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회] 군대 두 번 간 차범근의 ‘서독 입성기’


차범근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도전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프랑크푸르트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 병역 혜택을 운운하는 경우가 많다. 잘 나가는 스포츠스타가 메달을 따 군대 문제를 해결하길 바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다 가야하는 군대를 피해야 선수로서의 성공도 보장되고 더 나아가 세계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병역 혜택을 받으면 금전적으로도 막대한 수입이 발생하기도 한다. 군대 때문에 선수 생활이 위기에 놓였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차범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없다. 군대를 두 번이나 가야했던 그의 복잡하고 특별한 뒷이야기를 공개한다.

차범근이 공군을 택한 이유
1970년대에는 지금과 같은 국군체육부대(상무)가 없었다. 각 군마다 독립적으로 체육부대를 운용하는 수준이었다. 공군 역시 축구와 야구, 탁구, 배드민턴 등의 운동부를 운영 중이었다. 하지만 공군 축구단의 선수층은 그리 두텁지 않았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육군 축구단으로 좋은 선수들이 몰렸고 전통의 강자였던 해병대 축구단이 이름만 바꾼 해군 축구단 역시 꾸준한 강호 역할을 했다. 1972년 뒤늦게 출발한 공군 축구단은 별로 인기가 없었다. 창단 멤버 역시 전원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선수들이었다.

고려대를 졸업한 차범근은 당시 서울신탁은행과 자동차보험의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렸다가 서울신탁은행 유니폼을 입게 됐다. 군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그는 해군 축구단에 입대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공군 축구단은 차범근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주영복 공군참모총장이 직접 나서 차범근 모시기 작전을 폈다. “공군 복무 기간이 35개월인데 제대를 6개월 앞당겨주겠다.” 차범근으로서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당시 공군 복무 기간은 36개월에서 법 개정으로 35개월이 된 상황이었다.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을 이수 받으면 군 생활 3개월을 단축한 주는 제도가 있었고 차범근은 고려대 체육학과를 졸업하면서 교련 이수 면제 혜택을 받은 대상이었다. 여기에 공군 측에서는 “공군으로 오면 의가사조항을 적용해주겠다”고 했다.

차범근은 결국 공군 입대를 택했다. 1976년 10월 1일에 공군에 입대했다. 원래는 1979년 8월 31일이 정식 전역일이었지만 교련 이수 면제 혜택과 의가사조항을 적용하면 1979년 1월에 제대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대한축구협회에서도 육군이나 해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력이 떨어지는 공군의 전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 차범근의 공군 입대를 반겼다. 이후 공군은 황재만과 김희태, 김희천, 장기문 등 좋은 선수들을 데려오면 성장해 나갔다. 차범근은 ‘성무’라는 애칭의 공군과 대표팀 1진 ‘화랑’에서 맹활약했다. 신분도 군인이었고 대표팀 위주로 활약하면서 사실상 국가의 몸이나 다름 없었다. 차범근은 제대일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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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서독 진출은 국부 유출 논란을 일으켰다.

박동희 교수에게 날아온 한 통의 편지
당시 차범근의 명성은 해외로도 알려지고 있었다. 남미를 포함한 7개 국가의 팀에서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78년 9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박스컵)에 초청받은 서독 프랑크푸르트 아마추어 팀 슐테 코치는 차범근의 플레이를 보고 반했다. 당장 그를 서독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이리저리 상황을 알아본 슐테 코치는 차범근이 현재 군 복무 중이고 1979년 1월이면 자유의 몸이 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는 스위스의 세계적인 운동구 브랜드인 반두스에 이 사실을 알렸다. “한국에 대단한 선수가 있다. 나는 이 선수가 서독에 오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선수에게 투자해 달라.” 반두스는 슐테 코치의 추천을 받아 차범근의 서독 진출을 돕기로 했다. 반두스는 운동구뿐 아니라 선수 스카우트도 전문적으로 하는 업체였다.

1978년 11월 슐테 코치 이름으로 건국대 박동희 교수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당시 박동희 교수는 대한축구협회 국제위원이었다. 박동희 교수는 편지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차범근의 서독 프로축구팀 입단에 대한 모든 책임을 반두스에서 지겠다. 차범근을 11월 말이나 늦어도 12월 초순까지 서독으로 보내달라.” 지금이야 유럽 빅리그 판도가 변했지만 당시 서독은 세계 최고 리그였고 누구나 한 번 서보고 싶은 무대였다. 서독에서 차범근에게 이런 제안을 해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처럼 에이전트를 통해 선수와 구단이 직접적으로 협상을 하는 게 아니라 차범근이 서독에 가 테스트를 받으면 원하는 팀이 나서 협상해 소속팀을 결정하는 시스템이었다. 차범근은 돈을 떠나 당장이라도 서독에 가고 싶었다. 한수 아래라고 평가받던 일본의 오쿠데라가 서독 쾰른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점도 차범근을 자극했다.

박동희 교수는 곧장 협회에 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협회는 부정적이었다. 지금이야 인재 육성을 이유로 큰 무대에서 도전하는 걸 장려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는 국부유출이었다. 해외 무대에 진출하면 그대로 이 선수와는 작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A매치 데이에 선수를 국가에 보내줘야 하는 의무 규정도 없었다. 차범근이 서독으로 날아가면 한국으로서는 그를 대표팀에서 활용할 방법도 없었고 국내 축구 시장의 흥행에도 문제가 생겼다. 협회는 슐테 코치의 편지에 무리해 보이는 답변을 보냈다. “3년 전 오쿠데라가 처음 서독에 건너갈 때 받은 월봉이 4천 달러였다. 차범근은 7천 달러는 받아야 한다. 그리고 차범근은 당신들이 말한 것처럼 12월초까지 서독에 갈 수 없다. 차범근은 그때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해야 한다. 정 차범근을 보고 싶으면 그때 방콕으로 와 플레이를 확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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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은 공군 축구단을 거쳐 다름슈타트로 팀을 옮겼다. ⓒ프랑크푸르트

차범근의 서독 진출은 국부 유출?
공군 역시 차범근의 해외 진출에 부정적이었다. 1월까지는 공군 소속으로 대표팀 경기가 아니면 해외에 나가는 것도 불허했다. 또한 이 문제에는 현대도 끼어 있었다. 당시 현대는 강만수를 중심으로 한 남자 배구팀을 창단하려다 실패한 뒤 축구팀 창단을 준비 중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현대 축구단 창단 자금으로 3억 원을 승인했는데 이 중 1억 원은 차범근 스카우트 비용이었다. 현대는 차범근이 입단해야 팀을 만들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당연히 협회에서는 차범근이 서독으로 진출하는 것보다는 국내에 남아 팀 창단을 유도하고 흥행몰이도 하면서 대표팀에 도움을 주길 바랐다. 에이전트 개념이 없던 당시 차범근의 거취 결정권은 박재홍 동양철관 대표이사가 사실상 가지고 있었다. 박재홍 대표이사는 차범근이 군에 입대하자 생활비를 보태줬고 포항제철과도 교섭해 군대에 있는 동안 5백여 만원의 급료를 받게 해준 인물이었다.

당시 대한축구협회 박준홍 회장은 박재홍의 사촌형이었다. 박준홍 회장은 차범근과 포항제철의 관계도 있고 현대가 차범근을 우대할 계획이니 차범근을 국내에 머물게 해달라고 박재홍 대표에게 요청했다. 차범근은 그렇게 창단을 준비 중인 현대로 가는 게 정설처럼 굳어졌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투자를 약속한 반두스와 슐튼 코치의 등장은 반전의 계기가 됐다. 차범근은 서독으로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협회는 당장 방콕 아시안게임이 중요했다. 북한과의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 우월성을 과시하고 싶었다. 여기에 공군은 물론 대한체육회도 차범근의 서독 출국 불가 결정을 내렸다. 현대는 현대대로 “차범근을 주지 않으면 팀 창단을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협회는 차범근의 서독행에 난색을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협회는 “차범근이 없으면 축구 열기가 식을 것이다. 거기다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바라보고 있는 현시점에서 차범근 없이 뛴다는 것은 불안하다. 김재한도 뛸 수 없는 상황에서 만일 지게 되면 그땐 또 잘못 보냈다고 후회할 것이고 한국 축구는 국제무대에서 알려질 만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계약에 본국 복귀 출전 조항을 넣을 수도 있겠지만 들어줄지 의문이고 또 한 나라의 운명이 걸린 빅게임의 중요 포지션을 외국에서 바로 온 선수에게 맡길 수는 없다. 어느 정도 팀플레이의 연습기간이 필요하다.” 한 언론에서는 사설에 이렇게 쓰기도 했다. “꼬마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상을 잃게 된 그들은 외국의 직업축구에 차 선수를 뺏긴다고 서운해 하지는 않을 것인가. 마치 그들의 영웅이 팔려 가는 듯한 상실감에 허전해 하지는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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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새빨간 거짓말.

‘인생역전’ 사흘 만에 이뤄진 계약
점점 슐테 코치가 이야기한 기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반두스와 슐테 코치 측은 1979년 12월 31일까지 선수 등록을 해야 남은 시즌 경기에 나설 수 있다면서 12월 초순까지는 차범근을 보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협회는 아시안게임이 끝나는 20일 이후 차범근을 서독에 보내줄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고 만약 서독 팀과 계약하면 월드컵 때는 귀국해 한국 선수로 뛸 수 있게 하고 소속팀은 1년에 한 번씩 방한해 친선경기를 치러줄 것을 반두스 측에 요구했다. 그나마 방콕 아시안게임만 뛰고 필리핀에서 열리는 아시안컵 명단에서는 제외하고 서독 팀 테스트를 받게 해준 게 배려라면 배려였다. 지금이라면 황당할 일이겠지만 차범근은 서독으로 가기 위해 문교부와 대한체육회의 동의를 받고 군인 신분으로 공군에서 해외 출장 허가서를 받았다. 군 복무 기간을 다 마친 뒤 특별 휴가를 받아 서독으로 떠나는 형식이었다.

1978년 12월 20일 차범근은 방콕에서 북한과의 경기를 치른 뒤 방콕 서독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았다. 그리고 23일 루프트한자 비행기편으로 프랑크푸르트로 출발했다. 12월 31일까지 어떤 팀이건 입단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 하는 촉박한 일정이었다. 물론 이때까지도 특정된 팀은 없었다. 그런데 서독에 간지 사흘 만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아직 시차 적응도 되지 않은 1978년 12월 26일 오전 10시부터 딱 30분 동안 공개 훈련을 지켜본 다름슈타트 측이 바로 계약을 제안한 것이었다. 경기 출장 수당은 5백 마르크(한화 약 13만 원)를 받기로 했고 바두스로부터도 정식 입단 때까지 월 4천 마르크(한화 약 140만 원)을 받는 가계약이었다. 연말까지 두 경기에서 주전으로 뛰기로 약속까지 받아냈다. 명백히 따지면 아직 공군 소속이지만 다음 달이면 제대를 하게 돼 계약에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차범근은 다름슈타트와 이렇게 6개월짜리 가계약을 맺었다. 가계약이 풀린 이후부터는 2년짜리 계약을 맺을 수 있는데 다름슈타트에 묶여 있지 않고 더 큰 팀으로 가기 위해 가계약을 선택한 것이었다. 차범근은 “6개월 동안 실력을 보여줘 상위팀으로 진출하겠다. 지금은 테스트 기간이나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다름슈타트 측에서는 차범근의 아내 오은미 씨와 딸 하나 양에게 서독 초청장을 보냈다. 군 생활과 합숙 훈련으로 줄곧 떨어져 지내야 했던 아내는 서독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자 “이제야 결혼생활을 하게 될 것 같다”고 웃었다. 그리고 차범근은 가계약서에 서명한 뒤 곧바로 경기 출장을 준비했다. 26일에 계약하고 30일에 열리는 보훔과의 경기에 곧바로 출장했다. 불과 열흘 전만 하더라도 태국 방콕에서 아시안게임에 출장했던 동양의 이름 모를 선수가 열흘 사이에 세계 최고 선수들이 뛴다는 분데스리가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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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프랑크푸르트

‘아시안 카이저’의 놀라운 데뷔전
1978년 12월 30일. 분데스리가 꼴찌였던 다름슈타트는 11위 보훔을 맞이했다. 차범근의 데뷔전을 지켜보기 위해 무려 300여 명의 교민이 경기장을 찾았다. 그런데 이날 차범근의 플레이는 놀라웠다. 무려 두 골을 도우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다. 꼴찌팀의 충격적인 승리였다. 경기가 끝나자 경기장 여기저기에서 “차. 차. 차”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독 언론 ‘빌트’는 차범근에 대해 ‘다름슈타트의 비밀무기, 한국의 베켄바우어, 아시아의 가장 훌륭한 공격수’라는 극찬을 보냈다. 한 서독 텔레비전은 차범근의 특잡방송을 15분 동안 내보내기도 했다. 물론 한국에서는 차범근의 서독 진출 소식만을 알았을 뿐 이런 사실은 뒤늦게 전해졌다. 경기 이틀 뒤 업무차 한국에 온 서독 교민이 언론에 전하며 이 소식은 세상에 알려졌다.

차범근이 엄청난 데뷔전을 치르자 다른 분데스리가 팀들이 차범근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6개월 뒤면 다름슈타트와의 가계약이 끝난다는 소식에 차범근을 모시기 위한 전쟁이 시작됐다. 특히나 당시 리그 2위인 함부르크와 6위인 프랑크푸르트가 적극적이었다. 함부르크 네처 감독은 1월 13일 열릴 다름슈타트와 헤르타베를린전을 관전하기로 일찌감치 계획을 잡았다. 처음 차범근을 서독에 소개했던 프랑크푸르트 슐테 코치는 서울로 전화를 걸어 관계자들에게 프랑크푸르트 입단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가계약 조건상 차범근과 계약을 맺으면 자기팀 선수 한 명을 다름슈타트로 보내야 하지만 이들은 차범근을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꿈 같은 데뷔전을 치른 차범근은 해가 바뀐 1979년 1월 5일 잠시 귀국했다. 한국에서 밀린 일을 처리하고 서독에 정착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단수 여권도 갱신해야 했다.

구단에서도 오쿠데라가 속한 쾰른과의 경기가 중요하니 몸 상태를 철저히 준비해 돌아오라고 했다. 1월 20일 벌어지는 다름슈타트와 쾰른의 경기는 모든 이들이 주목하는 빅매치였다. 팬들은 벌써부터 ‘아시안 카이저(황제) 차범근’ ‘아시안 쾨니히(왕) 오쿠데라’라는 걸개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이는 ‘서독의 축구 황제’ 베켄바우어와 ‘서독 축구의 왕’ 뮐러를 본 딴 것이었다. 하지만 차범근은 다시 서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잠깐의 귀국이 오랜 시간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길로 접어들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부에서 차범근의 신분과 복무기간을 문제 삼은 것이다. 공군의 복무 기간은 35개월인데 차범근은 1979년 8월 31일까지 군인신분이라는 주장이었다. 교련 이수 면제 혜택 3개월을 반영해도 제대일은 5월 31일이라는 것이었다.

분데스리가에서 다시 군대로 돌아간 차범근
차범근은 약속을 떠올렸다. 처음 공군에 입대할 당시 군 복무 기간 감축을 제안했던 이들을 찾았다. 그런데 의가사조항 적용을 배려해 주겠다고 구두 약속을 했던 실무자는 그 사이 사망하고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약속을 지켜달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국방부에서는 “아무리 우수선수라도 전례가 되기 때문에 특혜를 줄 수 없다”고 했고 박준홍 대한축구협회장도 “현재로서 군 문제는 군 당국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잠깐 밀린 일을 처리하고 서독으로 돌아가려던 차범근은 한국에 돌아와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차범근은 김포공항에서 곧바로 공군으로 직행해 남은 군 복무에 들어갔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뛰었던 그가 하루아침에 다시 군인이 된 것이다. 그에게는 꿈만 같은 12일이었다.

서독에서는 곧바로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빌트’는 “엄격한 한국, 차범근은 군대로 돌아갔다”고 썼다. ‘빌트’는 “차범근은 군 복무를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의 요청에 따라 군대로 돌아가야 한다. 가능하다면 빨리 서독으로 건너와 ‘차차차붐’을 일으켜 주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문교부와 대한체육회에 “정식 제대일자 이전에 출국할 수 있도록 병역 복무 기간 단축의 특별배려를 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러자 서독 이창희 대사는 국방부와 외무부에 긴급 협조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차범근이 군 문제로 빠른 시일 내에 서독으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 한국 축구의 이미지가 손상될 걱정이 있다. 또한 한국이라는 나라의 신뢰도 대단히 떨어질 것이다.” 문교부 장관과 대한체육회장 및 각 언론기관에는 차범근을 다시 서독으로 보내달라는 편지가 쇄도했다. 이들 중에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예외 없이 병역을 적용해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지만 사실 백인천의 사례를 보면 차범근도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1962년 일본으로 건너가 2년 뒤 귀국해 병역 의무를 다하기로 했던 야구선수 백인천은 9년이 지난 1971년에야 귀국했다. 그리고 군사 훈련을 받은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주일 대한국대사관 무관부 근무라는 편법을 적용한 것이었다. 중앙정보부 정보원 신분 특수요원으로 군 복무 기간을 채울 수 있게 했고 그 기간 동안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다. 바둑 기사 조치훈 역시 6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무학’으로 병역 면제를 받았지만 실제는 정권의 배려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치훈은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해 무학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교부에서는 “현재 병역 질서는 당시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고 전하며 차범근에게는 예외를 두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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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은 ‘아시안 카이저’라는 별칭을 얻었다.

‘차붐’을 그리워 하는 서독, 꼬여만 가는 일
지금이야 올림픽에서 3위 이내에 입상하거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면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이 법은 1992년이 되어서야 생겨났다. 이전까지는 체육인, 예술인, 기능인에 대한 병역 혜택은 병역 혜택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통해 이뤄졌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양정모만이 그 혜택을 받을 뿐이었다. 다름슈타트 측은 “차범근에게 계약 위반에 따른 벌금을 물릴 생각은 없다. 다만 차범근이 다시 돌아와 함부르크나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할 경우에만 벌금을 고려하고 있다. 어떻게든 빨리 다름슈타트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 와중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한 서독 축구팬은 동양인을 보고 착각해 “차범근이 공항에 도착했다”고 언론사에 제보하는 바람에 10여 개의 언론 매체 보도진과 분데스리가 관계자들이 공항에 몰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차범근의 서독 진출을 지원했던 박준홍 대한축구협회장이 돌연 사퇴한 것도 악재였다. 32세로 역대 최연소 회장을 지낸 박준홍 회장은 1978년 한해 협회가 진 7,600만 원의 빚을 갚지 못했고 결국 돌연 사퇴를 선언했다. 호텔과 병원, 체육사 등 무려 28개 업소에 협회의 빚이 있었다. 박준홍 회장은 5개월 17일이라는 최단명 회장으로 역사에 남았다. 이 기간 동안 무려 2,500만 원의 사재를 털었지만 결국 협회의 빚이 더 늘어나자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협회가 어수선해지면서 차범근을 돕기 위한 손길도 줄어갔다. 서독 축구계 일부에서는 “차범근이 다름슈타트를 이용해 선만 보이고 만 건 일종의 사기 행위”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다름슈타트 구단에도 팬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바두스 측에서는 “차범근이 엄연한 다름슈타트 선수이므로 어떤 국내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공문을 협회에 보내기도 했다. 이를 어기면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 따라 처벌 받고 선수 자격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공군 측에서는 1979년 3월 7일부터 효창운동장에서 열리는 군,실업 축구연맹전에 차범근을 출전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서독 하원도 움직였다. 하원부의장인 헤르만 슈미트 코벤하우젠 의원은 한국 국방부와 문교부에 서한을 발송해 “발리 차범근을 서독으로 돌려보내달라”고 했다. 프랑크푸르트 방송사에서는 KBS에 차범근 국내 녹화 필름을 요구하기도 했다. 차범근이 서독에서 뛴 경기는 딱 한 번 뿐이지만 서독은 차범근에 매료돼 있었다. 대한민국 군인 한 명 때문에 서독은 난리가 나 있는 상태였다.

3년 5개월 채우고 만기 제대한 차범근
공군 측에서 계속 차범근의 경기 출장을 준비하자 서독축구연맹이 주한서독대사관을 통해 협조 전문을 다시 보냈다. 국내 대회 출전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방관하던 협회는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협회가 1978년 12월 9일자로 발급한 이적허가 증명서에는 ‘본협회는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와 계약을 체결하는 것을 허가함’이라고 명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협회가 이적을 허가한 상황에서 국내 대회 출전을 방관한다면 문제는 커질 게 분명했다. 협회는 1979년 2월 15일 제2차 이사회를 열고 차범근의 국내 경기 출전을 금지시켰다. 이에 대해 언론에서는 자극적인 보도로 여론을 흔들었다. “차범근은 이제 대한축구협회 선수가 아니라 서독 선수다.” 상황을 잘 모르는 이들은 이제 차범근이 한국을 버리고 서독을 택한 것이라고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차범근은 이 기간 동안 공군에서 복무하며 훈련에만 매달렸다. 경기에도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훈련 뿐이었다. 머리 속에는 보훔과의 데뷔전에서 두 골에 결정적으로 관여하며 팬들의 박수를 받던 기억이 계속 떠올랐다. 하지만 현실은 군인이었다. 차범근은 당시를 “너무나도 괴롭고 무거운 하루하루였다”고 회상했다. 서독 프로축구의 높은 수준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깊은 태클과 거칠고 빠른 경기를 경험한 그는 군대에서 높은 시멘트 블록을 뛰어 넘으며 재기를 준비했다. 순발력을 키우기 위해 남들은 축구공을 뛰어 넘는 훈련을 할 때 차범근은 이렇게 하루에 1천 번 넘게 시멘트 블록을 뛰어 넘었다. 다시 군대에 돌아온 차범근은 이렇게 5개월 동안 복귀를 위해 이를 갈았다. 이 시기에 뉴욕 교민회에서는 박동희 교수에게 “차범근을 북미 명문 코스모스에 입단시키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5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1979년 5월 31일 차범근은 남은 군 복무 기간을 모두 마치고 제대할 수 있었다. 차범근의 제대를 손꼽아 기다리던 분데스리가에서는 곧바로 차범근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다름슈타트는 그 사이 2부리그로 떨어져 차범근을 잡기가 어려운 상황이었고 부리그 18개 팀 중 무려 7개 팀이 차범근 스카우트에 나섰다. 박동희 교수는 서독 측과 통화를 하며 새로운 팀을 알아보느라 한 달 국제 전화비가 40만 원씩 나오기도 했다. 월급을 가불해 전화비를 내면서까지 차범근을 도왔다. 차범근은 1979년 6월 17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고연전 OB올스타전에 고려대 현역 올스타 멤버로 나서 국내 팬들에게 고별 인사를 했다. 차범근을 보기 위해 무려 3만 5천여 명의 관중이 경기장에 꽉 들어찼다. 경기 종료 후 차범근이 손을 흔들며 운동장을 돌자 관중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이번에는 서독에 가서 오래 오래 잘 하고 오라”는 응원 목소리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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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은 돌고 돌아 다시 분데스리가에 입성할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차범근, 다시 서독으로 날아가다
차범근은 서독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서독에서 단 한 경기만을 뛴 선수였고 현 소속팀도 없는 선수였지만 차범근이 ‘갑’이었고 분데스리가 구단들이 ‘을’이었다. 차범근이 좋은 조건을 제시한 구단을 선택하면 될 일이었다. 차범근은 “국가가 부른다면 언제 어느 곳에서도 달려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1979년 6월 22일 서독으로 향했다. 바두스 서독지점장과 서독교민회 여우종 회장과 함께 팀을 선택하기로 했다. 여우종 회장은 포항제철 조윤옥 코치와 경남버스 장원직 코치, 한국전력 유현철 코치, 대표팀 최은택 감독 등의 서독 유학을 주선한 인물이었다. 차범근이 다시 서독으로 돌아오게 되자 후원회를 조직해 차범근을 도왔다. 에이전트가 없던 당시 에이전트 겸 매니저 역할을 도맡아 했던 인물이다.

민간인이 된 그에게 서독에서 2년 5개월 12일간 머무를 수 있는 여권이 나왔다. 만료 기한은 1981년 12월 31일까지였다. 12일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던 때와는 달랐다. 차범근이 서독으로 떠나던 날 공항에는 박준홍 전협회장을 비롯해 박동희 교수와 가족, 김재한, 박성화, 조광래, 김호곤 등 동료들이 배웅을 나왔다. 하지만 협회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서독에 도착하자 슈투트가르트가 가장 먼저 차범근에게 구애를 보냈다. 다름슈타트에 있을 당시 지도자였던 부흐만 감독이 슈투트가르트에 부임하면서 차범근을 탐낸 것이다. 당시 슈투트가르트는 이전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함부르크에 이어 2위에 오른 강팀이었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슐테 코치와의 인연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 무렵 바두스가 박동희 교수에게 “이제 차범근과의 사이는 정리하겠다”고 하자 슐테 코치는 박동희 교수를 향해 “아무 걱정 말고 차범근을 나에게 보내라”고 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슐테 코치가 있는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것도 차범근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프랑크푸르트는 전년도 5위를 차지한 팀이었다. 하지만 브레멘도 차범근에게 반하고 말았다. 1979년 7월 11일 차범근이 브레멘 훈련장에서 테스트 경기를 치른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무려 300여 명이 훈련장에 모일 만큼 열기는 뜨거웠다. 그런데 이 연습 경기에서 차범근의 플레이를 본 이들은 경악했다. 한 경기에서 차범근이 무려 네 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브레멘은 모든 영입 협상을 중단하고 차범근에게 매달리기로 했다. 한 매체에서는 ‘다름슈타트의 잃어버린 아들 차범근이 다시 서독에 왔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차범근은 재독한인축구협회 김성주 이사집에 머물면서 훈련에 전념했다.

돌고 돌아 분데스리가에 서다
차범근이 브레멘에서 네 골을 넣던 날 프랑크푸르트도 간부 회의을 통해 만장일치로 차범근의 스카우트를 결정했다. 그런데 하루 뒤인 1979년 7월 12일 브레멘이 거절할 수 없는 좋은 조건으로 차범근에게 계약을 제안했다. 이때 프랑크푸르트 슐테 코치가 여우종 서독교민회장에게 급하게 연락을 해왔다. “아직 그 팀과 계약을 하지 말아달라. 우리 팀에 보강해야 할 윙 포지션이 하나 비어있는데 차범근이 적격이다.”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의 정신 제안을 받고 1979년 7월 15일 테스트에 임했다. 이 소식을 접한 100여 명의 교민이 훈련장을 찾았다. 자체 경기를 펼쳤는데 차범근은 이날 두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2-1 승리로 이끌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역대 외국인 선수 최고 대우를 해주겠다고 했다.

브레멘에서도 “원하는 조건을 이야기하면 다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여우종 회장과 박동희 교수는 차범근에게 프랑크푸르트를 선택하자고 했다. “아무리 돈이 중요한 프로 세계지만 슐테 코치가 처음 차범근의 자질을 인정해 프로팀 입단을 권유한 만큼 슐테 코치와 함께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독 전체가 관심을 갖던 차범근의 선택은 프랑크푸르트였다. 1981년 7월 15일까지 연봉 24만 마르크와 경기 수당 5~6만 마르크를 포함해 총 30만 마르크(한화 약 8천 8백만 원)를 받는 계약이었다. 프랑크푸르트가 차범근 영입을 위해 다름슈타트에 20만 마르크(한화 약 6천만 원)를 지불했다는 설도 있다. 그렇게 차범근은 돌고 돌아 다시 분데스리가 무대에 설 수 있었다.

1979년 8월 차범근을 성공적으로 서독에 보낸 박동희 교수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차범근의 아내 오은미 씨였다. 그리고는 증서 하나를 박동희 교수에게 내밀었다. 박동희 교수는 이 증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빠가 전해드리는 것이니 꼭 받아주세요.” 남편을 ‘아빠’라고 표현하는 오은미 씨가 웃었다. 이 증서는 포니 승용차 양도 증서였다. 월급을 가불해가며 국제전화비를 내면서까지 서독 입단을 도왔던 박동희 교수에게 차범근이 보낸 선물이었다. 매일 박동희 교수가 화곡동 자택에서 워커힐까지 출근에만 버스로 한 시간 반이 걸린다는 걸 잘 알고 있던 차범근이 보낸 고마움의 표시였다. 또한 차범근은 서독으로 떠나면서 비게 된 이촌동 아파트를 4년간 기독교 청소년 전도회에 무료로 빌려줬고 6개월간 타던 포니 승용차도 모교회에 전달했다. 어렵게 어렵게 다시 서독으로 날아간 차범근은 이렇게 도움을 준 이들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차범근

그렇게 시작된 ‘차붐의 전설’
그리고 1979년 8월 11일 차범근은 등번호 11번을 달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선발 출장한 그는 이때부터 전설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가 공을 잡을 때마다 “차붐”을 외쳤다. 우여곡절 끝에 두 번에 걸쳐 3년 5개월간 군 복무를 마친 그는 이렇게 전설이 됐다. 차범근은 이듬해 곧바로 팀을 UEFA컵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고 1981년에는 팀이 DFB-포칼 우승컵을 드는데 공헌했다. 1983년 7월에는 분데스리가 레버쿠젠으로 이적해 1988년에 다시 한 번 UEFA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운동선수들에게 군대는 크나큰 숙제다. 최대한 피하려는 생각이 강하다. 하지만 차범근을 보면 군대 문제는 핑계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 밟아보기도 어렵다는 무대에 선 뒤 다시 군대로 돌아가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던 차범근도 있는데 이보다 더한 악조건이 있을까. 병역 혜택에 목을 매는 풍토가 차범근의 사례를 보면서 조금은 개선되길 바란다. 이렇게 군대에 두 번 다녀오고도 전설을 쓸 사람은 다 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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