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지난 25일 밤 인천남동럭비경기장. IBK 기업은행 WK리그 2017 25라운드 인천현대제철과 이천대교의 경기가 열렸다. 이날 4-0 대승을 거둔 인천현대제철은 축제 분위기였다. 19승 4무 2패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남은 세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기 때문이다. 본부석 왼편에 자리 잡은 인천현대제철 서포터스는 기뻐했고 선수들은 5회 연속 정규리그 우승의 영광을 자축했다. 하지만 상대팀이었던 2위 이천대교 선수들은 고개를 떨궜다. 7경기 연속 무패(5승 2무)로 맹렬히 선두를 추격했던 이천대교는 이 대패가 실망스러울 법도 했지만 신상우 감독은 종료 후 선수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명문’ 이천대교의 충격적인 해체 소식

인천현대제철과 이천대교의 맞대결은 ‘원더매치’라는 이름으로 WK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빅매치다. 관심이 부족한 WK리그에 그나마 이슈라면 이슈인 유일한 경기다. 하지만 어쩌면 이 ‘원더매치’가 역사상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2002년 11월에 창단해 15년 역사를 자랑하던 한국 여자축구의 대표주자 이천대교가 전격적으로 팀 해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미 인천현대제철이 우승을 확정지은 상황에서 이천대교는 플레이오프를 통해 챔피언결정전에 올라야 다시 ‘원더매치’를 성사시킬 수 있다. 만일 이천대교가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실패한다면 더 이상의 ‘원더매치’는 세상에 없다.

이천대교는 고양대교 시절을 포함해 세 번이나 WK리그에서 우승을 거둔 명가였다. 2009년과 2011년, 2012년 WK리그 정상에 오르며 위용을 과시했다. 인천현대제철이 전폭적인 투자를 하며 5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가장 앞서나가는 팀이었다. 이후에는 인천현대제철과 양강 구도를 형성하며 WK리그를 달궜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는 3년 연속 준우승을 차지하며 여전한 경기력을 과시했다. 방황하던 여자축구 최고 스타 박은선도 영입했고 대표팀 출신인 골키퍼 전민경을 비롯해 심서연, 서현숙, 권은솜, 문미라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했다. 올 시즌에도 인천현대제철의 독주를 따라 잡을 유일한 대항마로 손꼽혔다.

하지만 지난 달 대교그룹이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했다. 2014년 여자배드민터 대교눈높이를 인천공항공사로 넘긴 대교그룹이 여자축구단까지 해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천대교 선수들은 이 소식을 언론 기사로 접해 충격은 더했다. “떳떳하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여자축구단과 배드민턴부를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으로 대교그룹이 수사까지 받아온 상황에서 해체 소식은 더한 충격이었다. 지난해 여주대가 여자축구부를 해체한 상황에서 최근 한양여대까지 해체를 결정했고 이천대교까지 문을 닫기로 하면서 여자축구계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올해 신생팀 경주한수원이 가세하면서 WK리그가 가까스로 8구단 체제를 갖췄지만 이천대교가 또 다시 해체를 선언하며 내년 시즌 WK리그 운영에도 차질을 빚게 됐다.

WK리그 명문 이천대교는 올 시즌을 끝으로 해체할 예정이다. ⓒ여자축구연맹

“마지막이 올수록 선수들이 불안해한다”

더군다나 이천대교는 한국 여자축구를 상징하던 팀이어서 충격은 더 컸다. 여자축구연맹이 급한대로 내년 시즌에는 구단을 위탁 경영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 많다. 선수들이 충격을 받자 대교그룹 강영중 회장은 지난 수원시시설관리공단과의 홈 경기를 찾아 선수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내년 시즌에도 8개 구단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할 테니 선수들은 경기에만 집중해 달라.” 하지만 그의 말에는 대교그룹이 계속 팀을 운영할 것이라는 약속은 빠져 있었다. 인수 대상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에 불과했다. 연맹의 위탁 경영을 논의하겠다는 말 정도였다. 선수들은 이 과정에서도 7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하며 끝까지 인천현대제철을 추격했다. 이 정도면 엄청난 투혼이었다.

그리고 지난 25일 인천현대제철과의 원정 승부가 펼쳐졌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WK리그의 ‘원더매치’였다. 신상우 감독은 이 경기 전부터 걱정이 많았다. “팀 분위기가 너무 오락가락한다. 팀이 없어진다는 이야기에 선수들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 그래도 해체 소식을 접한 초기에는 ‘어떤 방식으로건 잘 해결되겠지’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선수들이 점점 불안해하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이천대교는 선두이자 ‘압도적 1강’ 인천현대제철과 정면승부를 펼쳤다. 인천현대제철 입장에서도 홈 경기였고 이 경기에서 승리를 따내면 남은 경기에 상관없이 자력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는 터라 경기장 분위기는 후끈후끈했다. 하지만 원정팬 구역에는 세 명의 팬이 이천대교 유니폼을 걸어놓고 차분히 경기를 지켜봤다. WK리그를 양분하던 팀의 상반되는 분위기였다.

이 셋은 이천대교의 열정적인 팬이었다. 집은 강원도였지만 이천대교를 응원하기 위해 홈과 원정 경기를 모두 챙기는 이들이었다. 배태석(34세) 씨는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원더매치’가 사라진다. 그나마 WK리그가 이 라이벌전으로 이슈를 몰고 있는데 이천대교가 없어지면 이제 인천현대제철이 더 독주를 할 것이다. 그만큼 리그에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응원해야 한다고 생각해 오늘도 경기장에 왔다. 같이 응원할 사람들이 많으면 더 신나게 소리를 지를 텐데 저쪽은 축제 분위기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함께 온 친구 조명신(35세) 씨도 안타까워했다. “지난 이천 홈 경기 상대가 수원시설관리공단이었는데 그 팀 팬들도 우리팀 해체 반대 걸개를 걸어주셨다. 너무나 고맙고 가슴이 아팠다. 그 어떤 WK리그 팀 팬도 이 해체를 반기지 않는다.”

WK리그 명문 이천대교는 올 시즌을 끝으로 해체할 예정이다. ⓒ여자축구연맹

우승 축제가 될 수 없었던 현장

마지막이라는 걸 예감했던 탓일까. 이천대교는 전반에만 무려 세 골을 허용하며 무너졌다. 그리고 후반에 한 골을 더 내줬다. 경기는 이미 0-4 이천대교의 대패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규리그 우승 트로피도 인천현대제철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천대교는 끝까지 한 골이라도 넣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박은선은 최전방에서 몸을 날리며 헤딩을 했다. 0-4 대패로 상대의 우승이 확정됐지만 신상우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인 채 그라운드를 빠져 나오는 선수들을 위로했다. “고생했어. 챔피언결정전에서 다시 한 번 ‘원더매치’하자.” 신상우 감독은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비록 대패했지만 그래도 네 골을 실점하고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우리 선수들에게 너무 고맙다.”

신상우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선수단 분위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동기부여가 잘 될 리 없었고 선수들이 너무 긴장해 있는 기량을 다 보여주지 못했다. 올해 인천현대제철과 네 번의 ‘원더매치’를 치러 모두 졌다. 한 번의 승리도 선사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감독으로서 선수들에게 미안하다. 해체 소식은 접했지만 아직 정확한 통보가 없어 선수들에게 미래에 대해 뭐라 준비할 시간을 주지도 못했다. 이 멋진 라이벌전이 사라진다면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운할 것 같다.” 신상우 감독은 대화를 나누던 도중 울컥하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원더매치’는 이렇게 쓸쓸히 끝이 났고 이천대교 선수들은 쓸쓸히 경기장을 빠져 나갔다. 이제 이천대교가 다시 한 번 ‘원더매치’를 성사시키려면 플레이오프에서 3위 팀을 꺾고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해야 한다.

인천현대제철도 마냥 정규리그 우승 축제를 즐길 수만은 없었다. 영원한 라이벌 이천대교가 해체 통보를 받은 상황에서 우승의 기쁨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컸다. 최인철 감독도 우승 소감을 묻는 질문에 가장 먼저 이렇게 답했다. “우승을 해서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우승을 확정짓는 상대가 이천대교였다는 건 안타깝다. 올해 우리는 또 다시 역사적인 우승을 차지했지만 이천대교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천대교가 있어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있어 이천대교가 있을 수 있었다. 라이벌이 있어 우리가 WK리그 선두주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한국 여자축구 발전을 위해 좋은 소식이 많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지만 그럼에도 한숨을 쉬어야 하는 최인철 감독의 감정은 복잡 미묘했다. 그게 바로 WK리그의 숙명이었다. 그리고 이 복잡 미묘한 역사적인 현장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현장 취재진도 <스포츠니어스> 뿐이었다.

WK리그 명문 이천대교는 올 시즌을 끝으로 해체할 예정이다. ⓒ여자축구연맹

어쩌면 마지막이었을지 모를 ‘원더매치’

이날 3도움을 올리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이민아도 이천대교 선수들을 걱정했다. 우승에 대한 기쁨보다도 라이벌의 해체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라이벌전이 있어야 관심도 더 늘어나는 법이다. 만약에 이천대교가 없어지게 되면 더 관중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고 아쉽다. 올해 새로 한 팀이 생겨서 8개 팀으로 잘 운영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천대교가 없어진다고 하니 같이 뛰는 우리들도 아쉬운 마음이 크다. 많이 안타깝다.” 한 팀의 우승이 확정되던 의미 있던 날 밤이었지만 그들은 어쩌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걱정과 안타까움이 공존했다. 그렇게 어쩌면 마지막이었을지 모를 ‘원더매치’의 밤은 깊어만 갔다. 정규리그 2위가 유력한 이천대교는 남은 세 경기를 통해 2위나 3위를 유지한 뒤 플레이오프에서 한 팀을 꺾고 챔피언결정전에 올라야 ‘진짜 마지막 원더매치’ 두 경기를 더 치를 수 있다. 정규리그에서의 ‘원더매치’는 더 이상 없다.

footballavenue@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