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참패를 당한 뒤 여러 시사 진단 프로그램에서 한국 축구의 문제를 되짚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잘하는 멕시코를 월드컵 1승 상대로 지목했던 것부터가 어이 없는 일이긴 했다. 어린 마음에 우리가 멕시코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줄 알았는데 완패를 당한 건 물론이고 네덜란드에도 0-5 대패를 당했을 때는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백분 토론>을 비롯한 여러 시사 진단 프로그램에서는 축구 전문가들이 나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근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프로리그가 살아야 한국 축구가 살아납니다.”

대표팀과 자국리그는 떼어 놓을 수 없다

이후 국제 대회에서 참패할 때마다, 아니면 한국 축구가 잘 나갈 때마다 프로축구가 언급됐다. 아시안컵 참패 당시에는 “K리그가 발전해야 한국 축구가 아시아 무대에서 이런 꼴을 당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여러 한국 축구 문제점을 나열했지만 결국에 결론은 늘 같았다. 프로리그가 더 활성화 되어야 하고 유소년 축구를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늘 똑같은 이야기였지만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 지겨운 이야기는 늘 공감을 샀다. 개인적으로는 나도 철학이 변해 K리그에서 관중 구걸하는 걸 대단히 싫어한다. “제발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와주세요”라는 뉘앙스는 싫다. 하지만 그렇다고 K리그 발전 없이 대표팀만 발전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늘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K리그가 그나마 한때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이렇게 자국리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K리그는 월드컵 및 대표팀 경기와 따로 떼어 놓고 절대 이야기할 수 없다. 자립할 수도 없다. 그래도 4년에 한 번씩 월드컵에 나갈 때마다. 혹은 월드컵에 나가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둘 때마다 “K리그가 살아야 대표팀도 산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라도 있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월드컵에서 참패를 할 때면 독일은 유소년 선수가 몇 명이고 이웃나라 일본은 몇 명인데 한국은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래도 한국 축구 유소년 시스템이 돌아갔다. 한국 축구가 스스로 청렴하고 개념이 있어 발전한 게 아니다. 남 눈치 보면서 남들한테 창피 당하기 싫어 이렇게 4년에 한 번씩 ‘매타작’을 해줬기 때문에 발전한 거다.

그나마 한국 축구가 조금씩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4년 마다 정신줄을 잡을 수 있는 월드컵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이렇게 한국 축구를 위한 근본적인 고민을 했다. 자국리그가 살아야 하고 유소년이 탄탄해야 그 나라 축구가 발전한다는 걸 모두가 알았고 4년 마다 이 당연한 논리를 한 번씩 더 떠올렸다. 자국리그의 중요성을 공감하는 이들이 K리그 중계를 외쳤고 유소년 축구의 뿌리를 다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투자를 외쳤다. 대한축구협회가 엉터리로 운영되고 있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할 수 있었던 건 이렇게 4년 마다 근본적인 고민과 주장을 해왔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만 자국리그와 유소년 육성을 주장한 게 아니라 그 시절에는 팬들에게도 이런 공감대가 충분했다.

과연 이런 반응들이 한국 축구를 위한 해결책일까.

한국 축구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면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한국 축구를 걱정하는 이들이라면 이렇게 한국 축구가 흔들리고 있을 때 응당 자국리그 발전과 유소년 육성에 대한 뼈저린 목소리를 내야 한다. K리그 경기장 가기 캠페인을 벌여 인증샷을 남겨야 정상이다. 자국리그가 탄탄하지 않은데 대표팀이 잘 될 리 없다는 건 한국 축구를 걱정하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자국리그 발전과 유소년 육성에 대한 지적은 쏙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운 건 ‘신태용 아웃’과 ‘김호곤 아웃’ 뿐이다. 신태용 감독과 김호곤 기술위원장이 사라지면 한국 축구가 잘 돌아가리라고 믿는 모양이다. 참 단순하다. 그런데 이런 이들에게 “K리그 경기장으로 좀 오시라”고 하면 온갖 변명이 늘어난다. 재미없고 심판 수준도 낮고 매수도 하고 그래서 싫단다. 그러면 우리 이 문제점을 하나 하나 경기장에 가 고쳐보는 건 어떨까. 우리 한국 축구가 잘 되길 바라는 사람들 아닌가.

한국 축구가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면 유소년 축구 육성이 단연 1순위다. 그리고 K리그 발전이 2순위다. 김호곤 기술위원장 사퇴는 37위쯤, 신태용 감독 사퇴는 65위쯤 될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축구를 정말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1순위와 2순위는 관심도 없이 37위와 65위만 부르짖는다. 인터넷에 악의적인 댓글을 달고 조금 더 열정적으로 직접 축구협회 건물 앞에 가 “적폐청산하라. 신태용과 김호곤은 나가라”고 외치면 한국 축구를 위해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만 같다. 반대로 묵묵히 K리그 경기장을 찾아 관중석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더딘 방법을 택한 것만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결국 K리그가 발전하는 것과 유소년 축구가 탄탄해지는 것 뿐이다. 느려 보여도 이 방법을 생략한 채 한국 축구가 발전하는 길은 없다.

마음에 안 드는 누군가가 내 눈앞에서 떠나면 발전할 정도로 축구가 만만한 게 아니다. 자국리그는 텅텅 비어있는데 인터넷 댓글로 축구 발전을 위한답시고 악플을 달고 축구협회 건물 앞으로 달려가 소리 친다고 뭐가 달라질까. 공항에 가 항의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런 것도 한두 번이다. 이게 축구 발전을 위한 해결책처럼 비춰져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건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한 37순위와 65순위의 일일 뿐이다. 정말 한국 축구가 걱정이 되거든 자국리그에 관심을 갖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한 방법이다. 자국리그 경기가 열리는 날 한국 축구가 걱정된다고 특정 장소에 모여 집회를 하는 모습을 실소 없이 바라보긴 어렵다. 이건 마치 시험을 앞두고 독서실에 가 공부를 하지 않고 교회에 가 “이번 시험 잘 보게 해주세요”라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과연 이런 반응들이 한국 축구를 위한 해결책일까.

20년 전 우리, 그래도 문제점은 알았다

우리는 지금껏 대표팀이 부진할 때마다 그래도 ‘자국리그를 살려야 한다’거나 ‘유소년 축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입바른 소리를 하며 꾸역꾸역 버텨왔다. ‘XXX 꺼져’ ‘XXX 모셔와’ 정도로 단순하게 이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표팀이 부진할 때마다 그래도 “K리그 좀 챙기자” “유소년도 중요하다”고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대표팀이 참사 수준의 경기를 펼치면 ‘곧 <백분토론>에 나와서 누군가 자국리그 이야기를 꺼내겠네’라고 예상 가능한 수준의 시나리오를 읊을 수 있었음에도 우리는 늘 이런 근본적인 지적에 귀를 기울였다. 뻔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가끔씩 잊고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가끔씩 터지는 대표팀의 참사는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교훈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어느 때보다도 자국리그와 유소년 축구를 외쳐야 하는 이 순간 아무도 이 두 가지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로지 관심이 있는 건 누가 ‘카톡’을 몇 시에 했고 그걸 답장을 했는지 말았는지 뿐이다. 그러는 사이 경남FC는 K리그 챌린지에서 우승을 확정지었고 K리그 클래식에서도 잔류를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 축구를 걱정하는 이들은 이런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사라져야 할 사람과 나타나야 할 사람만이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우리는 그래도 한국 축구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고민했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저 마음에 드는 사람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양쪽 편으로 갈라 싸우기만 한다. 차라리 <백분토론>에서 뻔하더라도 “K리그를 살립시다”라고 할 때가 그래도 더 건설적이었던 것 같다.

대표팀 감독 하나 바꾼다고 그 나라 축구가 발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K리그가 변하고 유소년 축구가 변하면 그 나라 축구는 천천히라도 반드시 발전한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충격적으로 탈락했을 때도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1996년 아시안컵에서 이란에 2-6 충격패를 당했을 때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앵무새 같지만 늘 우리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할 때마다 처방전으로 K리그와 유소년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20년 전 우리보다 훨씬 더 무식하고 단순하다. 20년 전 우리는 그래도 한국 축구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뭔지 알고 있었는데 20년 후 지금의 우리는 이런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과 해결책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대표팀 성적을 위해 K리그를 다시 르네상스 시대로 돌리자”는 환상에 빠져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월드컵과 대표팀 문제점 이야기가 나오는데 K리그와 유소년이 쏙 빠진 현상 자체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20년 전 우리는 그래도 현명했지만 지금은 너무 단순하다.

과연 이런 반응들이 한국 축구를 위한 해결책일까.

공항 갈 열정, 이번 주에는 축구장으로

자국리그의 중요성에 대한 칼럼을 정말 많이 썼다.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 자국리그 없이 대표팀이 강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관중 구걸하는 걸 이제는 정말 싫어하는 편인데 오늘 칼럼이 “축구 발전을 위해 K리그 경기장으로 오세요”가 아니라 “한국 축구를 걱정하려거든 근본적인 문제가 자국리그에 있다는 걸 잊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비춰지길 바란다. 가장 이상적인 건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내 “K리그가 발전해야 한다”거나 “유소년이 탄탄해야 한다”는 뻔한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래도 꾸준히 자국리그와 유소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유소년 축구장까지 가 달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으니 정말 한국 축구가 걱정된다면 주말에 가까운 K리그 경기장을 한 번 찾아보는 게 어떨까. 공항까지 쫓아갈 열정이 있으면 가까운 K리그 경기장도 좀 찾아주시라.

2002년 월드컵 향수에 젖어 있는 이들이여,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당시 붉은악마가 마지막으로 내건 카드섹션이 뭐였는지 잘 생각해 보자. K리그 없이는 다신 그런 4강 신화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한국 축구를 위한 근본적인 문제점을 살펴야 할 때다. 이번 주말 인터넷으로 악플을 달거나 협회 앞에 가 촛불을 드는 대신 나와 함께 K리그 경기장으로 가 보는 건 어떨까. 주말엔 축구회관 앞에 오가는 사람도 없는데 거기에서 메시지를 외치지 말고 경기장으로 같이 가자. K리그 경기장에는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엄한 곳에서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하느니 차라리 경기장에서 응원을 하다 경기 중간 중간 김호곤 기술위원장과 신태용 감독 욕을 하는 편이 더 메시지를 전하기 좋은 방법일 것이다. 나와 함께 ‘CU@K리그’를 실천하자. 그게 바로 한국 축구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내가 전하는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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