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취재 가는 날 날씨가 험한 건 기분 탓일 거야 ⓒ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수원=홍인택 기자] 진귀한 광경이다. 흰 눈이 녹색 운동장을 덮었다.

30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는 AFC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플레이오프가 열렸다. 수원 삼성이 베트남 FLC 탄호아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눈 덮인 축구장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춘추제로 열리는 한국 축구 현장에서 눈 쌓인 운동장을 보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불과 몇 달 전 수원월드컵경기장은 찜통처럼 더울 때가 있었고 폭우가 쏟아져 경기장 지붕 안쪽으로 비가 들이치던 때도 있었다.

오후 즈음부터 중부 지방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걱정했던 한파는 한풀 꺾였지만 한파대신 폭설이 내렸다. 경기장에 도착하자 눈발은 더 거세졌다. 수원월드컵경기장 조명에 비친 눈의 모습은 저절로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작정하고 핫팩 4개를 챙기긴 했지만 아찔했다. 5층 야외 기자석은 지붕 가장 안쪽 자리까지 눈이 치고 들어왔다. 수원 구단은 실내에 자리를 마련하고 취재 기자들을 배려했다. 수원 구단의 배려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눈을 맞으며 취재를 할 뻔했다.

취재 기자들은 며칠 전 중국 창저우에서 열렸던 AFC U-23 챔피언십 결승전과 2007년 3월 탄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성남 일화와 동탐롱안의 ACL 경기 이야기를 했다. 창저우에서 베트남의 U-23 대표팀은 우즈베키스탄 대표팀을 만나 눈 속에서 연장전까지 치렀다.

2007년에도 폭설로 탄천종합운동장이 하얗게 변했다. 탄천으로 원정을 왔던 베트남 팀 동탐롱안은 하프타임 이후 경기의 연기를 강력하게 요청했었다. 그래서 후반전 경기가 10여 분 지연되기도 했다. 동탐롱안 선수들은 처음에는 눈을 보며 신기해하고 즐기다가 나중에는 치를 떨었다는 후문이다.

현장에 모인 취재 기자들도 연달아 "와…" 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에 취재진을 챙기던 수원 삼성 관계자도 한마디를 던졌다. "베트남 친구들이 눈을 몰고 다니나 봐."

그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탄호아 선수들은 눈이 오는 수원에서 '셀카'를 찍으며 이 광경을 즐겼다고 한다. 탄호아 구단 측은 선수들의 부상을 걱정했다. 수원 측에 "혹시 남는 축구화가 없느냐"라며 발품을 팔았다. 수원 구단은 "최대한 인도적인 지원을 했다"라고 전했다.

모빌 카의 흔적 ⓒ 스포츠니어스

하프라인, 페널티 박스를 구분하는 라인까지 흰 눈으로 덮이자 다양한 말들이 오갔다. "근처 공군 좀 불러오라.", "치워도 치워도 눈이 내리는 이상 계속 쌓일 텐데 어떡하느냐.", "AFC 본부가 말레이시아에 있어서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다.", "사진 기자들 진짜 고생한다.", "그래도 베트남 선수들 유니폼은 우즈베키스탄처럼 흰색이 아니라 다행이다." 경기 감독을 맡은 AFC 관계자는 모빌 카를 이용해 라인에 쌓인 눈을 치웠다. 선수들은 흰색 공으로 몸을 풀었지만 AFC 측은 경기가 시작되자 붉은색 공으로 바꿨다.

경기가 시작되자 선수들도 애를 먹는 것처럼 보였다. 눈밭에 구른 공은 미끄러워 보였다. 탄호아 선수들도, 수원 선수들도 일단 공을 잡아두고 플레이를 했다. 경기 속도가 조금만 올라가도 선수들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토밤은 모처럼 좋은 위치에서 공을 잡았으나 미끄러지느라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페널티 박스 안에 모여있던 탄호아 선수들도 아찔하긴 마찬가지였다.

탄호아 팬들은 전반 30분이 되어서야 경기장에 도착했다. 탄호아 구단도 ACL 플레이오프에 진출할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서 부랴부랴 한국행 티켓을 끊었고 14시간에 걸쳐 한국에 도착했다. 팬들은 오죽했을까. 팬들이 탄호아 팀 엠블럼이 새겨진 노란색 걸개를 수원월드컵경기장에 주섬주섬 펴는 동안 데얀의 슈팅이 크로스바를 맞추기도 했다.

수원 팬들의 열정도 대단했지만 탄호아 팬들의 열정에 감탄했다. 저들은 패딩이나 제대로 챙겨왔을까? 혹시 2007년 탄천을 찾았던 동탐롱안 팬들에게 조언을 구했을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베트남 말을 할 수 없다는 적당한 핑계를 되새기며 쭉 경기를 지켜봤다.

경기는 수원의 5-1 대승으로 마무리됐다. 데얀의 골은 약간 운이 따른 듯 보였다. 5-0으로 끝나나 했는데 마지막에 이기제가 미끄러지면서 공을 따라가지 못했다. 낯선 환경에서 탄호아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고 결국 한 골을 기록했다. '참 눈이 뭐라고 여럿 웃기고 울리나' 싶었다.

경기 후 만난 탄호아 마리안 미하일 감독은 "눈이 내리는 경기가 익숙지 않아 당황했다"라고 전하면서 "우리 축구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원이 이런 날씨에서 우위를 점했다"라고 전했다. 패배로 인한 아쉬움보다 제대로 된 경기를 치르지 못한 것에 많은 아쉬움을 느끼는 듯 보였다.

글쎄요. 수원도 이렇게 폭설이 내리는 경기는 익숙하지 않아 보이던데요.

intaekd@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