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천둥 번개와 폭우 속 열렸던 마지막 WK리그


WK리그는 여전히 관심이 부족하다. 은퇴 선수를 챙기는 분위기가 아직은 기대하기 어렵다. ⓒ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인천=홍인택 기자] 단단히 중무장을 하고 나갔다. 11월에 들어서면서 인천 유나이티드와 인천 현대제철 경기장은 늘 추웠다. 내복도 껴입고 미리 사둔 핫 팩 두 개를 챙겼다. 막상 인천으로 향하기 위해 집을 나서니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다만 하늘이 수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부천 초입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는데. 그래도 대부분 경기장은 기자석까지 비가 들이치지 않으니 “어떻게든 되겠지”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경기장에 도착하자 빗방울은 더 거세졌다.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에는 그래도 취재진이 있을 줄 알았다. 누가 올진 모르지만 동료 기자가 와있다면 그분의 노하우(?)를 빌려 같이 비를 피하며 취재를 시작하려 했다. 웬걸.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니 기자석은 이미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취재도 중계진을 빼면 나뿐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그나마 지붕 아래에 있는 본부석 앞에 자리를 텄다. 관계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장내 아나운서분 오른쪽에 앉을 수 있었다.

인천남동아시아드경기장에서 WK리그 올스타전이 펼쳐졌다. 상대는 일본의 명문 고베 아이낙. 단일팀과 급조된 팀의 경기는 아무래도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올스타전이니까. 한일전? 에이, 국가대표 경기도 아니고 그냥 친선 교류전이지. 승부가 중요한 경기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전반 5분 만에 깨졌다. 김상은이 고베 수비수들과 경합하면서 왼쪽에 공간이 생겼다. 그 공간을 장슬기가 치고 들어갔다. 김상은은 영리하게 공을 장슬기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장슬기의 골이 터졌다.

실점에 발끈했는지 고베는 라인을 올리며 간결하게 패스를 이어가더니 3분 만에 동점골을 뽑아냈다. 다나카 아스나는 침착하게 칩샷으로 골을 넣었다. 이어 전반 22분에는 나카다 아유의 코너킥이 페널티 박스 바깥에 있는 이또 미키에게 연결됐다. 미키는 엄청난 중거리 슛을 때리며 역전에 성공했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WK리그 선수들이 대거 교체되어 나왔다. 장내 아나운서 손에 쥐어진 교체 명단만 해도 8장이었다. 그리고 경기는 완전히 다른 색을 띠었다. 가벼운 친선 교류전으로 시작했던 경기는 거센 빗방울과 함께 한일전으로 변했다. WK리그 선수들은 한 발 더 뛰었다. 적어도 공중볼만큼은 내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일전은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고 했던가. 선수들에겐 여기가 런던이었고 올림픽 동메달 결승전이었다.

WK리그 올스타 선수들은 이 비를 맞으면서 90분에 승부차기 까지 치렀다 ⓒ 중계화면 갈무리

결국 WK리그 올스타팀이 한 골을 더 뽑았다. 장슬기의 도움, 권하늘의 골. 선수들은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기뻐했다. 진지했던 만큼 결실로 맺은 골에 대한 기쁨이 그대로 나타났다. 이어폰으로 들리던 권은솜의 부끄러운 듯한 목소리는 환호로 바뀌었다.

그 사이 하늘은 더 가혹해졌다. 비만 조금 내리던 경기장 근처로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빗방울이 더 거세졌다. 오후 네 시, 다섯 시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어두운 하늘. 조명 탑에 비치는 물줄기에 공포감이 엄습했다. 경기 결과는 승부차기로 WK리그가 승리를 거뒀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본부석 앞까지 빗방울이 들어차면서 내 노트북은 비를 그대로 맞기 시작했다. 여길 피해야 했다. 상보 기사를 급히 데스크에 전달하고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송고한 기사는 나중에 천천히 읽어 보니 오타가 많았다. (지금은 다 수정했다) 그만큼 긴박한 상황이었다.

원래는 그라운드에서 펼쳐질 예정이었던 공로상 수상식과 양 팀 감독 인터뷰, 그리고 ‘퀸 오브 더 매치’ 행사 진행은 결국 믹스드 존에서 펼쳐졌다. 이에 여자축구 연맹 관계자도 장내 아나운서의 방송을 통해 믹스드존으로 팬들을 불러 모았다. 팬들은 믹스드존으로 내려가 가까이에서 선수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장슬기, 조소현, 그리고 잠시 경기장을 찾은 지소연에게 팬들의 사인과 사진 공세가 펼쳐졌다. 최근 K리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진짜 올스타전 같은 경기 뒤풀이였다. 후반전에 뛴 선수들은 급히 대기실에 들어가 씻느라 팬들을 만나기 힘들었지만 그 빈 자리를 다른 선수들이 채웠다. 대기실 복도에서는 고베를 거쳐 갔던 한국 선수들이 고베 선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손춘자, 나수경 심판은 이 경기를 끝으로 휘슬을 내려놓았다 ⓒ 스포츠니어스

한편 이날은 또 다른 뭉클한 장면이 있었다. 2011년부터 WK리그 심판으로 뛰었던 손춘자, 2004년부터 심판 활동을 했던 나수경 심판이 이번 경기를 끝으로 휘슬을 내려놓았다. 그들의 지인을 비롯한 심판 동료들과 선수들 모두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냈다. 여자축구연맹은 WK리그 올스타전을 그들의 은퇴 경기로 배정했다. 양 팀을 지도한 감독보다도, 1골과 1도움을 올린 장슬기보다도 그들을 위한 자리가 가장 먼저 마련됐다. 손춘자 심판의 눈시울은 불거져 있었다.

올해도 이렇게 WK리그는 마무리됐다. K리그만큼의 화려한 시상식은 없었지만 그 자리엔 함께한 팬들이 있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동료들이 있었다. 고베에서 뛰고 있는 홍혜지는 오랜만에 만난 언니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한때 ‘얼짱’으로 유명했던 나카다 아유는 지소연과 깊은 포옹을 나눴다. 심서연과 박은선은 해체된 이천 대교를 뒤로하고 새 팀을 찾았다.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지켰던 심판 두 명은 리그를 떠났다. 천둥 번개가 쳤던 WK리그의 밤 같았던 오후는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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