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성 코치는 메시와 어린 시절 함께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리오넬 메시는 축구계에서 신 같은 존재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전세계에 전해진다.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다. 하지만 그와 어린 시절 스페인에서 함께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던 한국인이 있다. 바로 홍명보축구교실 U-15팀의 정인성 코치다. 속된 말로 ‘메시 친구 걔’다. 그에게 메시가 어떤 친구였는지 가볍게 물었다. 하지만 가볍게 시작된 이야기는 메시 같은 선수를 꿈꾸며 도전하는 이들에게 던지는 무거운 메시지로 끝이 났다. 세계 최고의 축구천재 메시와 관한 가벼운 뒷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축구선수를 꿈꾸는 어린 친구들과 이들의 부모님이라면 특히 그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인성 코치를 직접 만났다.

반갑다. 자기 소개를 부탁한다.

서초동 홍명보축구교실 중학교팀 코치로 일하고 있는 정인성이다. 2002년 8월에 스페인으로 축구 유학을 떠났다가 거기에서 11년을 보냈다. 선수로 뛰다가 은퇴한 뒤 스페인에서 직장 생활까지 했다. 아마 내가 스페인 유학 1세대일 거다. 2012년 11월에 다시 한국에 정착해 홍명보축구교실에 오기 전까지 쭉 스페인에 있었다.

어린 나이에 스페인으로 축구 유학을 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축구를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에 소질이 있어 축구부 가입을 권유 받았지만 아버지께서는 공부를 하는 게 좋겠다며 반대하셨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때 정식으로 축구부에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는데 나는 무척 늦은 시기였다. 하지만 이제 막 정식으로 축구를 배우던 때에 3학년 형들을 제치고 경기에 나갔다. 그러다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계시는 아버지 지인 분으로부터 “아들이 이왕 축구하는 거 스페인에서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해외 유학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다.

물론이다. 당시 아버지께서도 스페인까지 가서 축구를 배울 거면 일반 팀에는 들어가지 않게 하고 싶으셨단다. 그래서 알아본 곳이 바르셀로나 올림픽 선수촌 안에 있는 ‘따르(TARR)’라는 팀이었다. 원래는 유럽인들만 진학할 수 있는 유학 프로그램이라 나는 동양인이라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내 경기 영상을 직접 그곳 디렉터한테 보여주고 입단 허락을 받았다. 아버지께서 에이전트 역할을 하신 거다. 그렇다고 바로 스페인으로 날아간 건 아니고 한국에서 한 3개월 정도 진지하게 아버지와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께서는 “만 18세가 되면 너에 대한 모든 지원을 끊을 거다. 그래도 자신이 있다면 스페인으로 가라”고 하셨다.

스페인에 가 성공할 자신이 있었나.

나도 고민이 많았다. 어린 나이에 많은 걸 포기해야 하는 결정이었다.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하나도 몰랐다. 당시 학교 숙소에서는 오래된 1998년 프랑스월드컵 영상을 틀어줄 때였다. 스페인은 알았어도 바르셀로나가 어떤 팀이고 레알마드리드는 어떤 팀인지도 자세히 몰랐다. 하지만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에 스페인으로 가게 됐다.

정인성 코치의 스페인 유학 시절 모습.

곧바로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에 입단한 건가.

아니다. 바르셀로나 도시 안에 있는 아까 말한 ‘따르’라는 팀에 들어갔다. 거기는 몇 명의 바르셀로나 출신 선수들이 세운 팀이었다. 그 중 한 명이 메시와 유소년 시절 휴지에 바르셀로나와의 계약서를 작성했던 카를레스 렉샤흐 바르셀로나 기술 이사였다. 이 분들이 오셔서 훈련하는 모습도 지켜보고 그랬는데 그 팀에 들어가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첫 시즌에 내가 골을 많이 넣었다.

그래서 당신도 휴지에 바르셀로나 계약을 하게 된 건가.

당시에는 SNS가 발달되지 않았고 인터넷도 지금처럼 활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소문으로 ‘어디에 가면 동양인 누가 있는데 잘 한다더라’는 이야기가 돌 때였다. 여기저기에서 소문을 듣고 선수를 찾는 시스템이었다. 한 시즌을 마치고 한국에서 잠깐 쉬고 있는데 스페인 따르 팀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바르셀로나에서 너를 테스트하고 싶다고 공문이 왔는데 빨리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우리 팀 선수 넷이서 바르셀로나 테스트에 참여하게 됐다. 그때가 한국 나이로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바르셀로나 테스트는 뭔가 다르던가.

테스트 자체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같이 훈련을 하는 정도였는데 서바이벌 같았다. 처음에는 서른 명이 훈련을 시작했는데 그 다음 날 보면 ‘어? 오늘은 누가 안 나왔네’ 이런 식이었다. 그렇게 한두 명씩 사라지는데도 나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따르에서 네 명이 테스트를 받으러 가 나를 포함해 두 명만 계약했다.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을 보면 후베닐A, 후베닐B, 후베닐C 등 다양한 팀이 있다. 당신은 어디에 속한 건가.

나는 후베닐B와 A를 왔다 갔다 했다. 주로 후베닐B에 있다가 가끔씩 후베닐A로 올라가는 정도였다. 하지만 주로 벤치에 있었고 벤치에 앉지 못하고 관중석에서 경기를 볼 때도 있었다. 확실히 기량 차이가 느껴졌다. 그런데 반대로 후베닐A에 주로 머물다가 가끔 후베닐B로 내려오는 선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선수가 말도 안 되게 잘하는 거다. 나랑 동갑이었다. 이름을 물어보니 ‘리오넬 메시’라고 했다.

메시를 친구로 두다니…. 놀랍다. 당시 메시와 함께 훈련했던 느낌이 궁금하다.

파울을 하지 않고서는 끊어낼 수 없는 선수였다. 공이 발에 붙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같이 훈련을 하면서도 ‘쟤는 정말 뭐지?’ 싶었다. 한국에서 축구를 할 때도 잘하는 왼발잡이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 친구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친구였다. 아마 내가 다른 팀에 속했었으면 나를 벤치에 앉히고 경기에 내보내지 않아 감독에게 따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메시와 훈련을 같이 해보고는 ‘저 친구가 당연히 주전으로 뛰어야 된다’고 나도 모르게 바로 인정해 버렸다.

메시와 친했나.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 아닌가.

인터넷을 보면 내가 메시와 룸메이트였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그건 와전된 이야기다. 룸메이트는 아니었다. 그래도 같이 훈련하고 밥 먹고 단체 생활을 했다. 이렇게 엄청난 선수가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조금 더 친해질 걸 후회가 되기도 한다.

당시 ‘어린 메시’는 어떤 선수였나.

되게 조용했다. 잘 웃지도 않고 늘 조용했던 친구였다. 그리고 메시는 바르셀로나 구단에서 확실히 관리하는 선수였다. 약간 외부와의 차단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 선수가 엄청나게 성장할 걸 잘 알았기 때문에 구단에서는 언론이나 에이전트, 다른 구단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나도 어리바리한 상태여서 메시에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국에 있다가 1년 만에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으로 왔으니 훈련에만 열중하기에도 부족했다.

정인성 코치의 스페인 유학 시절 모습.

그래도 지금이라면 ‘바르셀로나 후베닐A에서 뛰고 있는 한국인 축구 천재’라고 인터넷과 SNS를 달궜을 것 같다.

그랬을 수도 있다. 이승우와 백승호, 장결희가 실력이 뛰어나도 SNS와 인터넷의 효과를 못 봤다고는 할 수 없을 테니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후 다시 메시를 만난 적은 없나.

2010년에 다시 만났다. 당시 스페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건너 건너 KBS에서 연락이 왔다. 월드컵을 앞두고 메시 단독 인터뷰를 하는데 도와달라고 했다. 그때 일본의 한 방송사에서는 메시 단독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바르셀로나에서 한 달 반을 머물러 있었다. 스케줄을 조정해야 했고 여러 상황을 따져야 했기 때문이다. 메시 측에서는 질문 한 개 당 비용으로 2천만 원을 받는다고 했다. 선수는 인터뷰에만 응할 뿐이지만 인터뷰가 진행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승인을 받아야 할 곳이 많지 않은가. 그런데 KBS는 불과 2~3일 기다려 돈 들이지 않고 메시와 단독 인터뷰를 해 질문을 5~6개나 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나.

내가 구단 미디어 담당관에게 부탁해 메시에게 따로 이야기를 했다. 구단에서도 “너와 같이 축구했던 친구가 단독 인터뷰를 하고 싶어하는데 해줄 수 있느냐”고 한 모양이다. 그래서 훈련하다가 잠깐 시간을 내 운동장에서 의자 두 개 놓고 후딱 인터뷰를 했다. 일본 방송사는 한 달 반을 기다렸는데 그렇게 우리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오랜 만에 만나 메시에게 “잘 지냈어?”라며 악수하고 인사했다. 시간이 흘러 슈퍼스타가 된 모습을 보니 만남 자체가 좋았다. 원래는 질문을 3개만 하기로 했는데 분위기도 좋아 질문을 더했다. 물론 내가 그 인터뷰를 연결하며 따로 챙긴 돈은 없다. 나는 부탁을 받고 도와준 것 뿐이다.

메시와 오랜 만에 만나 악수를 하는데 메시도 당신을 기억하던가.

기억하고 있었다고 믿고 싶다. 아마 그럴 것이다.

메시는 우리 인터뷰를 못 볼 테니 그렇다고 하자. 그렇다면 스페인 유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언제였나.

언어와 인종차별이 가장 힘들었다. 더군다나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이 스페인을 이기고 난 직후에 스페인으로 가게된 거라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아는 친구들과는 매일 전쟁이었다. 그 친구들이 훈련이 끝나면 땀에 젖은 스타킹을 벗어 내 얼굴에 던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친구들은 장난으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어린 나이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경기장에서 나에게 패스하지 않는 건 예삿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 같다.

아버지께서 용돈을 보내주시면 나는 한달치 용돈을 현금으로 인출했다. 숙소와 은행이 너무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동료들과 피자를 시켜 먹었는데 워낙 잘 먹을 때라 1인당 피자 한 판씩은 먹어치웠던 것 같다. 피자 값만 해도 한 번에 30~40만 원이 나왔다. 그러면 그 친구들이 “네가 먼저 계산하면 나중에 돈을 주겠다”고 해놓고 안 주는 거다. 언어가 안 되니 돈 달라는 소리도 잘 못했다. 그래서 피자 값을 받아내려고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다. “돈 달라”고 하니 또 무슨 말을 막 하는데 못 알아들으면 거기에 받아칠 수 있는 스페인어를 또 공부했다. 사전을 보고 단어를 외우고 책으로도 공부했다. 그래서 결국엔 피자 값에 이자까지 다 받아냈다.

언어 문제를 좀 해결하니 낫던가.

물론이다. 그 친구들이 나에게 “야 중국인”이라고 하면 나는 ‘한국 사람인데 왜 나한테 중국인이라고 하는 거야?’라며 1차원적으로 반응했다. 그런데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나니 달랐다. 이 친구들한테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생소했고 스페인에 중국 사람이 워낙 많으니 아시아인은 다 중국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고 대화하면서 더 친해졌다.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스페인 친구들이 많다.

정인성 코치의 스페인 유학 시절 모습.

바르셀로나에서 실력도 많이 키웠나.

경기에 잘 나가지 못했다. 구단에서는 나를 지켜보고 “주전으로 뛰지 못하니 다른 팀 이적을 알아보라”고 했다. 바르셀로나 전단장이 산 안드레우라는 팀을 인수했는데 그 팀으로 가길 바랐다. 지금은 2부 B에 있는 팀이다. 그래서 경기에 나가고 싶어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을 나와 산 안드레우로 갔다. 잘해서 다시 올라가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가장 아쉬웠던 게 바로 이때의 선택이다. 옮기지 말고 바르셀로나에서 버텼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런데 나에게는 진로 선택에 대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게 2004년~2005년 일이었다.

산 안드레우로 가서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했나.

그 시점에 우리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졌다. 내가 장남인데 스페인에서 더 축구를 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산 안드레우 구단에 “나 이제는 팀에 못 나온다. 집에 일이 있어서 가야한다”고 하고 나와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버지께 “한국에서 축구하겠다”고 했고 아버지는 “그래도 스페인에 끝까지 남아라. 어떻게든 비용을 마련해 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어느 날 산 안드레우 구단에서 팩스가 왔다. “누군가 너의 훈련비와 학비 전액을 댄다고 하니 다시 스페인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날 새벽 가족들이 깰까봐 화장실에 가 막 울었다. 그리고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스페인에 다시 갈 수 있었다.

당신에게 온정을 베푼 그 분은 누구였나.

같이 운동하는 스페인 친구 중에 유독 몸이 약한 애가 있었다. 애들이 걔를 많이 괴롭혔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막아주고 그랬다. 축구를 잘하는 편도 아니어서 내가 축구도 가르쳐 주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이동할 때 택시만 타고 다녔다. 우리는 다 기차 타고 버스타고 이동할 때 학교에 가면 늘 택시 한 대가 나타났고 그 친구가 내렸다. 택시비도 비싼데 늘 그랬다. 나도 가끔 얻어 타긴 했다. 알고 봤더니 이 친구네 집이 스페인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스페인 공항마다 렌트카 사업을 하고 스페인 프로농구 2부팀 구단주도 하는 집이었다. 호텔도 가지고 있었고 카센터도 여러 개 소유하고 있었다. 재벌이었다. 스페인에 도착해 물어보니 구단에서 내 상황을 이 친구 어머니께 말씀드렸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 친구 어머니가 “유학 비용을 전액 다 지원해 주겠다”고 하셨다더라.

대단한 일이다. 믿을 수 없다. 내가 다 울컥한다.

이 친구 어머니께서 바르셀로나 시내 한 가운데 집을 구해주고 운동에만 전념하라면서 밥과 빨래를 다 해주는 파출부까지 고용해 주셨다. 훈련비는 물론 학비까지 다 대주셨다. 그렇게 무려 3~4년을 지원해 주셨다.

너무나도 고마운 분이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게 고마운 분이다.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내가 올 8월에 결혼할 예정인데 신혼여행도 꼭 스페인으로 오라고 하신다. 그렇다고 내가 선수로 성공한 것도 아니어서 그분들께 금전적으로 갚을 수도 없는데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가격으로 따져도 억 이상을 지원해 주셨다.

그래서 그때 당신이 괴롭히는 것도 막아주고 축구도 가르쳐주던 그 친구는 뭘 하면서 지내나.

한참 나중에 바르셀로나 성인C 팀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바르셀로나 축구학교 코치를 하다가 지금은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았다고 하더라.

‘금수저’ 인생 부럽다.

성공한 인생이다.

하지만 당신은 일찌감치 은퇴한 걸로 안다. 산 안드레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한 번은 경기 도중 무릎이 뒤틀리는 부상을 당했다. 거기에는 한국 분들이 하는 침술원이 있는데 침 몇 번 맞으면 나을 줄 알았다. 바르셀로나 선수들도 구단 몰래 가서 맞을 정도로 침을 용하게 놓는 곳이었다. 그런데 점점 더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고 6개월 동안 아무 것도 못했다. 걱정하실까봐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도 못했다. 결국 선수촌에서 무릎 수술까지는 아니고 시술을 받았다. 회복이 늦어져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렇게 스페인 생활이 마무리된 건가.

바르셀로나에 있을 때 알게 된 스페인태권도협회 회장님이 있다. 스페인 사람인데 그분이 숙소도 없을 때 방도 구해주시고 그러셨다. 그러다 귀국 길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정말 우연히 그 분을 만났다. 내가 인사를 드리니 날 기억하고 있더라. 정말 운명적인 건 그 분이 한국에 일이 있어서 나와 같은 비행기로 한국에 오게 됐다는 점이다. 비행기에서 10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몸을 다시 만들어 오면 내가 애슬레틱 빌바오 2부B나 3부 테스트를 받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다시 한국에서 스페인으로 돌아가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뭐 이렇게 은인이 많나. 그 분은 왜 당신을 도운 건가.

그 분은 한국이 종주국인 태권도와 연을 맺어 한국에 대한 고마움이 있었다. “태권도라는 스포츠 때문에 자기 밥줄이 생겼고 명예가 생겼다”면서 한국 태권도를 얻었으니 스페인 축구를 한국에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분 덕분에 빌바오로 가 3부리그 ‘잘라’ 팀에서 3년 동안 선수 생활을 했다. 하지만 24살이던 2010년 세 번째 시즌에 또 다시 부상을 입고 결국은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 이후에도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스페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스페인태권도협회장이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가 한국과 연결하는 축구 사업을 했다. 축구 유학 관련 일도 도와드렸다.

참 스페인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스페인은 형제의 나라다.

그렇다. 나에게는 평생 갚아야 할 은인들이다.

정인성 코치의 스페인 유학 시절 모습.

한국에 돌아와 다시 마지막 선수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

서울유나이티드에서 몸을 만들어 다른 팀에 한 번 도전해 보라는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선수 생활을 이렇게 해도 오래는 하지 못할 것 같아 접고 다른 곳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른 나이에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됐다.

당신은 바르셀로나 후베닐A까지 경험했다. 메시와 함께 훈련하기도 했는데 당시 메시 말고 지금 잘된 선수들이 더 있을 것 같다.

한 명도 없다.

바르셀로나 유소년인데도 그 또래에서 축구로 한 명만 성공했다는 건가.

그렇다.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한국에서 명문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해 다 K리그 선수가 되는 건 아니다. K리그에 입성한다고 해도 주전으로 성공하는 선수도 손에 꼽는다. 바르셀로나도 똑같다. 하지만 한국과 스페인의 차이는 있다. 한국은 어린 선수들이 축구만 하고 바르셀로나는 축구에 공부까지 시킨다는 것이다. 구단과 선수들도 다들 잘 알고 있다. 이 팀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없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어서 공부를 시킨다. 축구만 하는 게 아니라 공부까지도 잘하는 친구가 굉장히 많았다.

메시도 공부를 잘했나.

메시는 공부를 못해도 되는 ‘스페셜원’이었다.

하긴 메시에게 공부의 재능이 있었다고 해도 쓸 일이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니에스타는 챔피언스리그에 나가면서도 대학을 갔다. 물론 일반 대학생이 4년 만에 졸업할 과정이 6~7년씩 걸렸지만 중요한 건 공부의 중요성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부상을 당해 축구를 못하면 되면 뭘 해야 하는지, 혹은 축구로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어도 이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 알아야 한다. 후베닐A까지 올라간다고 해 다 성인 프로팀에 가 성공한다고 믿는 건 너무 큰 환상이다.

어린 나이에 해외로 축구 유학을 준비 중인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해외 축구 유학 정보가 다 나온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느 유학 업체를 끼고 어느 지역으로 가느냐가 아니다. 내 아이가 그 나라에 갔을 때 길게 한 5년을 놓고 봐야한다. 그 시간 동안 그 나라에서 배울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해외로 떠나는 어린 친구들은 다 잘되고 싶은 꿈이 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한다. 부상을 당하거나 팀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 그 나라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 출구를 찾아야 한다. 이 해답을 반드시 계획해 놓아야 한다.

나도 동의한다. 선수들에게 공부는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유학 업체에 잠깐 있을 때 참 마음이 아팠다. 전세계에서 어린 선수들이 스페인으로 몰려온다. 내가 일할 때만 해도 이스라엘, 대만, 심지어 북한 아이들도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에 왔다. 스페인 축구가 유망하니 영국과 프랑스에서 온 친구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 친구들과 한국 친구들의 다른 점이 있다고 하면 공부를 하고 안 하고의 차이다.

한국 선수들은 그렇게 공부를 안 하나.

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부터 이미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한다. 대신 한국 아이들은 합숙 생활에 아주 잘 적응하는 장점이 있다. 이미 어린 나이부터 한국에서 합숙 생활에 익숙해 져 있기 때문에 합숙에서 힘들어 하는 친구들은 없다. 하지만 공부도 안 하고 1~2년 유학 생활을 경험한 뒤 한국에 돌아가면 붕 뜬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스페인에서 생활한 기간이 있어서 학원 축구에 선수 등록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정인성 코치의 스페인 유학 시절 모습.

되게 현실적인 이야기다.

내가 유학 업체에 있을 때 한국 친구들이 오면 억지로 밤새 단어도 외우게 하고 공부를 시켰다. 물론 어린 친구들이 운동하는 것도 힘든데 공부까지 하려니 더 힘들어 했다. 이 친구들 중에 지금 축구로 성공한 이들은 없다. 처음부터 축구를 그렇게 잘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들 중 몇몇 친구들은 공부를 해 고려대도 가고 한국외대도 갔다. 공부하지 않고 해외에서 축구만 하면 그 순간은 재미있을 수 있지만 뒤로 갈수록 후회만 늘어난다. 그 끈을 놓치면 안 된다.

이렇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이 있다면 지금 다시 유학 업체를 차려도 좋지 않을까.

주변에서 권유를 많이 받고는 있다. 하지만 아직은 지도자로 경험을 더 쌓고 싶다. 물론 지금도 지인들이 부탁하면 “이 친구는 이 지역이 좋을 것 같다”는 정도의 추천은 한다. 나도 그런 일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유학이 지역별로도 다른 게 있나.

예를 들어보겠다. 스페인은 지역마다 지역자치법이 따로 있다. 바르셀로나는 외국인 선수에게 2년간의 시간을 주고 2년 뒤에는 카탈루냐어로 공부해야 한다. ‘바르셀로나에 유학가면 스페인어만 공부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면 2년 뒤에 ‘멘붕’이다. 아예 다 무너진다. 그런데 유학 업체에서는 굳이 이런 이야기를 잘 안 해준다. 마드리드는 아이들이 있기에는 너무 오픈돼 있다. 놀 것도 많고 개방적이다. 내가 빌바오에서 아이들을 관리할 때도 학교 끝나고 아이들이 친구들과 놀러 가면 저녁시간까지 숙소로 안 돌아온다. 도심으로 갈수록 애들 컨트롤이 안 된다. 안 그래도 노는 거 좋아하는 어린 아이들이 통제도 느슨한 곳에 노출되면 힘들어진다.

모르던 사실이었다.

지금도 스페인으로 축구 유학을 엄청 많이 간다. 하지만 지역별로 축구 수준이 다르다는 것도 모르는 이들이 많다. 남부 지역 3부리그는 북부 지역 3부리그보다 레벨이 훨씬 낫다. 스타일도 다르다. 북부 지역에 있는 빌바오와 소시에다드, 데포르티보 등은 선 굵은 영국식 축구를 접목한 편이고 마드리드 중앙으로 갈수록 스피드와 체력을 요구하는 플레이를 선호한다. 바르셀로나나 말라가, 세비야, 우엘바 등 남부 지역은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아서 개인기 하는 걸 되게 좋아한다. 지역별로 스타일이 다 다르고 레벨 차이가 있는데 무작정 아이를 보내는 것 보다는 자세히 알아봐야 한다. 유학을 알아보다가 “마드리드는 한 달에 150만 원인데 남부 여기는 한 달에 100만 원이네. 여기로 가자”고 결정하는 경우도 많다. 이럴 거면 차라리 안 보내느니만 못하다. 그렇게 따지면 한국이 더 잘 가르친다.

유학 생활의 시행착오를 경험 삼아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수들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축구선수로 성공해 부와 명예를 다 얻으면 좋다. 하지만 100명 중에 과연 프로선수 딱지를 달 수 있는 선수가 몇 명이나 될까. ‘지금 축구선수 하지 말라는 건가. 올인 해도 모자랄 판에 축구하지 말라는 건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박에서도 ‘올인’은 위험하지 않나. 축구도 마찬가지다. 축구에만 100% 매달리지 말고 70~80%를 축구에 집중하고 혹시 안 됐을 때를 대비해 20~30%는 다른 준비를 해야 한다. 유학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랑 같이 축구를 시작한 스페인 친구 중에 프로 2~3부리그까지 갔다가도 지금 변호사 하고 사업하고 잘 나가는 친구들이 많다. 지금 이 친구들은 프로까지 경험했는데도 축구 안 하고 잘 나간다. 이런 새로운 가능성의 문까지 열어 놓고 아이들을 지도하고 싶다.

유학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도 멋진 지도자가 되길 응원한다.

우리팀 감독님도 마찬가지고 우리 홍명보 이사장님도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성적은 강요하지 말고 중학교 때 배워야 할 것만 가르치자는 생각이다. 고등학교 때 배울 건 고등학교에 가서 배우면 된다. 선수들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 그 발판을 마련해 주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정인성 코치는 스페인에서 지낸 11년 동안 느낀 게 많았다. 어디에서도 알려주지 않는 귀중한 경험과 정보를 술술 쏟아냈다. 그가 이토록 열변을 토한 건 그만큼 몸소 느낀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메시 같은 축구선수가 되길 꿈꾸지만 메시는 전세계에 딱 한 명이다. 메시를 꿈꾸다 꿈을 접은 수많은 어린 선수들이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인성 코치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여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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