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회] 정현과 ‘박항서의 베트남’이 준 신선한 충격

정현
ⓒ대한테니스협회 제공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정현은 대단했다. 2018년 첫 메이저 대회인 호주 오픈에서 4강에 오르며 감동을 선사했다. 한국 선수가 테니스에서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를 이기고 ‘황제’ 로저 페더러(스위스)와 마주하는 걸 보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현은 페더러를 만나 기권패하기는 했지만 발목에 물집이 심하게 잡힌 상황에서도 투혼을 발휘하는 등 감동은 엄청났다. 보는 내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선수가 저런 큰 무대에서 ‘황제’와 격돌한다는 건 지금까지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건 한국 선수가 마이클 조던 앞에서 더블 클러치를 시도하는 걸 본 꼴이다.

비슷한 시기 베트남 축구도 난리가 났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U-23 대표팀이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23세 이하) 챔피언십’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준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선수들이 폭설이 내리는 경기장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강원FC에서 뛴 쯔엉 정도야 눈에 익숙하겠지만 나머지 베트남 선수들 대부분은 이런 환경에서 뛰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노동훈장’을 받을 예정이다. 베트남이 결승까지 오르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마 베트남 국민들은 남의 나라 잔치와도 같았던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뒀다는 걸 꿈처럼 생각할 것이다.

정현과 베트남 축구를 보고 있자니 이게 스포츠의 진짜 매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 즐거운 충격은 참 오랜 만이다. 이미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황에서 국민들은 월드컵 4강이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정도는 거둬야 만족한다. 이런 일이 또 벌어지면 대단히 기뻐하고 축제가 한판 벌어지겠지만 세상이 천지개벽할 수준의 일은 아니다. 다시는 이뤄지기 어려운 위대한 성과지만 이미 한 번 경험해 봤으니 감동은 덜하다. 물론 이 대회가 하찮다는 게 아니다. 그만큼 축구와 야구 등에서 우리의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뜻이다. ‘아주 아주 아주 잘하면 평생에 한 번은 또 경험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꽤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껏 테니스는 그렇지 않았다. 조코비치와 페더러는 딴 나라 세상 이야기였다. 가끔 채널을 돌리며 보던 그랜드슬램 대회는 우리와 상관없는 다른 이들의 세계였다. 우사인 볼트와 게이틀린이 뛰는 100m 마냥 우리는 별로 상관이 없는 무대였다. 그런데 이 무대에서 한국 선수가 꽉 찬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승리를 따내고 한국어로 인터뷰까지 하니 충격도 이런 충격이 없다. 한 번 기대해 보지도, 상상해 보지도 않은 장면이라 더 놀랍다. 테니스인들이 들으면 섭섭한 소리일지 몰라도 우리에게 테니스 그랜드슬램 대회는 눈높이와 기대치라는 게 전혀 없던 종목이었다. 애초부터 목표가 16강이나 8강처럼 딱 떨어지는 게 아니어서 정현의 이번 4강은 더 충격적이다.

박항서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축구에 잊을 수 없는 성적을 안겼다. ⓒ디제이 매니지먼트 제공

우리에게는 약한 종목이었던 테니스에서 정현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니 피겨스케이팅에서의 김연아와 수영에서의 박태환이 떠오른다. 우리는 김연아가 등장하기 이전에 피겨스케이팅에서 한국 선수가 활약할 것이라고 조금도 기대해 본 적이 없다. 카타리나 비트와 토냐 하딩 등 남의 나라 이야기였을 뿐이다. 남나리가 국제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보내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한국인이 훗날 올림픽 피겨스케이트에서 금메달을 딴다고 예언했다면 “왜 미래에는 물도 사 마신다고 그러지”라며 조롱을 들었을 것이다.

박태환이 나타나기 전까지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수영 금메달을 따리라고는 예상해 봤나. 수영이 취약 종목이어도 그러려니 했다. 체격에서 한국인은 절대 서양인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아주 마음 편하게 생각했다. 지금이야 김연아와 박태환의 금메달 장면이 수도 없이 흘러나와 감흥이 덜해졌지만 저변과 기대가 전혀 없던 시기에 ‘갑툭튀’한 이들이 선사한 충격은 엄청났다. 지금의 정현에게서 김연아와 박태환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도 남의 나라 이야기였던 AFC U-23 챔피언십에서의 돌풍은 같은 느낌일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충격을 원한다. 익숙한 것에는 크게 감동하지 못한다. 월드컵 본선에만 나가도 환호했던 시절이 있지만 이제는 월드컵 본선에서 16강 정도는 가야 “잘했다”고 한다. 비꼬는 게 아니라 정현과 베트남 축구를 보니 정말 그렇다. 노력을 폄하할 생각도 없고 모든 선수들의 땀방울은 박수 받아야 하지만 체감상 ‘메달밭’ 쇼트트랙의 금메달과 아직은 경험이 없는 봅슬레이에서의 금메달은 느낌이 다르다. 아마 다른 어떤 나라에서는 봅슬레이의 금메달보다 쇼트트랙의 금메달이 훨씬 더 희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상해 본 적 없는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의 대활약을 보고 눈밭에서 베트남 선수들이 준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포츠가 주는 즐거운 충격을 오랜 만에 느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을 해본다. 이제는 어떤 종목에서 돌연변이 같은 선수가 나와야 김연아와 박태환, 정현 같은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 있을까. 순전히 재미로 생각해 보는 거다. 한국인이 도전하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워 보이는 남자 육상 100m와 NBA 선수 쯤은 나와야 또 다른 충격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현실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고 답하는 이들도 있을 테지만 한국 선수가 피겨스케이팅과 수영, 테니스에서 이런 활약을 하리라고 전혀 기대한 적도 없을 때도 있었는데 뭐 언젠가는 한 번 일어날 수도 있는 일 아닐까. 그리고 인프라가 부족한 한국 스포츠에서 이런 돌연변이 같은 선수들이 한 명씩 나와 그 종목의 인식을 완전히 바꿔 놓으며 발전시켰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앞으로 테니스 라켓을 들고 다니는 어린 친구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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