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대한축구협회는 2012년 1월1일부터 2019년 12월31일까지 8년간 나이키 코리아와 계약을 맺고 총 1천 200억 원(현금 600억 원 및 현물 600억 원)을 후원받기로 했다. 또한 최근에는 새로운 대표팀 유니폼을 선보이기도 했다. 페트병을 재활용한 폴리에스테르 소재로 제작해 무게가 종전보다 23% 가벼우면서도 체온 조절이 쉽도록 기능성이 강화된 혁신적인 유니폼이다.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입고 싶어하는 이 유니폼은 무척 과학적이다. 또한 가치도 엄청나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후원을 받고 기능성이 강화된 유니폼을 입게 된 것도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풍족한 때일수록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도록 더듬는 건 어떨까. 오늘은 불과 60여년 전 있었던 실화를 공개하려 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반세기전에 있었다는 건 놀랍다. 한 번쯤은 이 어려운 시절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풍족한 환경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과거 한국 축구 대표팀 유니폼과 단복의 슬픈 역사를 지금부터 소개하려고 한다.

하프타임에 뜨거운 물로 빨래를?

1954년 3월이었다. 2년 뒤 열릴 스위스월드컵 극동지역 예선전을 앞두고 있었다. 일본과 홈 앤드 어웨이로 경기를 치러야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일장기가 한반도에서 펄럭이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도 수립되기 전이었다. 정부에서는 경기 자체를 포기할 생각이었지만 축구인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홈 경기를 포기한 채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치르기로 합의했다. 당시 이유형 감독이 “일본에 지면 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고 한 발언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화제였다. 일본과의 1차전에서 5-1로 화끈한 역전승을 거둔 한국은 3월 14일 일본과 2차전을 치렀다.

쌀쌀한 날씨였다. 하지만 전반전 내내 죽기 살기로 뛴 한국은 하프타임에 라커룸에 들어와 기진맥진했다. 당시 유니폼 제작 기술로는 땀을 배출하는 게 쉽지 않아 몸은 녹초가 돼 있었다. 지금이야 하프타임을 이용해 새로운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면 그만이었지만 문제는 당시에 유니폼이 딱 한 벌뿐이라는 사실이었다. 하프타임을 이용해 냉방도 되지 않는 라커룸에서 작전 지시를 받기 위해 10여분 간 앉아 있던 선수들은 3월의 쌀쌀한 날씨 때문에 금방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유니폼이 한 벌뿐이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샤워장에 뜨거운 물이 나와. 우리 여기에서 유니폼 빨아 입자.” 한 선수가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뜨거운 물에 유니폼을 적시면 금방 체온을 회복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수들이 샤워장으로 달려가 유니폼을 뜨거운 물에 담근 뒤 다시 걸쳐 입었다. 추위에 떨었던 몸이 따뜻해졌다. “정말 대단한 방법이야.” 선수들은 아이디어를 낸 선수에게 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렇게 한국 선수들은 약 1분 동안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후반전 준비를 위해 그라운드에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의 온기가 지나간 뒤 살인적인 추위가 다시 찾아왔다. 유니폼의 뜨거운 물이 차갑게 변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추위를 맞게 된 것이었다. 젖은 유니폼을 달랑 하나만 입은 상태로 3월의 꽃샘추위를 온몸으로 느껴야했으니 오죽했을까. 전반전 내내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던 한국은 후반 들어 컨디션이 엉망이 됐다. 후반 막판 1-2로 뒤진 상황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기록하면서 2-2로 경기를 마친 한국은 1,2차전 합계 1승 1무로 결국 역사적인 월드컵 첫 본선 무대에 진출하게 됐지만 다시는 하프타임을 이용해 뜨거운 물로 유니폼을 빠는 일은 하지 않게 됐다.

“우리는 짧은 양복 바지가 유행이다”

일본을 제압하고 월드컵 본선을 확정지은 한국은 월드컵에 나서기 위해서 단복이 필요했다. 아무 옷이나 걸치고 월드컵 본선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막무가내로 일단 양복점에서 선수단복을 맞추기는 했지만 돈이 없어 단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출국에 앞서 대통령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 날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양복점에 가 사정을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돈을 내지 않으면 단복을 줄 수 없다.” 결국 협회 임원이 보증을 서고 나서야 가까스로 출국 직전 단복을 찾을 수가 있었다. 한국은 ‘외상 양복’을 입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사를 한 뒤 그렇게 스위스로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비행기 티켓이 없어 일본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여행 중인 영국인 신혼부부가 한국의 딱한 사정을 알고 티켓을 양보해 겨우 유럽으로 떠날 수가 있었다. 그 신혼부부는 이런 말을 했다. “비행기표가 없어 월드컵에 나서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우리게 티켓을 향보하겠다.” 한국은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서기 위해 일본을 거쳐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에 이르는 장거리 비행을 감수해야만 했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이탈리아에 도착하자 외신 기자들은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서게 된 한국을 무척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리고는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들 양복바지는 왜 그렇게 짧은가.”

그럴 만도 했다. 국내에서 처음 생산된 양복감은 질이 무척 좋지 않아 금방 밑단이 줄어 있었다. 또한 장기간 비행으로 구겨졌고 허벅지까지 양복이 말려 올라가 더 볼 품 없었다. 이탈리아 기자들은 한국 선수단의 모습을 보면서 킥킥 댔다. 그때 한 선수가 당당하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전쟁을 겪은 나라다. 물자를 절약하는 것이 애국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바지를 이렇게 짧게 하는 게 유행이다.” 이 내용은 이탈리아 현지 언론에 무척 크게 보도됐다. 밑단이 말려 올라가 짧아질 정도로 질이 좋지 않은 외상 양복을 입고 한국은 역사적인 월드컵 본선 무대에 처음으로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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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사상 첫 월드컵 본선 무대에 발을 내딛는 모습.

핑크색 유니폼 입은 태극전사

월드컵에서 헝가리와 터키에 각각 0-9, 0-7로 패한 한국은 석 달 뒤 홍콩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안컵에 참가했다.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했지만 월드컵 본선 무대 경험은 보약이 됐다. 대회 우승을 노리던 한국은 나름대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국내 기술로 제작된 붉은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이미 월드컵까지 경험했던 한국으로서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렇게 홈팀 홍콩과의 아시안컵 첫 경기가 시작됐다. 9월이었지만 홍콩은 무척 더웠다. 더군다나 홍콩전은 가장 더운 오후 두 시에 열려 한국으로서는 적지 않은 고생을 해야 했다.

제1회 아시아컵에서 첫 경기를 홈팀과 치르는 부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더운 날씨 때문이었을까. 한국은 예상과 달리 전반에만 홍콩에 두 골을 허용하며 0-2로 뒤지고 있었다. 하지만 후반이 시작되고 한국은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더위가 잦아들자 제대로 된 경기력을 보여준 것이었다. 한국은 후반에만 두 골을 뽑아내면서 홍콩과 극적인 2-2 무승부를 기록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만족할 만한 성과는 아니었지만 부담감을 안고 싸운 경기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무승부였다.

그런데 경기를 마친 선수들의 유니폼은 붉은색이 아니라 분홍색이었다. 그것도 얼룩덜룩한 흔적이 있었다. 비를 맞으면서 유니폼의 물이 빠졌기 때문이다. 졸지에 ‘붉은악마’는 ‘핑크악마’가 되고 말았다. 국산 유니폼의 재질이 워낙 좋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이 모습을 가슴 아프게 지켜본 한 교민은 자비를 털었다. 영국에서 만든 유니폼을 사다 선수단에 기증하기 위해서였다. 홍콩전에서 본의 아니게 핑크색 유니폼을 입어야 했던 한국은 기증받은 유니폼을 입고 진짜 붉은악마가 돼 남은 경기에서 승승장구하며 역사적인 제1회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불과 60여년 전에 우리 선배들이 겪은 실제 사건이다. 엄청난 홍보 효과로 입기만 해도 막대한 후원을 받을 수 있고 최첨단 소재로 제작돼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유니폼이 지금은 당연한 시대다. 하지만 우리의 선배들이 하프타임에 뜨거운 물에 유니폼을 빨아 입고 밑단이 말려 올라가는 외상 양복을 입고 물빠진 분홍색 유니폼을 입었던 시절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슬프고 아픈 역사가 있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