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축구] 교복이 된 국가대표 유니폼


이슬기
나에겐 이 옷이 그 어떤 명품보다도 소중했다. ⓒ이슬기

‘슬기로운 축구’는 전직 K리그 선수 출신인 이슬기 SPOTV 해설위원의 공간입니다. 대구FC에서 데뷔해 포항스틸러스와 대전시티즌, 인천유나이티드, FC안양 등 다양한 팀에서 활동했던 그는 현재는 은퇴 후 SPOTV에서 K리그 해설을 맡고 있습니다. 선수 시절 경험과 해설위원의 냉철한 시각을 덧붙여 <스포츠니어스> 독자들에게 독특하고 신선한 칼럼을 전달합니다. -편집자주

[스포츠니어스 | 이슬기 객원 칼럼니스트] 1996년 처음 축구부에 들어가 축구를 시작한 뒤 1년에 한두 번 정도 모이는 친척들 사이에서는 항상 내 이야기가 오갔다. 특히나 큰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슬기 국가대표 한 번 해야지. 우리 가족 중에서도 국가대표 한 번 나왔으면 좋겠다.” 딱히 부담되는 이야기는 아니었고 진심으로 나를 응원해 주는 말씀이셨다. 하지만 친척들은 그래도 내심 내가 축구를 잘해 국가대표까지 한 번 됐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큰 아버지의 바람은 생각보다 빨리 이뤄졌다. 성인 국가대표는 아니었지만 내가 축구를 시작한지 3년 째인 1998년 유소년 대표팀에 선발됐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에서 60명의 초등학생을 선발해 경남 함안에 모여 훈련을 했는데 나는 그때를 여전히 잊을 수 없다. 당시 전국에서 가장 축구를 잘한다는 선수들이 다 모였었다. 서울 최고라던 고차원과 경기도 랭킹 1위 안상현, 대전에서 가장 잘 나간다던 이용래, 전북의 조동건, 전남의 조용태 등이 그때 다 선발됐었다. 사실 이 선수들과 함께 뛴다는 사실에 신기하기도 하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그러면 왠지 지는 것 같아 최대한 말도 안 섰던 기억이 난다.

이때 태극기가 달려 있는 파란색 나이키 트레이닝복을 받았는데 훈련을 하던 2주 동안은 물론 그 이후에도 나는 매일 이 옷만 입고 다녔다. 동네에서 이 옷은 슈퍼맨의 ‘빨간 빤스’ 만큼이나 위력적이었다. 성인 대표도 아니고 전국에서 60명이나 뽑은 유소년 대표였지만 태극기가 붙어 있는 이 트레이닝복은 마치 훈장과도 같았다. 학교에 갈 때도 이 옷만 입고 갔다. 유소년 대표팀 훈련을 마치고 이 옷을 입고 학교에 가니 내 이름이 정문에 걸려 있었고 나는 바로 학교로 들어가지 않고 ‘내가 바로 여기 이름이 걸려 있는 이슬기야’라는 생각으로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누구라도 태극마크를 단 나를 봐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날 알아봐주지 않아 슬픈 마음에 학교에 들어가니 축구부 감독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슬기야 빨리 교장실로 가봐.” 그날 처음 교장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교장선생님께서는 “학교를 빛내줘 고맙다”라는 말과 함께 “꼭 국가대표가 돼 교장선생님 이름도 한 번 거론해 달라”고 하셨다. 국가대표 트레이닝복을 입고 학교 정문에는 내 이름이 걸려 있고 교장선생님과 단 둘이 대면하니 주변 친구들은 다들 나를 부러워했다. 나 역시 그땐 자신감이 넘쳤고 부모님도 많이 기뻐하셨다. 유소년 대표팀이었을 뿐이지만 나는 마치 국가라도 빛내고 돌아온 것처럼 내가 태극마크를 달았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아마 학교에서 카퍼레이드를 하자고 해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이 옷이 다 닳을 때까지 교복처럼 입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표팀이었다. 결국 성인 대표선수는 해보지 못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프로에서 국가대표까지 가보진 못했으니 당연히 국가대표 선수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래서 성인 대표팀에 뽑힌 적이 있는 부산아이파크 임상협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도대체 국가대표가 되면 기분이 어때?”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기분이 좋았는데 잠이 너무 안 와서 문제였어요. 대표팀에서 훈련을 해야 되는데 너무 설레서 잠이 하나도 안 오더라고요.” 프로 무대에서도 긴장하지 않던 이들이 국가대표만 가면 이렇게 긴장이 되나 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이용래와 조동건을 처음 마주했던 것처럼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박창선 감독님과 밥을 먹을 때 감독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일 당장 축구를 그만두더라도 오늘은 국가대표 꿈을 잃지 마.” 그때 들었을 때는 잘 몰랐는데 프로선수 생활을 하면서는 이상하게도 그 말이 잊혀 지지 않았다. 당장 국가대표에 갈 실력은 아니어도 운동선수에게는 늘 국가대표라는 최고의 목표를 품고 있어야 한다. 국가대표는 모든 축구선수의 꿈이자 목표이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큰 동기부여다. 그리고 그 꿈을 이뤄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에 서게 된 이들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걸 얻게 된다. 국가대표가 되면 수당이 하루에 5만 원이라는데 태극마크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오늘(31일)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이란과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경기를 펼친다. 물러설 수 없는 중요한 승부다. 태극마크를 달고 있으니 반드시 그에 걸맞는 멋진 경기를 펼쳐줬으면 한다. 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대표해서, 국가를 대표해서 꼭 좋은 경기를 펼쳐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또 어딘가에서 닳고 닳은 대표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자랑스러워 하는 나같은 어린 선수들이 그 꿈을 키워나갈 테니까 말이다. 태극마크가 새겨진 유니폼은 슈퍼맨의 ‘빨간 빤스’보다도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비록 국가대표가 되지 못해 이름을 거론하진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칼럼으로 소개하고 싶은 이가 한 명 있다. “숭곡초등학교 박기봉 교장선생님, 제가 국가대표는 못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칼럼을 통해서라도 거론합니다. 그때 플래카드까지 걸어주시고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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