 역사상 이렇게 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한 건 임춘애가 유일무이하다. 임춘애는 아시안게임 3관왕 이후 언론이 주목하는 최고의 스타가 됐다. 임춘애가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보도 이후 이 관심은 더 커졌다. 졸지에 그는 ‘라면 소녀’가 됐다. 전국 각지에서 임춘애를 위한 후원이 쇄도했다. 임춘애는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봉송 최종 주자로도 뽑히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임춘애는 이후 육상계에서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1998년 서울올림픽에서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예선 탈락한 뒤 은퇴했다. 사람들은 ‘라면 소녀’가 배가 불러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하지만 육상은 세계의 벽이 워낙 높았고 구타도 훈련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풍토 또한 심했다. 결국 임춘애는 육상계를 떠난 뒤 지금은 생활 체육 지도자로 살고 있다. 영화 ‘넘버3’에도 등장하는 명대사에 나올 정도로 임춘애는 헝그리 정신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하지만 임춘애가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당시 열악한 육상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언론에서 과장해 보도한 것이었다. 임춘애는 체력 보강을 위해 도가니탕과 삼계탕은 물론 뱀탕까지 먹고 뛰었다고 밝혔다.

“이번 슈가맨은 오늘 소개하는 선수 중에 유일한 외국인 선수입니다. 이 선수 때문에 평균 관중이 두 배나 뛴 적이 있었습니다. 벌써 13년 전 일이네요. ‘열풍’을 넘어 ‘광풍’을 몰고 다니던 그 슈가맨은 지금 바로 소환하겠습니다. 추억의 이름이네요. 2005년 KBL을 뒤흔들며 ‘신곡’을 썼던 단테 존스입니다.”

단테 존스
단테 존스는 열풍을 넘어 신드롬을 일으켰다. ⓒ안양KT&G

단테 존스 (2005년)
KBL에서 하위권을 전전하던 안양SBS는 2004-05시즌 도중 조 번이 부상을 당해 대체 선수를 찾아야 했다. 2005년 2월 그가 대체선수로 입국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를 특별한 외국인 선수라는 바라보는 이는 없었다. 단테 존스가 1996년 NBA드래프트 1라운드 21순위로 뉴욕 닉스에 뽑힌 뒤 보스턴 셀틱스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는 경력도 있었지만 조 번이 그래도 안양SBS에서는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었고 NBA 출신이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NBA 출신 센드릭 핸더슨이 이미 KBL에서 실패하고 돌아가 NBA 출신이라는 건 보증수표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단테 존스는 KBL 역사상 가장 짧은 시기에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선수로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2005년 당시 농구장에는 단테 존스 ‘열풍’을 넘어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일단 실력이 대단했다. 하위권을 맴돌던 안양SBS는 단테 존스 가세 이후 무려 15연승을 질주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16경기에 나서 경기당 평균 29.38득점과 12.1개의 리바운드 3.4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펄펄 날았다. 심지어 3점슛도 페이드웨이로 쏠 정도로 다른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경기력을 선보였다. 그렇다고 다른 외국인 선수들처럼 우쭐대며 이기적인 플레이를 한 것도 아니다. 경기가 끝나면 경기장을 찾은 어린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자신이 쓰던 보호대까지 벗어서 선물해 주던 매너 있는 선수였다. 평균 2,000여 명이 찾던 안양 홈 경기는 단테 존스 영입 이후 관중이 두 배 가까이 늘었고 부산KTF와의 경기에서는 6,620명이 모여 엄청난 열기를 자랑했다. 시즌 마지막 5경기 평균 관중도 무려 5,000명을 돌파했다. 비록 이 시즌에 안양SBS는 4강 플레이오프에서 패해 우승에 실패했지만 단테 열풍은 대단했다. 단테 존스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KBL is my NBA.” 한국을 떠난 단테 존스는 2009년까지 중국에서 뛴 후 2010년 멕시코리그에서 은퇴한 뒤 래퍼로 변신했다.

오랜 시간 사랑받는 스포츠 스타도 있지만 이렇게 짧고 굵은 기억을 남기고 사라진 스포츠 스타도 있다. 이들이 사라진 이유를 되짚어 본다면 얼마나 운동선수들이 힘겹고 고된 경쟁을 펼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번쯤은 이렇게 짧은 전성기를 뒤로하고 홀연히 사라진 스포츠계의 슈가맨을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footballavenue@sports-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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