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다 이란이 훨씬 더 강하다. ⓒ이란축구협회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2002 한일월드컵 폴란드와의 조별예선 첫 경기가 열리는 2002년 6월 4일 새벽 부산. 전국에서 모인 붉은악마들은 바로 경기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경기는 저녁이었는데 해가 막 뜨기 시작할 무렵 붉은악마들은 해운대에 속속 모였다. 전국 각지 붉은악마 지부에서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온 이들부터 개별적으로 온 이들로 해운대 해수욕장은 가득 찼다. 방송사에서도 이 모습을 찍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들이 꼭두새벽부터 해운대에 모인 이유는 그럴싸 했다. 해돋이를 보며 한국의 월드컵 첫 승을 기원한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하나 돼 이뤄낸 월드컵 첫 승

하지만 이건 뻥이었다. 진짜 중요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당시 폴란드 대표팀 선수들이 묵는 호텔이 해운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다 같이 모여 이 호텔 앞에서 꽹과리를 두드리고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 구호를 외쳤다. 이날 한국을 상대하는 폴란드 대표팀 선수들을 이른 아침부터 깨워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당시 호텔 앞에는 경찰이 진을 치며 삼엄한 경호를 했지만 그들도 다 한국 사람이었다. “이 선만 넘지 마시고 마음껏 소리쳐 주세요. 오늘 한국이 이겨야죠.” 경찰들도 다 우리 편이었다.

당시 폴란드 숙소에서 그들의 숙면을 방해한 붉은악마는 잠깐 쉬다가 행진을 해 경기가 열리는 부산아시아드까지 갔다. 그런데 차도에서 신호가 걸리면 버스 기사가 지나가는 붉은악마에게 “잠깐 버스에 타보라”고 손짓했다. 영문을 몰라 당황하며 이 붉은악마가 버스에 올라타면 이 버스 기사는 지폐 투입구 500원 짜리 거스름돈 버튼을 계속 눌렀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 건 없고 이걸로 음료수라도 사 먹어요.” 수많은 팬들이 상대팀 잠을 깨우겠다고 새벽부터 몰려들었고 경찰은 이를 귀엽게 묵인해 줬다. 버스기사 아저씨는 잔돈까지 털어 응원단에게 음료수를 샀다.

2002년 월드컵 첫 승은 이랬다. 그냥 단순히 선수들만 축구를 잘해서 이뤄낸 게 아니었다. 오늘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간절함이 모든 국민의 마음 속에 있었다. 당시 대표팀은 그저 축구팬 몇 명이 응원하는 팀이 아니었다. 그리고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붉은악마는 모두 놀랐다. 이전까지 골대 뒤 붉은악마의 전유물인 것만 같았던 붉은 물결이 일반 관중석에도 넘실댔기 때문이다. 경기장을 같은 색으로 물들이는 건 한국에선 지금껏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당시 한국을 상대했던 네덜란드 팬들이 경기장을 오렌지 물결로 물들였을 때 우리는 경악하면서 부러워했지만 우리 땅에서 이런 모습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때다.

1996년 아시안컵 8강 한국과 이란의 경기 모습. ⓒ아시아축구연맹

A매치가 썰렁하다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두 경기가 남았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고 우리의 상황도 좋지 않다. 오는 31일 이란을 홈에서 상대하고 내달 5일에는 우즈베키스탄 원정경기를 치러야 한다.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일궈낸 한국이 자칫하면 월드컵에 나가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됐다. 이영표 해설위원의 말처럼 한국이 월드컵에 나갈 가능성은 절반이 채 안 되는 것 같다. 더군다나 상대는 우리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란과 홈 이점을 안고 싸우는 우즈벡이다. 정말 큰 위기다. “어떻게든 월드컵 본선은 가겠지”라고 희망 섞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엄살을 피우는 게 아니라 진짜 큰일 났다.

상대가 이란과 우즈벡이라는 걸 빼고도 더 불안한 건 따로 있다. 바로 대표팀을 향한 열기가 예전 같이 않다는 점이다. 나는 이게 진짜 두렵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아무리 안방에서 열렸다고 하더라도 “우리도 이제는 한 번 이겨보자”는 열망이 대단히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표팀 경기에 대한 관심이 싸늘하다. 한국 축구의 성지인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A매치를 해도 관중석이 반이나 차면 다행이다. 대표팀 경기를 한다고 시내에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없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서울광장의 길거리 응원 역시 이제는 촌스러운 콘텐츠일 뿐이다.

실제로 대한축구협회는 이를 체감하고 있다. 2014년 사업 수익으로 793억 원을 벌어들인 협회는 2016년 94억 원이나 줄어든 699억 원을 버는데 그쳤다. 2015년에는 111억 원의 적자를 냈고 2016년에도 34억 원의 적자가 생겼다. A매치 관중수가 줄어들었고 텔레비전 시청률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텔레비전 중계권료는 낮아지는 추세고 당연히 스폰서도 예전 같지 않다. 단순히 예전 만큼 A매치를 할 때 길거리가 한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제 수치로도 이런 현상은 증명이 된다. 이란보다 더 무서운 건 이렇게 우리들 사이에서 무관심이 생겨나고 “알아서 월드컵 정도는 나가겠지” “못 나가도 그만이지”라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1996년 아시안컵 8강 한국과 이란의 경기 모습. ⓒ아시아축구연맹

훨씬 더 전투적이어야 한다

2006년 독일월드컵 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이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면 세상이 망하는 줄 알았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위기가 오면 다들 “월드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가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다들 응원하는 마음이야 있겠지만 예전처럼 전투적이지 않다. 유럽 축구가 자리 잡은 영향일까, 아니면 스포츠 말고도 즐길 게 너무 많은 우리의 유흥거리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월드컵 4강을 경험해 월드컵 본선 진출 정도는 시시하다는 생각 때문일까. 나는 이런 모든 요소가 다 겹쳤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이를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월드컵에 못 나가도 괜찮은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이나 2000년대 초에 이런 상황이 왔다고 가정해 보자. 마지막 2연전에서 월드컵 본선 진출 여부가 갈리는데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다. 9시 뉴스 첫 꼭지로 대표팀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고 선수들이 이동하는 곳마다 팬들이 바글바글할 것이다. 경기가 열리기 한참 전부터 입장권은 매진이 되고 암표도 성행할 테다. 경기장까지는 소리가 들릴 리 없지만 서울시청 앞 광장을 가득 채운 이들이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을 것이다. 전국 거리는 한산했을 거다. 왜? 월드컵을 못나가면 우리는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이란전을 앞두고는 침착해도 너무 침착하다. 나는 이게 무섭다. 대충 무승부쯤 하고 뭐 그래도 그냥 결과를 받아들일 이 분위기가 정말 무섭다.

좀 더 전투적이고 간절해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전국민이 붉은 옷을 입고 거리를 가득 채워도 이란에 이길까 말까다. 상대가 태클 한 번을 하면 모든 관중이 죽일 듯 야유하는 험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냥 한국의 최고 스타들이 출전하는 올스타전 같은 축제 분위기가 벌어져서는 안 된다. 손흥민이나 기성용 사진 한 방 찍고 골 넣으면 좋아하고 실점하면 아쉬워하는 정도의 분위기로는 절대 이란을 이길 수 없다.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죽을 힘을 다해 뛸 때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물론 텔레비전을 통해 이를 지켜보는 이들 역시 똑같이 뛰어야 승산이 있는 경기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전력상 이란은 한국보다 잘한다. 이걸 뒤집으려면 우리는 전국민이 뛰어야 하지 않겠나.

1996년 아시안컵 8강 한국과 이란의 경기 모습. ⓒ아시아축구연맹

이건 축제가 아니라 전쟁이다

전투적이고 간절한 분위기를 만들지 못한 협회의 능력도 아쉽다. 협회 SNS를 보면 참 말랑말랑하다. 대표팀 훈련 영상을 소개하는데 참 훈훈하고 상큼하다. 이동국의 예능인 면모를 소개하기도 하고 차두리와 김남일, 이동국 사이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재미있게 소개하기도 한다. 이걸 수십만 명이 보면서 “어머 귀엽다”고 한다. 이걸 보고 있으면 마치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비장한 음악을 깔고 애국심을 자극하며 무조건 우리가 월드컵에 가야하는 이유를 전투적으로 포장할 때다. 우리가 지금 얼마나 큰 위기에 봉착해 있는지 자극해야 한다. 지금 소위 말하는 ‘얼빠’들 팬심 잡겠다고 ‘귀욤 귀욤’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뛰었던 선배들, 그리고 스위스 월드컵 때의 고생, 1986년 멕시코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일전 등으로 전국민의 전투력을 끌어 올려야 한다.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면 당장 이 몸값 비싼 선수들에게는 별로 타격이 없지만 유소년 축구 선수들에 대한 투자가 줄고 한국 축구가 급속도록 위축된다고 겁 아닌 겁도 줘야 한다. 지금보다는 훨씬 더 전투적인 분위기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협회도 반성해야 한다. 홈에서 이란을 잡고 원정에서 우즈벡을 잡아 월드컵 본선에 나가려면 이 정도 분위기로는 안 된다. 협회가 경기 당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붉은 티셔츠를 제공한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는 많이 약하다.

90분 동안 그라운드에서는 선수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신태용 감독의 전술과 용병술을 믿는다. 그런데 이번 경기는 선수들만 뛰는 게 아니다. 경기에 나서는 11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관전자’가 돼선 안 된다. 최근 들어 대표팀 경기의 인기가 예전보다 줄었다는 걸 감안해도 이번 이란전을 앞둔 분위기는 무서울 정도다. ‘밉상’ 케이로스 감독이 또 한국에 왔는데 뭐 여기에 엄청나게 흥분하는 이들도 별로 없다. 16년 전 해운대 앞에서 꽹과리를 두드리며 폴란드 선수들의 새벽잠을 깨웠던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 전투를 앞두고 있는데 이렇게 비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명심하자. 이건 축제가 아니라 전쟁이다. 다들 연장 챙기자. 꽹과리도 꺼내고 장롱에 16년 묵힌 붉은 티셔츠도 꺼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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