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기훈은 미디어와의 소통을 소홀히 한 적이 없습니다. ⓒ프로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K리그를 경험하면서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 있다. “K리그에는 스토리가 부족해.” 그리고 나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K리그와 관련한 스토리를 가장 많이 소개했다고 자부한다. K리그 무대에서 딱 한 경기에 나선 보육원 출신 선수의 이야기를 소개한 적도 있고 복싱선수를 하다 고등학교 무렵 그만두고 K리그에 극적으로 입성한 선수를 사례를 보도한 적도 있다. 백혈병과 싸워 이겨낸 선수 이야기, 청각 장애를 딛고 그라운드에 선 선수의 사연도 소개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말한다. “K리그는 스토리가 부족해서 흥행을 못하는 거야.”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스토리를 즐길 줄 모르니 아직도 스토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

양동현과 조성환, 다큐로 받아들일 것인가

전북현대 조성환을 향한 포항스틸러스 양동현의 설전과 이 과정은 대단히 흥미로운 스토리다. 선후배 간의 예의를 무척이나 중시하는 한국 스포츠계에서 후배가 SNS로 선배를 향해 쓴소리를 한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 둘은 이미 이전에 두 번이나 경기 도중 충돌한 전례가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흥미롭게 생각하고 이 두 선수를 따로 취재하기도 했다. 양동현은 나에게 “그 사람(조성환)은 모두와 충돌한다”고 했고 조성환은 “그의 발언에 특별히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얼굴 붉힐 만한 일을 취재하는 건 기자 입장에서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이 스토리를 축구팬들에게 제대로 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두 선수 모두에게 양해를 구했다.

양동현은 물론 조성환도 최대한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예의를 갖춰 답변을 보냈다. 그라운드에서의 논란이 있는 행동과는 별개로 반갑지 않은 연락에도 성심성의껏 답변을 준 조성환에게도 참 고맙다. 양동현이 SNS와 인터뷰를 통해 그라운드 밖에서 펀치 두 방을 날렸고 조성환은 이를 교묘하게 피했다. 오랜 만에 K리그에서 제대로 된 판이 한 번 벌어지는 듯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은 팬들이 이 두 선수가 격돌할지도 모를 오는 9월 19일 경기를 벌써부터 기대하는 거였다. 상대를 패러디한 사진과 영상이 등장하고 서로 동료들이 한 마디씩 하고 언론은 이를 연이어 포장하기에 딱 좋은 스토리였다. 팬들은 경기가 다가올수록 전의에 불타면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건 결국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양동현도 과거 거친 플레이로 퇴장 당했으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이른바 ‘물타기’가 이뤄졌고 팬들의 언쟁은 돌고 돌아 결국 전북의 승부조작으로 이어졌다. 위트와 풍자를 기대했는데 결국 “양동현이 그런 말한 자격이 있느냐”로 시작해 ‘매북’으로 끝나는 지겨운 뫼비우스의 띠였다. 그사이 일부 언론에서는 이걸 SNS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행동으로 치부했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포장하는 이들은 단 한 곳도 없었다. K리그를 잘 모르는 이들이라면 어떤 선수가 경솔하게 SNS로 한 마디 해 팬들끼리 의미 없는 싸움한 걸로 받아들여지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우리는 또 이렇게 흥미진진한 K리그 스토리 하나를 경솔한 SNS 설전으로 끝내고 말았다.

조성환에 대한 작심 발언을 쏟아낸 양동현 ⓒ 한국프로축구연맹

늘 ‘매수’와 ‘패륜’, ‘개랑’으로 끝나는 논쟁

그리고 어제(9일) 수원삼성과 FC서울의 슈퍼매치를 앞두고 염기훈의 발언이 또 한 번 논란이 됐다. 기자회견에 나선 염기훈이 “우리 팬들은 서울 원정에 많이 가시는데 서울 팬들은 우리 경기장에 많이 안 오시더라. 이번만큼은 서울 팬들도 많이 오셨으면 좋겠다”고 한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많은 이들은 염기훈이 상대를 향해 예의 없이 과도하게 도발했다고 지적했다. 여러 축구 커뮤니티는 염기훈의 발언 하나로 거센 논쟁이 펼쳐졌다. 물론 이 논쟁을 펼친 이들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결국 슈퍼매치를 앞두고 전의를 불태우고 가볍게 도발하려던 염기훈의 의도와는 다르게 ‘불편러’들은 ‘패륜송’까지 언급하며 염기훈의 말에 진지하게 반박했다.

예민해도 너무 예민하다. 도발의 끝이 항상 ‘매수’와 ‘패륜’, ‘개랑’으로 끝나는 이 현실이 아주 슬프다. 염기훈의 발언을 가볍게 생각하고 위트 있게 받아칠 방법은 없었을까. 프로야구계에서는 선수가 무슨 논란을 일으키거나 사고를 치면 팬들이 선수 이름과 관련해 별명을 자주 붙이던데 딱 그 정도로 염기훈에게 갚아줄 수 있는 이들은 없었을까. 슈퍼매치를 앞둔 기자회견장에서 이 정도 도발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팀도 훌륭한 팀입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할 거면 이런 기자회견 같은 거 안 해도 된다. 염기훈의 발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양동현도 할 말을 시원하게 했다. 조성환도 이 상황을 최대한 잘 피해가는 발언을 남겼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너무 궁서체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래놓고는 늘 “K리그에는 스토리가 부족하다”고 한다. 우리가 원하는 스토리가 뭔가. 10년 넘게 감동적인 이야기도 많이 써보고 역사적인 스토리도 많이 다뤄보고 서로 간에 얽힌 이야기도 풀어봤다. 하지만 훈훈한 이야기만 K리그의 스토리는 아니다. 거친 상대방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이나 홈 팬들의 열정을 칭찬하며 원정팬에게 도발한 것도 감동적인 것 이상의 흥미로운 스토리다. 그런데 스토리를 그렇게도 원하고 지금껏 K리그에 스토리가 부족했다고 하던 이들이 너무 불필요한 예의를 따지는 건 아닌가 싶다. 상대팀이나 상대 선수를 비판하는데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아쉽다. 흔히 말하는 ‘팩트 폭격’ 당하면 그 말 한 대상의 과거 언행을 아주 집요하게 물어뜯는다. 누군가에게 쓴소리를 하려면 리그에서 구설에도 오르지 않았어야 하고 징계를 당한 적도 없어야 하고 지금껏 줄곧 페어플레이만 해왔어야 할까. 이런 자격이라면 광주FC 윤보상 말고는 아무도 쓴소리 못한다.

조성환에 대한 작심 발언을 쏟아낸 양동현 ⓒ 한국프로축구연맹

아직도 K리그에는 스토리가 부족한가?

상황 그대로만 받아들이고 즐기는 문화가 됐으면 좋겠다. 너무 엄격하게 자격을 따지고 상대 기분을 따지고 예의를 따진다. 그러면 스토리는 절대 안 생긴다. 지금껏 K리그 역사에서 직설 화법으로 스토리를 만든 건 귀네슈를 향한 이천수의 발언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구단이 팬들을 끌어 모으는 건 연고지내 학교에서 배식 봉사 활동을 하는 것밖에 없다. 언론은 매일 선수의 해외 유출을 걱정하고 “이러면 K리그가 죽는다”는 소리만 한다. 그 소리는 1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행선지가 중동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팬들은 매일 “오늘은 관중이 몇 명이나 왔느냐”고 걱정만 한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흘렀는데 우리는 아직까지도 똑같은 소리만 한다. 스토리를 즐길 생각도 없으면서 매일 “K리그에는 스토리가 없다”고 한다. 아마 우리는 10년 뒤에도 K리그 선수의 해외 유출을 걱정하며 관중이 관중수를 따지고 스토리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비판을 조금만 가해도 인성과 예의를 따지는 ‘꼰대들의 무대’에서 화끈한 스토리는 죽어도 안 나온다. 기껏 도발하는 콘텐츠를 만든다는 게 K리그 개막 미디어데이에서 상대를 향해 다섯 글자로 도발해 달라는 것 정도다. “너.넨.내.려.와.” “그.렇.겐.안.돼.” 요새 처음 만난 남녀의 술자리에서도 이런 유치한 게임은 안 한다. 이런 인위적이고 유치찬란한 도발보다는 양동현의 발언 한 번,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조성환의 발언 한 번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화끈하지 않은가. 상대팀 팬의 부족한 화력을 지적하는 염기훈의 한 마디가 더 흥미롭지 않은가. 마음 같아서는 다음 맞대결에서 양동현과 조성환이 서로 한 판 붙었다가 눈싸움을 좀 했으면 좋겠고 염기훈은 서울 팬들을 향해 손을 귀에 갖다 대며 도발했으면 좋겠다. 물론 그러면 또 “예의 없는 K리그”라는 꼰대들의 외침과 자격, ‘매수’, ‘패륜’으로 귀결시키는 팬들의 예민한 반응만이 넘치겠지만 말이다.

“K리그에 스토리가 부족하다”고 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우리가 가진 스토리로 충분히 재미있게 즐기는 편이 낫다. 그러면 자연스레 스토리에는 힘이 생기는 법이다. K리그 팬들도 이 스토리를 즐기지 못하고 ‘꼰대 의식’을 발휘하는데 새로 유입될 팬들이 어떻게 이 스토리를 온전히 즐길 수 있단 말인가. <무한도전>같은 예능까지는 아니더라도 <썰전> 정도의 흥미로운 교양 프로그램 정도로는 받아들여야 하는데 우리는 이걸 늘 <그것이 알고싶다>로 받아들인다. 일주일 동안 화끈한 두 스토리가 우리들을 찾아왔다. 그런데도 정말 K리그에 스토리가 없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이 스토리를 즐기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잘 생각해 보자. 언제까지 스토리타령만 할 텐가. 양동현과 조성환의 깊게 패인 감정의 골, 염기훈의 발언 모두 우리가 즐기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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