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케이로스 이란 감독 ⓒ 이란축구협회

[스포츠니어스 | 홍인택 기자] 한국 대표팀은 흔들리고 있다. 그것이 팬들과 축구협회 수뇌부에 의한 것이든, 대표팀이 자초한 일이든 불안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한국 대표팀이 뚜렷한 철학과 팀 컬러로 팬들을 설득시켰어도 이렇게 흔들렸을까 싶다. 한국 축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어떤 모습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 답을 내기 쉽지 않다.

정몽규 회장은 기술분과위원회와 감독선임위원회를 이분화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김호곤 전 위원장의 사퇴는 축구협회의 인적 쇄신이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탄이었다. 축구협회의 인적 쇄신은 어떤 방향으로든 필요한 일이었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김호곤 전 위원장의 역량을 생각하면, 그리고 한국 축구 대표팀의 전술적, 기술적 방향을 생각하면 김 전 위원장의 사퇴는 조금 씁쓸함도 남는다.

한국 대표팀은 만족스러운 경기력과 결과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다. 다른 나라를 롤모델로 삼고 벤치마킹하는 것이 여러 가지 대안 중 한 가지로 꼽힐 수 있다. 지도자와 유소년 육성 정책은 독일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얼마 전에는 차범근 위원이 분데스리가 앰배서더로 선정되면서 독일 축구와 한국 축구의 가교역할을 맡겠다는 의사를 밝혀 기대감을 심어줬다. 그렇다면 한국 대표팀의 롤모델은 어디여야 할까. 한국 대표팀은 '약팀'의 위치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적 롤모델과 현실적 롤모델 두 팀이 떠오른다. 나는 한국 대표팀이 현실적으로 이란 대표팀을 롤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태용 감독을 비롯한 대표팀의 지도자는 카를로스 케이로스의 대표팀 운영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레알 마드리드를 3-1로 격파한 토트넘 ⓒ 토트넘 홋스퍼

대표팀의 롤모델, 이상 편

한국 대표팀의 팀 컬러는 무엇일까. 조광래 감독 시절부터 대표팀은 많이 뛰는 팀을 추구한다는 방향은 읽을 수 있었다. 티키타카도(조광래), 점유율 축구도(홍명보, 슈틸리케) 일단 많이 뛰는 선수들이 필요했고 많이 뛰는 선수들이 대표팀의 부름을 받았다. 우리나라 대표팀이 많이 뛰는 축구를 추구한다면 이상적인 롤모델은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이 이끄는 토트넘 홋스퍼에 가까울 것이다.

토트넘은 지난 2일 레알 마드리드를 웸블리로 불러 3-1 완승을 거뒀다. 점유율, 슈팅 숫자, 패스 숫자에도 밀린 토트넘이 세계 최고 클럽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결정적인 이유는 뛴 거리의 차이였다. 토트넘의 젊은 선수들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레알 마드리드보다 거의 10km가 넘는 거리를 뛰어다녔다. 토트넘은 90분 동안 121km를 뛰었고 레알 마드리드는 109.4km를 뛰었다.

토트넘도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수비 중심의 축구를 했다. 기본 토대는 3-5-2 포메이션이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얀 베르통언과 토비 알데르베이럴트, 다빈손 산체스에게만 막힌 것이 아니다. 로리스 골키퍼의 선방에만 막힌 것이 아니다. 토트넘의 백 파이브 수비와 세 명의 미드필더들의 간격은 감탄 그 자체였다. 토트넘은 두꺼운 두 줄 수비로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을 꽁꽁 묶었다.

볼을 점유하고 라인을 끌어 올리며 '지배적인' 축구를 추구했던 레알 마드리드는 토트넘에 농락당했다. 카세미루와 토니 크루스, 루카 모드리치는 이날 레알 마드리드를 위해 한 일이 거의 없다. 이날 레알 마드리드는 한국 대표팀과 꽤 비슷한 축구를 했다. 토트넘이 이상적인 모습에 가깝다고 보는 이유는 토트넘의 수비력과 함께 그들이 중원에서 보여준 장악력 때문이다. 크리스티안 에릭센을 비롯한 토트넘의 미드필더들은 레알 마드리드의 허리 싸움에서 완전히 승리했다. 볼 키핑과 탈압박은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두터운 수비를 구축하고 중원을 장악하니 공격도 열렸다. 해리 케인과 델레 알리는 끊임없이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를 괴롭혔고 이는 해리 윙크스와 에릭센의 부담을 상대적으로 덜어준 결과가 됐다. 오른쪽은 키어런 트리피어가 완전히 장악했다.

수비적인 전술을 취하면서도 강팀보다 10km 이상을 뛴 토트넘이야말로 한국 대표팀의 이상적인 롤모델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뛰었다. 그들은 완벽한 도전자였다. 자신들이 세계 최고 클럽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한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자신감이 넘쳤다. 선수들의 투지도 완벽했고 경기를 준비한 포체티노 감독도 그의 선수단에 승리를 향한 비전과 영혼을 불어넣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토트넘을 롤모델로 삼기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괴리감이 있다. 에릭센과 윙크스는 기성용과 구자철이 대체할 수 있다고 해도 장현수에게 에릭 다이어만큼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까. 케인과 알리의 역할을 손흥민과 이정협, 혹은 황희찬에게 기대할 수 있을까. 트리피어와 밴 데이비스만큼 저돌적으로 상대 뒷공간을 노리면서도 집중력 높은 수비를 해줄 수 있는 윙백 자원이 있을까. 최근 대표팀 구성원들의 경기력을 근거로 든다면 이들에게 토트넘 선수들과 같은 활약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포체티노 감독만큼 선수들의 역할에 맞춰 변화무쌍한 전술 플랜을 실현할 수 있는 감독은 신태용 감독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레알 마드리드를 3-1로 격파한 토트넘 ⓒ 토트넘 홋스퍼

대표팀의 롤모델, 현실 편

최선책이 힘들다면 차선책을 고려할 수 있다. 케이로스 감독이 이끄는 이란 대표팀이 현실적인 롤모델이 될 수 있다. 케이로스 감독은 2011년 이란 대표팀을 맡았고 3년 뒤인 2014년에는 이란 대표팀을 아시아 최고의 팀으로 만들었다. 한국 대표팀이 아시아의 호랑이, 아시아의 맹주를 논할 동안 케이로스는 이란 대표팀을 꾸준히 자신의 팀으로 만들었다. 국내 언론과 팬들은 그들의 단단한 수비력을 애써 외면했다. 이란을 비롯한 중동 축구의 색깔을 '침대 축구'라며 비난하기 바빴다.

이란의 침대 축구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축구는 오직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 시간 끌기라는, 스포츠 정신과는 어긋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침대 축구를 구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단단한 수비력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수비가 강하기 때문에 먼저 실점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빠른 역습으로 선제골을 넣었다. 나머지는 주심이 경기 종료 휘슬을 불어주기만 하면 된다.

이란 축구의 팀 컬러가 단순히 침대 축구라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의 팀 컬러는 조직적인 수비와 '한 방'을 위한 빠른 역습 축구다. 단순히 케이로스 감독이 추구하는 팀 컬러가 이런 모습일 수도 있다. 그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코치로 있을 때도 맨유는 꽤 수비적인 축구를 했다. 재미없었지만, 그들은 승리라는 결과를 항상 가져왔다. 케이로스는 맨유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맨유에서 배운 철학을 이란 대표팀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이란의 수비 축구는 특히 브라질 월드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놀라운 수비력을 펼치며 전 세계 축구팬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아르헨티나는 이란을 상대로 90분 내내 어려운 축구를 했다. 90분이 지나고 추가시간이 되어서야 메시가 이란의 골문을 열 수 있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케이로스와 이란이 단순히 월드컵이어서, 상대가 아르헨티나여서 수비 축구를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아시아 1위를 달리면서도 절대 그들의 수비 축구를 버리지 않았다. 월드컵 예선, 아시안컵, 친선 경기에도 지지 않는 축구를 최우선으로 했다. 유독 바레인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다득점을 한 경기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의 바탕이 되는 축구는 수비 축구다.

레알 마드리드를 3-1로 격파한 토트넘 ⓒ 토트넘 홋스퍼

이란은 꾸준히 수비 중심의 축구를 한다

한국 대표팀과 이란 대표팀의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에 있다. 한국 대표팀은 약팀이지만 아시아에서는 호랑이 노릇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아시아 무대에서는 라인을 높게 끌어 올리고 공격 중심의 축구를 하길 원했다. 볼 점유율을 높이며 공격 기회를 계속 가져오려 했다. 팬들도 다득점이 터지는 화끈한 공격 축구를 좋아했다. 한국을 상대하는 다른 팀들은 한국의 이런 성향을 미리 알고 수비라인을 깊숙이 내렸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맹주라고 월드컵에서도 맹주 노릇을 할 순 없었다. 한국은 어쨌든 도전자의 위치에 있고 약팀이 강팀을 상대로 승리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전술은 단단한 수비와 역습 '한 방'이다. 한국 대표팀은 공격 축구가 실패하고 어려운 성적표를 가져올 때마다, 그리고 월드컵 직전에 감독을 교체할 때마다 축구의 기본 바탕을 뒤집어야 했다. 즉, 공격 축구에서 수비 축구로 기어를 바꿔야 했다. 이러한 변화가 대표팀에 혼란을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 축구에 철학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고 팀 컬러가 흐릿하다고 느껴졌다.

아시아에서 개인 기량에 더해 조직력까지 갖춘 이란을 꺾을 수 있는 팀은 몇 없다. 케이로스 감독 부임 후 6년이 넘은 현재 이란이 테헤란에서 패배한 경기는 단 세 경기에 불과하다. 이란도 공격 축구를 한다면 화끈하게 공격할 수 있는 팀이다. 그들은 괌이나 인디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을 상대할 때는 다득점을 기록하며 화끈한 승리를 거뒀다. 그래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수비 축구를 한다. 강력한 '한 방'으로 득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대체로 한 점 차 승리를 거둔다. 그들은 왜 수비축구를 할까. 케이로스 감독의 성향일 수도 있지만 월드컵이라는 세계무대에 도전하기 위해 그만큼 꾸준히 수비 중심의 축구를 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것이 아시아 무대이든, 유럽과 아프리카, 남미 팀을 상대로 치른 친선경기이든 말이다.

안정환 위원에 이어 신태용 감독도 우리나라가 약체임을 인정했다. 기술위원으로 있는 박경훈 감독도 이에 동의했다. 약팀은 수비를 다져야 한다. 신태용 감독은 아직 수비에서 확실한 강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신 감독의 강점은 공격 지역의 활발한 스위칭 전술에 있었다. 김호곤 전 위원장의 사퇴가 씁쓸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울산을 이끌었던 시절 인상 깊은 철퇴 축구를 구사했기에 그가 수비 측면에서 대표팀에 기술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기술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일단 지금은 새로 영입된 토니 그란데 코치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신 감독과 그란데 코치를 비롯한 코치진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새로 선임될 기술위원장은 한국 축구의 기조를 수비로 다져야 한다. 월드컵 최종 예선 이란전과 우즈베크전처럼 팬들의 공감을 얻기 힘든 경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 대표팀은 케이로스 감독과 이란의 수비 축구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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