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우리의 기억 그대로였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수원FC를 선택한 백성동의 제2의 축구인생은 이제 막 시작됐다. ⓒ 수원FC 제공

[스포츠니어스ㅣ남윤성 기자] 2011년 여름, 특급 유망주의 등장에 국내 축구계가 들썩였다. 공격적인 패스와 과감한 드리블, 날카로운 슈팅 능력까지. 더욱이 상대가 ‘무적함대’ 스페인이었기에 그를 향한 국내 축구팬들의 기대감은 끝없이 높아만 갔다. 대회 직후엔 유럽 빅리그 이적설도 나돌았다. 하지만 이내 전해진 행선지는 다름 아닌 일본. 가뜩이나 국내 유망주의 ‘J리그 러시’ 열풍에 회의적이었던 축구팬들은 크게 실망했다.

이후 2012 런던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교체로 그라운드를 밟는 횟수가 많았다. 대회 직후엔 훈련 도중 전방 십자인대가 파열되며 선수생활에 위기를 맞았다. 복귀 후인 2013년, A대표팀에 승선했지만 활약이 미미했다. 축구팬들의 시큰둥한 반응이 이어졌다. 소식도 자연스레 뜸해졌다. 그렇게 또 한명의 유망주가 잊혀져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던 지난해 12월 국내 복귀를 결정했다. 도전 무대가 챌린지(2부)였기에 의아함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저돌적인 돌파와 번뜩이는 패스까지 재능은 여전했다. 프로 6년차를 맞으면서 플레이에 노련함까지 묻어났다. 아직도 축구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백성동의 축구인생은 이제 시작이다.

유독 까맣고 체구가 작았던 꼬마아이

백성동은 유년시절 전주 조촌초 축구부를 지도하던 정경구 감독의 눈에 띄어 축구를 시작했다. 아버지를 따라 조기축구회에 나선 백성동은 체구는 작았지만 공을 가지고 노는 움직임이 남달랐다. 하지만 이내 아버지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본인이 선수생활을 경험해봤기에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지 백성동의 아버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성동은 축구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끈질긴 설득 끝에 조촌초 축구부에 진학하며 축구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아버지도 선수시절 저와 같이 측면 공격수 포지션에서 활약하셨어요.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축구에 대한 생각과 기본적인 부분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공격적인 플레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셨어요. 중학교 진학 이후에는 감독님이 저를 중심으로 전술을 짜셨고 그 덕에 더욱 공격에만 집중하면서 자유롭게 플레이했어요. 주위의 많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잉글랜드에서 겪은 우여곡절

2007년 금호고에 진학한 백성동은 민상기, 이용재와 함께 대한축구협회에서 진행한 축구 유학프로그램에 선발되어 ‘축구종가’ 잉글랜드로 향했다. 첫 행선지는 프리미어리그의 볼턴 원더러스였다. 하지만 선수들의 수준은 생각보다 높았고 말이 통하지 않아 무시도 많이 당했다. 한창 배우며 성장해야할 시기에 일방적인 방출 통보가 이어졌다. 이후 주변 공원에서 일반인과 볼을 차며 겨우 감각을 유지해야 했다.

"원래 계약된 구단은 왓포드가 아니라 볼턴이었어요. U-16팀이었지만 패스 강도나 압박, 스피드, 피지컬에서 엄청났어요. 텃세도 심했고 무시도 많이 당했어요. 그리고 정확히 1달 뒤 저희 셋 다 방출 당했어요. 볼턴이 당시 프리미어리그에서 꼴찌였는데 저희를 데리고 있기엔 재정적인 여유가 없다면서 일방적으로 방출을 통보했어요. 하루아침에 쫓겨나 옆 도시 맨체스터로 향했어요. 그때부터 여관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3개월을 생활했어요. 샤워기가 고장 나서 세면대에서 씻어야했고 따뜻한 물이 안 나와서 찬물로 샤워했어요. 먹고 자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운동하는 거였습니다. 운동할 곳이 없어서 근처 공원에서 운동했죠. 축구종가 잉글랜드에서 축구를 배운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했는데 현실은 일반인들한테 축구를 알려주고 있었어요. 심지어 거기에 머무는 동안 도둑이 들었어요. 상기는 돈을 모두 털렸고 저는 카메라를 도난당했어요. 추억이 담긴 사진은 전부 거기에 들어있었는데…"

부푼 꿈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이내 시련에 부딪혔다. 감각 유지를 위해 주변 공원으로 향했다. ⓒ 백성동 본인 제공

"우여곡절 끝에 협회에서 왓포드로 연결해줬어요. 당시 왓포드는 챔피언십(2부)에 속해있었고 유스도 실력이 다소 부족했어요. 그러다보니 저희 모두 실력으로 인정받았고 생활도 훨씬 수월해졌어요. 거기서 느낀 건 아무리 유소년이어도 선수들 마인드가 정말 프로페셔널 하다는 거예요. 전부다 계약을 맺고 돈을 받으면서 운동해요. 평균 연봉이 U-16은 2,400만원 U-18은 4,800만원이나 됐습니다. 그러다보니 선수들의 훈련 태도가 달라요. 전쟁터가 따로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예정된 훈련 스케줄은 4일 기준 6번이었어요. 그런데 애들이 훈련하다가 갑자기 치고받고 싸워요. 그 바람에 실제 진행된 훈련은 3번뿐이었어요. 근데 훈련이 끝나고 나면 싸웠던 애들이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집에 같이 가더라고요. 그 모습이 문화충격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이게 진짜 프로페셔널한 마인드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력 훈련에서는 저희가 항상 1,2,3등을 했어요. 걔네들은 그냥 달리는 건 진짜 못해요. 그러다가도 경기장 안에서는 미친 듯이 뛰어다녀요. 수비에 복귀해야 하는 상황에서 저는 도저히 못 쫓아가겠는데 걔네들은 뛰다 죽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뛰어가요. 정신 자체가 다른 거죠. 마인드가 절박한 것과는 차이가 있어요. 그런 부분에서 축구에 임하는 태도를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스페인과의 맞대결

예정된 기간이 끝나자 왓포드에서 먼저 계약을 제안해왔다. 백성동은 왓포드에 남아 도전을 이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희망하신 부모님 의견을 따라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2011년에는 콜롬비아에서 열린 FIFA U-20 월드컵에 출전했다. 그리고 스페인과의 16강전을 통해 백성동은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대중에 각인시켰다.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국내 축구팬들은 이날 그가 보여준 활약을 잊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가끔 스페인전 영상을 돌려보곤 해요. 그 경기를 통해 많은 분들이 저를 알아봐주셨고 또 기억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많은 분들이 경기 전에 기가 죽거나 움츠려들지는 않았냐고 물어보세요. 중요한 건 저희는 그 선수들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는 거예요. 몇몇 친구들이 경기 전 ‘10번이 레알 마드리드래, 7번은 바르셀로나래’라고 알려줬지만 정말 하나도 관심이 없었어요. 그저 승리해야할 상대일 뿐 상대를 의식해서 제 플레이를 못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막상 부딪혀보니 생각보다 압박이 허술했어요. 미드필드와 수비 간격도 넓었고요. 하던 대로 했을 뿐인데 경기 후 반응이 워낙 뜨거워서 저도 깜짝 놀랐어요."

부푼 꿈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이내 시련에 부딪혔다. 감각 유지를 위해 주변 공원으로 향했다. ⓒ 백성동 본인 제공

"2패를 하고도 와일드카드로 16강에 진출해서 너무 부끄러웠어요. 게다가 경기전날 A대표팀이 일본한테 0-3으로 지면서 더더욱 물러날 곳이 없었죠. 그래서 모두 더 간절하게 뛰었고 이 부분이 팬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춰진 것 같아요. 사실 스페인은 실력적인 부분에서 큰 차이를 못 느꼈어요. 대신 프랑스는 달라요. 이 정도로 실력 차이가 날 수가 있나 싶더라고요. 개개인 능력도 뛰어났지만 걔들은 우선 자신감이 달랐어요. 11명이 서로 볼을 받으려했고 정말 공격적으로 플레이를 했어요. 기술, 힘, 스피드 모든 부분에서 차이를 느꼈어요."

일본에서 프로 데뷔한 이유

U-20 월드컵을 통해 한국 축구에 한줄기 희망으로 떠오른 백성동은 대회 이후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는 동기 장현수와 함께 대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표팀의 런던 올림픽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때맞춰 이탈리아 세리에A 인터밀란 이적설이 나돌았다. 팬들은 그의 공격적인 성향이 유럽에서도 충분히 통할 것이라며 잔뜩 기대감을 표출했다. 하지만 모두의 기대와 달리 백성동은 J리그를 선택했고 이에 수많은 팬들의 분노를 샀다. 그에게 거는 기대가 그만큼 컸기에 실망도 컸다.

"중학교 때 세운 확실한 목표가 있었어요. 바로 ‘연세대학교 진학’과 ‘프로 데뷔는 J리그에서’였습니다. 왜 굳이 연세대를 고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요. 하지만 일본에 대한 생각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전북현대와 감바 오사카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볼보이를 하고 있었어요. 감바 원정팬들은 90분 동안 정말 쉬지 않고 선수들을 응원하더라고요. 경기가 끝난 뒤에는 엔도한테 열광하는데 그 모습이 한동안 잊혀 지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무조건 프로 데뷔는 일본에서 하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이내 시련에 부딪혔다. 감각 유지를 위해 주변 공원으로 향했다. ⓒ 백성동 본인 제공

"옛날엔 제 기사에 달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찾아볼 정도로 팬들의 반응에 민감했어요. 근데 이와타 이적이 확정된 순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욕들이 달렸어요.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뭘 잘못했지?’였어요. 그때 고작 스물한 살이었던 저한텐 큰 상처였죠. 그 이후로 일희일비하지 않으려다 보니 자연스레 댓글을 안 보게 되더라고요. 비난 하나하나에 신경 써가면서 스트레스 받을 바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죠. 물론 저를 향한 기대가 크셨기에 더욱 실망하신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반응은 어렸던 저한테는 그만큼 충격적이었어요."

J리그 진출과 런던 올림픽 동메달

이적 후폭풍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엔 계약 문제가 발생했다. 본인이 백성동의 에이전트라 주장한 송모씨는 ‘계약을 어기고 합의 없이 다른 에이전트를 통해 주빌로 이와타와 계약을 맺었다며’ 백성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억울한 부분이 있었지만 법적으로 상황이 불리해 어쩔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향했다. 데뷔시즌 이와타에서 주전으로 도약한 백성동은 결국 올림픽 최종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대표팀은 사상 최초로 동메달을 획득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하지만 백성동은 웃지 못했다. 부상여파로 기대 이하의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부푼 꿈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이내 시련에 부딪혔다. 감각 유지를 위해 주변 공원으로 향했다. ⓒ 백성동 본인 제공

"축구 인생 가장 아쉬운 순간이에요. 이적 후 출전 기회를 많이 받으면서 몸 상태도 좋았어요. 워낙 자신이 있었는데 합류하기 직전 입은 부상으로 컨디션이 떨어져서 걱정이 있었어요. 다른 형들과 나이 차이가 2살이나 났는데 경기를 준비할수록 체감상 느껴지는 부담이 생각보다 크더라고요. 인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큰 기회였음에도 부담감을 떨쳐내지 못해서 아쉬움이 더 크게 남습니다."

부상과 성인 대표팀 발탁, 1부리그 복귀

백성동은 비록 올림픽이란 큰 무대에서의 부담감 극복에는 실패했지만 이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선수에게 요구되는 수준과 컨디션 관리 등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 의지가 더욱 강하게 불타올랐다. 하지만 소속팀 복귀 후 훈련을 소화하던 백성동은 무릎에 이상한 소리를 듣고 그라운드위에 쓰러졌다.

"시즌 중이었기 때문에 올림픽 만찬회가 끝나자마자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어요. 목요일 오후에 도착해서 바로 오후 훈련을 소화했고 토요일 경기에 나섰죠. 그리고 화요일 훈련에서 다쳤습니다. 올림픽에서 경기를 많이 뛰지 못했기 때문에 무리가 와서 다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수술할 정도로 크게 다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좀 쉬고 복귀하면 되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막상 복귀하고 나니 몸이 예전만하지 못한 게 느껴지더라고요. 나름 빠르게 치고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수비수한테 쉽게 따라잡혔고 볼 컨트롤, 드리블 등 기본적인 것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부상보다 아쉬웠던 건 2013년 8월에 A대표팀에 소집됐던 거예요. 복귀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는데 홍명보 감독님이 새로 부임하시면서 컨디션도 확인할 겸 차출하셨어요. 감독님께선 기존에 과감한 플레이를 많이 기대하셨을 텐데 그땐 몸 상태도 100%가 아니었고 냉정히 말해서 A대표팀에서 경쟁하기엔 실력도 많이 부족했어요."

부상에서 복귀한 백성동은 그해 22경기에 나서며 이와타의 잔류 경쟁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세 번의 감독교체로 팀 내 분위기는 뒤숭숭했고 10월부터는 5연패 늪에 빠지며 결국 구단 역사상 최초의 강등을 경험해야했다. 무대는 비록 2부였지만 이듬해 30경기에 출전하며 컨디션을 끌어올렸고 그 결과 부상여파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었다. 백성동은 이와타에서 활약한 3년간 일본을 올림픽 4강에 올려놓았던 세키즈카 다카시, 일본 대표팀의 전설 히로시 나나미등 대단한 명장들과 함께했다.

특히 우리나라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던 히로시 나나미는 백성동을 더욱 각별하게 생각했다. 그는 한국인인 백성동의 기량이 다른 일본선수들보다 좋았던 것에 크게 자존심 상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히로시 나나미가 활약할 당시 축구에 대한 한일 양국의 감정은 최고조에 달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나미는 백성동의 기량만큼은 더욱 인정하고 존중했다. 그러던 2015년 백성동은 옛 스승 히로시 모리시타의 부름을 받아 사간도스로 이적하며 1부리그로 복귀했다.

부푼 꿈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이내 시련에 부딪혔다. 감각 유지를 위해 주변 공원으로 향했다. ⓒ 백성동 본인 제공

"계약이 끝나는 시점에 사간도스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제안을 해왔어요. 1부리그에서 다시 도전할 수 있었다는 것과 팀에 한국인 선수가 3명(김민우, 김민혁, 최성근)이나 있었기에 더욱 망설일 필요가 없었어요. 훈련 중 잠시라도 한국말을 할 수 있어서 심리적으로도 안정감을 많이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사간도스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모리시타 감독의 존재였어요. 이와타 시절부터 저를 굉장히 잘 챙겨주셨어요. 비록 한 시즌 만에 팀을 떠났지만 이후에도 연락을 계속 주고받았고 따로 만나 같이 식사를 할 때면 실질적인 조언도 많이 해주셨어요. 감독님 가족과도 굉장히 친했는데 특히 감독님 아들이 제 열렬한 팬이었어요. 그래서 더 챙겨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존재이고 그만큼 소중하고 감사한 분입니다."

2부리그 나가사키로의 임대

사간도스로 이적한 백성동은 옛 스승의 굳건한 믿음 아래 서서히 자신감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성적부진을 이유로 모리시타 감독이 1년 만에 팀을 떠나고 새로운 감독이 부임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전반기 대부분을 교체로 경기에 나섰고 결국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나가사키(2부)로 임대를 떠났다.

"모리시타 감독이 떠난 뒤 마시모 피카덴티 감독이 부임했어요. 이탈리아에서 잔뼈가 굵은 감독이었고 그래서 용병에 대한 기준이 더욱 엄격했어요. 그 전에는 축구를 배우면서 즐겨서 외국인 선수라는 기분이 따로 들지 않았는데 피카덴티 감독이 부임한 이후엔 외국인 선수로서 상당한 압박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은 훈련 때 감독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기분까지 들더라고요. 저는 축구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런데 축구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행복하지가 않았고 결국 나가사키로 임대를 떠났어요. 타카기 타쿠야 당시 나가사키 감독이 저를 강력히 원했고 공격수 출신이어서 플레이 스타일도 잘 맞았어요. 공격적인 코칭과 세밀한 부분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고 무엇보다 절대적으로 신뢰해주셨어요. 덕분에 다시 행복을 되찾았고 일본생활을 기쁘게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이내 시련에 부딪혔다. 감각 유지를 위해 주변 공원으로 향했다. ⓒ 백성동 본인 제공

"제가 느낀 K리그와 J리그의 가장 큰 차이는 선수와 구단이 팬들을 대하는 태도에요. 몸담았던 이와타와 사간도스만 해도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프로젝트를 정말 많이 실시했어요. 힘들게 훈련하고 난 뒤라 힘들 법한데도 일본 선수들은 여기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가 다르더라고요. 팬들이 있어야 선수가 존재한다는 마인드가 강하게 깔려있는 거죠. 이런 문화를 일본에 가서야 처음 접했기에 처음엔 솔직히 귀찮은 마음이 컸지만 시간이지나 익숙해지고 당연해졌습니다. 팬들의 소중함과 팬들을 대하는 방법을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그리고 홍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J리그는 최우선 타켓 연령대가 어린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이 부모를 졸라 가족 단위로 경기장을 찾아오도록 유도하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경기장을 응원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팀에 애정을 갖게 만드는 이런 구단의 노력이 있기 때문에 팬들도 더욱 팀과 선수들을 믿고 지지하는 것 같아요."

'일본 스타일'을 떨치기 위한 도전

지난해를 끝으로 계약이 만료된 백성동은 5년간의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국내 복귀를 결정했다. 계약만료가 다가오면서 복수 J리그 팀들의 제안도 있었지만 변화가 필요하다 생각해 거절했다. 그때부터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결국 백성동은 수원FC의 유니폼을 입었다. 무대가 챌린지였기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하지만 백성동에게 금전적인 부분이나 자존심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본인의 성장만을 생각한 선택이었다.

"5년 룰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건 절대 아니에요. 일본생활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로 돌아오겠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었어요. 하지만 J리그에서 오래 뛰다 보니 점점 스타일이 일본선수처럼 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변화가 필요하다면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정말로 저를 원하는 팀, 경기를 많이 뛸 수 있는 팀, 한 번 더 성장할 수 있는 팀 이렇게 세 가지 기준을 놓고 팀을 찾았습니다. 클래식 상위 세 팀을 비롯해 많은 곳에서 제안이 왔었어요. 결국 클래식 한 팀으로 마음을 굳혔고 계약도 코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부푼 꿈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이내 시련에 부딪혔다. 감각 유지를 위해 주변 공원으로 향했다. ⓒ 백성동 본인 제공

"그때 걸려온 한통의 전화가 제 마음을 바꿔놓았어요. 수원FC 국장님이셨는데 통화만으로도 저를 정말 원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일본에 있으면서 기사를 통해 수원FC 소식을 자주 접했기 때문에 매력적인 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에이전트와 수원FC에서의 제 모습을 상상해봤는데 승격과 개인적인 성장이 메리트로 다가왔어요. 스스로를 낮추고 챌린지로 이적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라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아내도 많이 걱정했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말해주더라고요. 제 가치를 알아줄 수 있는 팀에 갔으면 좋겠다고. 책임감과 동시에 확실한 도전의지가 생겼고 결국 수원FC와 계약을 맺게 됐습니다."

수원FC 이적 후 기록한 최다 공격 포인트 

시즌이 시작되기 전만해도 국내로 돌아온 백성동을 바라보는 일부 팬들의 시선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이 환호로 바뀌기 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돌적인 돌파와 번뜩이는 패스는 여전했고 오히려 프로 6년차를 맞으면서 플레이에는 노련함까지 묻어났다. 리그 최종전에서 날카로운 침투로 팀의 세 번째 골을 득점한 백성동은 시즌 합계 8골 4어시를 기록하며 인상적인 데뷔시즌을 치렀다. 특히 이번시즌 기록한 12개의 공격 포인트는 프로 데뷔이후 최다 수치다.

"일본에서 뛰면서 공격 포인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어요. 특히 피카덴티 감독 밑에서 그 중요성을 많이 깨달았습니다. 사실 3년차부터 공격 포인트에 욕심내기 시작했는데 이미 적응된 스타일에 변화를 주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수원FC에 와서 이전에 저의 공격적인 플레이를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K리그는 J리그와 공격 포인트 주목도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구단과 팬, 언론 모두 선수의 가치를 골이나 어시스트, 수비공헌 등의 포인트로 평가하는 성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비록 목표했던 10-10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다음 시즌엔 꼭 달성해서 수원의 승격을 이끌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표팀? 아직 부족하지만 욕심낼 것"

"아무래도 승격하지 못해 너무 아쉽습니다. 시즌 전 동계훈련에서 선수단 수준과 팀 분위기를 보면서 승격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정말 강하게 들었거든요. 승격이 확정된 경남과 저희가 크게 차이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경남이 워낙 조직적이고 끈끈한 건 맞지만 기술적으론 저희가 더 좋다고 생각해요. 대신 저희는 선제골 이후 분위기를 내줬을 때 경기를 뒤집고자하는 파이팅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가슴 한 켠에 태극마크를 다는 것은 모든 축구 선수들의 꿈이다. 이는 백성동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표팀의 부름을 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지 잘 알기에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부푼 꿈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이내 시련에 부딪혔다. 감각 유지를 위해 주변 공원으로 향했다. ⓒ 백성동 본인 제공

"솔직히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과거에 경험해봤기 때문에 잘 알아요. 대표팀의 부름을 받기 위해선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또 경쟁력을 바로 입증할 만큼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많이 부족해요. 보여준 것도 아직 많지 않아요. 때문에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지금은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도 축구가 재밌어요. 재밌는 걸 직업으로 삼고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 전혀 급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계속 행복하게 축구하면서 기량을 끌어올리다보면 자연스레 태극마크도 달 수 있지 않을까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백성동은 유독 결과론을 자주 언급했다. 비록 현재의 모습이 과거 꿈꾸던 모습과는 차이가 있지만 모든 건 결과론적인 부분이기에 후회도 미련도 없단다. 나이가 들면서 눈앞에 놓인 목표에 집착하지 않는 법을 깨달은 백성동은 그저 하루하루 매순간 더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라 밝혔다. 스물일곱 백성동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skadbstjdsla@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