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즌 광주에 합류한 두현석. 본인의 바람대로 '광주의 아들'로 거듭날 수 있을까. ⓒ광주FC 제공

[스포츠니어스ㅣ남윤성 기자] 민첩하다, 스피드가 좋다, 드리블 기술이 뛰어나다. 흔히 체구가 작은 선수를 표현하는 수식어들로 대부분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이 선수만큼은 다르다. 자신의 최고 강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상대를 등지고 공을 받는 플레이는 누구보다 자신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4년간 정들었던 연세대학교를 떠나 프로무대를 정조준하고 있는 광주FC의 신인 두현석의 발끝은 다부진 체구만큼 기대와 열정으로 가득 차있다.

부모님 권유로 축구화를 처음 신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운동을 시작하는 대부분의 선수들과 달리 두현석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먼저 축구선수의 삶을 권유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어머니 손을 잡고 횡단보도에 서있었는데 ‘너는 축구해볼 생각 없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반대편을 보니 정문을 통해 축구부가 운동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그땐 단순히 공을 차는 게 재밌어보여서 하겠다고 대답했죠.” 그렇게 대구 침산초에서 처음 축구화를 신은 두현석은 단단한 체구와 안정적인 플레이를 펼치며 스위퍼로 뛰어난 모습을 선보였고 이를 바탕으로 청구중에 진학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수비수로 활약하기엔 키가 쉽사리 크지 않았다. 더군다나 중학교에 진학하며 맞부딪혀야했던 상대 공격수들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씩은 더 컸다. 신체 조건에서 어려움을 느낀 두현석은 이후 측면 공격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하지만 이번엔 환경적인 어려움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당시 청구중 축구부 숙소는 30명이 함께 한 공간에서 생활해야 했는데 그러다보니 선배들의 괴롭힘이 조금씩 잔재해 있었다.

결국 다시 한 번 대구북중 전학을 선택한 두현석은 3학년부터 자신의 축구재능을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했다. 축구 명문 안동고의 부름을 받은 것도 이 시기였다. “대구북중에 전학 간 이후로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당시 감독님께서 공격에 있어서만큼은 자유롭게 플레이하도록 지도하셨기 때문이에요. 공격적으로 과감하게 도전하는 플레이 스타일도 이때부터 익힐 수 있었습니다.”

비록 신장은 작지만 두현석의 발끝은 어느 때보다도 매섭다. ⓒ광주FC 제공

고등학교 진학 후 여봉훈, 김동원과 함께 안동고 공격 삼각편대의 최선봉에 선 두현석은 재학 기간 안동고를 2012년 협회장배 3위, 2013년 대통령금배 3위 및 백운기 3위로 이끌었다. 이처럼 두현석의 기량이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하자 그를 향한 대학가들의 관심 또한 뜨거워졌다. 하지만 안동 열아홉 소년의 관심사는 오직 축구뿐이었다.

“고려대와는 몇 번 연습경기를 했었는데 형들이 정말 말도 안 되게 잘했어요. 그래서 고대 진학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죠. 근데 대뜸 연세대에서 스카웃이 왔다는 거예요. 주변에서는 전부 축하해줬고 친구들도 부럽다며 난리를 피웠어요. 하지만 정작 문제는 제가 연대가 얼마나 유명한지 몰랐다는 거예요. 어디에 있는지도, 심지어 그런 학교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어요. 인터넷을 검색해본 뒤에야 연대가 얼마나 대단한 학교인지 알게 됐어요. 그만큼 그땐 정말 축구밖에 모르는 시골 촌뜨기였어요.”

너무나 짧았던 첫 번째 전성기

축구를 하다보면 뭘 해도 되는 때가 있다. 흔히 전성기라 일컫는 이 시기는 선수마다 그 시기가 각기 다르지만 적어도 한 번씩은 꼭 찾아온다고 한다. 두현석의 첫 전성기는 연세대학교 진학이 확정된 직후 찾아왔다. 이때만큼 축구가 쉽게 느껴졌던 적도 없었다.

“진학이 확정된 상태에서 연대와 연습경기를 했는데 그날은 정말 뭘 해도 되는 날이었어요. 말 그대로 펄펄 날아다녔죠. 고3인 제가 형들을 상대로 그런 경기력을 보이니까 형들도 경기 후 따로 찾아와서 내년에 많이 기대하겠다고 한마디씩 했어요. 이땐 축구가 정말 쉽게 느껴졌어요. 이듬해엔 처음으로 대표팀 부름을 받았어요. U19 대표에 소집돼서 파주 NFC에 도착했는데 천국에 온 기분이 들더라고요. 밥도 너무 맛있었고 분위기도 신기했어요.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비록 신장은 작지만 두현석의 발끝은 어느 때보다도 매섭다. ⓒ광주FC 제공

그렇게 축구인생 첫 전성기를 맞이한 두현석은 신입생답지 않은 과감하고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로 연세대 입학과 동시에 붙박이 측면자원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영원하길 바랐던 첫 번째 전성기는 채 1년을 가지 못했다. 중고교시절 자신을 돋보이게 했던 플레이가 가장 큰 단점이 되어 스스로를 위기로 내몰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안동고가 경기장에서 뛰는 양으로 워낙 유명했어요. 그러다보니 동료를 이용하는 플레이보단 선수들 개인능력에 의존했고 이 습관이 대학교에 올라와서도 바로 안 고쳐졌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신입생 때 정말 아무생각 없이 축구를 했던 것 같아요. 자신감은 결국 자만이 됐고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꼴이었죠. 항상 겸손해야 하는 이유를 몸소 깨달은 시기였습니다.”

한순간 엄습한 위기, 절치부심해 와신상담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시련에 처음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겉으론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시간이 길어지면서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의 시련을 극복할 만큼 충분히 준비돼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에게서 정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때부터 매일 밤 개인운동에 집중하며 이를 갈았다.

“2학년 때 단 1경기도 뛰지 못했어요. 최근에서야 부모님께 들었는데 당시 신재흠 감독님께서 제가 팀을 위하는 플레이를 할 때까지,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서라도 연습경기도 출전시키지 않겠다고 말하셨다는 거예요. 그 이후 훈련 때마다 ‘패스 퀄리티가 떨어진다, 슈팅에 자신감이 없다’ 등 정말 사소한 부분까지 지적하시면서 많이 꾸짖으셨어요.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혼내시다가도 ‘마지막 세밀함에 신경 써라, 수비가담 상황을 더 빠르게 파악하라’는 등 성장에 도움 되는 좋은 지적도 많이 해주셨어요.

“결국 그해 정기 연고전은 골대 뒤에서 90분 동안 몸만 풀다가 끝났어요. 처음엔 어린 마음에 화가 먼저 났는데 나중엔 오기로 바뀌더라고요. 이때부터 감독님 요구대로 팀플레이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개인운동에 집중하면서 피지컬을 보완해 나갔어요. 그리고 이듬해 동계 전지훈련을 소화했는데 이때처럼 신체적으로 100% 준비가 되어있었던 적은 처음이었어요. 그때만큼은 자만이 아닌 확실한 자신감이었죠. 축구를 보는 시각도 이때 많이 달라졌어요. 정말 힘든 시기였지만 선수로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신장은 작지만 두현석의 발끝은 어느 때보다도 매섭다. ⓒ광주FC 제공

절치부심 끝에 주전으로 재도약한 두현석은 마지막 기회란 생각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팀을 위해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리고 피땀 흘린 노력의 결실은 대회 우승으로 맺어졌다. 그해 겨울 열린 춘계연맹전 조선대와의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연세대의 우승을 이끈 것이다. “스스로 컨디션이 올라온 게 느껴지니까 동계훈련 때부터 자신이 있었어요. 거기에 누구보다 절실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많이 뛰게 되더라고요."

"춘계 우승은 제 인생 첫 우승이었어요. 거기에 득점왕까지 타면서 기쁨이 2배가 됐죠. 대회가 끝나고 고깃집에서 회식을 하는데 감독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스스로 노력하고 있으면 기회도, 좋은 결과도 찾아오니까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제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저를 쳐다보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기분이 짜릿하다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느꼈어요.”

생애 첫 주장 완장, 하지만 U리그 참가 불가

두현석은 졸업반이 된 2017년 생애 처음 주장에 임명되며 대학생활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위기가 들이닥친다. 대학스포츠총장협의회(이하 KUSF)가 도입한 ‘C학점 룰’에 직격탄을 맞으며 연세대의 U리그 참가 불가 소식을 접한 것이다.

“U리그에 참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은 동계훈련 때 처음 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죠. 그리고 춘계연맹전 탈락 직후 U리그에 참가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후엔 주로 고등학교와 연습경기를 했는데 원래대로라면 프로와 더 많이 연습경기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프로와 연습경기를 하려면 원정을 가야했고 그렇게 되면 수업 출결에 문제가 생겨요."

"결국 C학점 징계가 저희 발을 묶은 꼴이죠. 징계를 피한 다른 학교의 경우에는 같은 운동부끼리 수업을 들어요. 강의시간도 운동부 훈련이 있는 시간을 피해서 짜여 진다고 들었어요. 반면 저희는 일반학생들과 학점경쟁을 해야 돼요. 새벽훈련까지 병행해야 하는 운동부로서는 C학점을 받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비록 신장은 작지만 두현석의 발끝은 어느 때보다도 매섭다. ⓒ광주FC 제공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던 게 가장 힘들었어요. 애들도 의욕이 없었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후배들한테 먼저 다가가 장난도 치면서 좋은 분위기로 팀을 이끌려 노력했어요. 쓴 소리만 하는 주장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후배들과 격을 두는 성격도 아니었고요. 그러던 와중에 작년 춘계연맹전 우승팀 자격으로 FA컵에 참가하게 됐어요. 프로팀과 경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에 동기부여가 확실했죠."

"32강에서 광주FC와 맞붙었는데 초반부터 많이 밀렸어요. 근데 광주가 계속해서 득점하지 못하면서 질 거란 생각이 별로 안 들더라고요. 저랑 근호의 득점으로 2-0이 됐는데 그때부터 모든 게 망가지기 시작했어요. 스스로 자멸한 꼴이었죠. 개인기량에 있어서 엄청나게 차이난다는 느낌은 못 받았지만 프로의 뒷심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경기였어요.”

U23 대표팀 그리고 정기 연고전의 추억

비록 U리그엔 참가하지 못했지만 두현석의 가치는 대표팀 부름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7월 베트남에서 열린 2018 AFC U23 챔피언십 예선전에 소집된 두현석은 대표팀에서도 주장을 맡으며 예선전을 준비했다. 오랜만의 대표팀 합류라 감회가 새로웠지만 주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성적에 대한 부담감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초반엔 U20 월드컵에 뛰었던 동생들과 대학선수들 간에 어색함이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플레이와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죠.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동생들한테 장난도 걸면서 먼저 다가갔어요. 다행히 며칠 만에 팀 분위기는 좋아졌지만 단기간에 조직력까지 끌어올리는 건 어려움이 있었죠. 동티모르전 무승부 이후 언론과 팬들의 반응을 인터넷으로 확인했는데 기분이 정말 착잡했습니다."

"더군다나 베트남전은 다음 라운드 진출이 걸린 경기였기에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어요. 하지만 경기를 뛰다보니 금세 괜찮아지더라고요. 관중이 꽉 들어찬 경기장에서 뛰는 건 연고전에서 미리 경험해봤기에 오히려 즐기면서 뛰었어요. 베트남 팬들의 환호가 대단하긴 했는데 솔직히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고 경기를 치르면서 팀 경기력도 좋아져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계유니버시아드 소집에 AFC 챔피언십까지, 한 달 가까이 이어진 강행군 속에서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한 두현석은 피로감이 상당했다. 하지만 연세대가 추계연맹전에 참가하고 있어 귀국과 동시에 강원도 태백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날 호남대와의 32강전에서 선발명단에 즉시 이름을 올렸고 용인대와의 16강전에서는 2골을 기록하며 연세대의 대회 4강을 이끌었다.

비록 신장은 작지만 두현석의 발끝은 어느 때보다도 매섭다. ⓒ광주FC 제공

“이틀 간격으로 4경기를 풀타임으로 뛰었어요. 제대로 쉬지 못한 탓에 신체적으론 힘들었지만 그 상태로 팀을 이끌었기에 스스로 대견하다고 위로했어요. 무엇보다 선수들이 진짜 열심히 뛰어줘서 너무 고마웠고 그랬기 때문에 우승하지 못했음에도 오히려 후련했어요.”

U리그 불참과 춘․추계연맹전 조기 탈락에 자칫하면 빈손으로 한 해를 끝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현석은 위기에서 주장의 품격을 보였다. 정기 연고전을 앞두고 매 훈련 사소한 부분까지 끊임없이 파이팅을 불어넣으며 흐트러진 팀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그 결과 극적인 2-1 승리로 마지막 연고전을 마무리했다.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해요. 연고전은 결과를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경기에요. 막판에 동점골을 허용한 순간에도 그냥 이렇게 끝날 것 같지가 않더라고요. 이번 연고전은 전에 없었던 행운이 저희한테 제대로 찾아왔다고 생각해요. 역전골이 들어가던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하자면 연고전이 끝난 직후 5개부 운동부가 한자리에 모여서 총장님과 저녁 식사를 해요. 승리한 운동부는 자랑스럽게 웃고 떠드는 분위기에서 밥을 먹는 반면 경기에서 진 운동부는 그냥 고개 푹 숙이고 밥만 먹어요. 한 번도 정기전을 이겨보지 못해 항상 고개 숙이고 밥을 먹어야 했어요. 이번 저녁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제 축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광주의 아들 그리고 부모님

두현석은 이번 시즌 광주FC의 유니폼을 입고 프로무대에 첫 발을 내딛는다. 지난해 FA컵에서 골망을 갈랐던 상대가 이제는 친정팀이 된 것이다. 다른 구단의 제의도 있었지만 힘든 시기 자신을 믿어준 광주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정기 연고전을 앞두고 연습경기를 치렀던 프로 세 팀 중 한 곳에서 입단 제의가 왔었어요. 하지만 그땐 이미 광주에 합류하기로 약속한 상태였습니다. 광주는 FA컵이 끝나고 저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보였던 팀이었어요. 더군다나 U리그 출전 금지로 경기도 뛰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의 적극적인 태도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졌죠. 광주에 반드시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정중히 제안을 거절했어요.”

피부로 와닿을 실력 차에 대해 걱정보단 기대가 더 큰 두현석은 하루빨리 직접 맞부딪히며 자신의 현 위치를 알아가고 싶다고 밝혔다. 프로 무대를 향한 당찬 포부에는 신인의 패기가 제대로 묻어나 있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실력은 얼마나 차이가 날지, 과연 프로 무대에서 얼마나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가 가장 궁금해요. 하루빨리 직접 부딪히면서 저의 현 위치를 알아가고 싶어요. 프로에 처음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걱정도 많지만 기대와 설렘이 더 커요."

비록 신장은 작지만 두현석의 발끝은 어느 때보다도 매섭다. ⓒ광주FC 제공

"스스로 생각했을 때 제 가장 큰 장점은 배짱이 크다는 거예요. 언제든지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뛰는 무대가 1부인지 2부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죠. 오히려 K리그2가 제 경쟁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무대라고 생각해요. 올해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광주와 함께 반드시 승격을 이루고 싶습니다. 이번 시즌 좋은 모습을 선보인다면 아시안게임 출전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두현석에게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그날의 기억 때문에 그리고 부모님께 제대로 된 보답을 해드리기 위해서 두현석은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것이라 말했다.

“초등학교 때 ‘회비 안내세요?’란 감독님의 물음에 ‘회비 낼 돈이 없잖아요’라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까지 가슴 속에서 잊혀 지지가 않아요.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어머니는 마트에서 일하셔야 했고 아버지는 운전기사와 철강 산업 등 소위 3D라 불리는 일을 하셔야 했어요. 그런 와중에서도 저에겐 아낌없이 지원해주셨어요. 동생들이 질투하고 시기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커왔습니다. 개인 운동할 때면 부모님 생각을 하면서 버텼고 그래서 더욱 절실했습니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하게 될 수 있었던 계기는 아무래도 가족에 있었던 거죠. 이젠 부모님이 그만 고생하시게끔 훌륭한 선수가 되서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요.”

동백은 한겨울 차가운 눈바람을 견디며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이다.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겪고 성장한 두현석은 그래서 동백꽃과 똑 닮았다. 이제 두현석에게 남은 일은 꽃을 활짝 피우는 것뿐이다. 광주의 아들을 꿈꾸는 두현석의 전성기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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