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FA컵 32강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방송 화면 캡처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어제(9일) 열린 2017 KEB 하나은행 FA컵 8강전에서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K리그 챌린지 성남FC가 안방에서 내셔널리그 목포시청에 0-3 완패를 당한 것이다. 이 믿기지 않는 경기 결과는 대단히 충격적이다. 하지만 이건 약과다. 하루에 믿을 수 없는 결과가 연이어 쏟아져 나온 날이 있기 때문이다. 한 경기만 이래도 그 여파가 엄청난데 하루에 무려 다섯 경기가 이변의 연속이었다면 어떨까. 2004년 12월 14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지금이야 FA컵이 시즌 도중 양 팀 중 한 쪽의 홈 경기장에서 열리는 게 보통이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리그를 다 마무리한 뒤 한 곳에 모여 토너먼트 방식으로 FA컵을 치렀기 때문이다. 2004년 12월 14일 남해와 통영, 함안, 마산, 창원 등 경상남도 일대에서 일제히 FA컵 32강전이 치러졌고 이 날은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믿기지 않는 경기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승부차기 끝에 전주대를 간신히 이긴 수원삼성 정도가 체면치레를 한 날이었다. 도대체 이 날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2004년 12월 14일 인천유나이티드 1 (4-5) 1 인천한국철도

실업축구 인천한국철도는 원래부터 ‘프로 킬러’라는 별명을 달고 있었다. 1999년 FA컵에서 수원삼성을 1-0으로 제압했던 한국철도는 2001년에도 수원삼성을 2-0으로 격파했던 바 있다. 이 대회 16강에서는 전남드래곤즈를 승부차기 끝에 5-4로 꺾기도 했던 인천한국철도는 아마추어 팀으로는 최초의 FA컵 8강에 오르기도 했다. 어쩌면 2004년 12월 14일 인천한국철도의 상대가 인천유나이티드였을 때 한 번쯤은 이변을 예상해 봤어야 한다. FA컵에서 이미 축구계를 깜짝 놀라게 할 성과를 냈던 인천한국철도가 신생팀 인천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했으니 인천유나이티드가 도전자 아닌 도전자 입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경기에 출장한 인천유나이티드 선수들의 면면을 지금 살펴보면 입이 쩍 벌어진다. 김이섭과 김학철, 이상헌, 임중용, 서기복, 전재호, 이정수, 이근호가 선발 명단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교체로 나온 선수들이 라돈치치와 황연석, 노종건이었다. 이 정도면 역대 인천유나이티드 레전드 올스타쯤 된다. 하지만 로란트 감독 후임으로 장외룡 감독대행이 이끌던 인천유나이티드는 후반 18분 서기복의 선취골을 지켜내지 못했고 결국 후반 종료 직전 통한의 동점골을 허용했다. 그리고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마침내 인천한국철도는 또 한 번의 ‘언더독’을 선보였다. 승부차기 끝에 5-4 승리를 거두고 FA컵 16강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수원삼성을 두 번이나 이기고 전남까지 꺾었던 그들은 이렇게 또 한 번 프로팀을 상대로 ‘프로 킬러’다은 면모를 선보였다.

2004년 12월 14일 대구FC 1-3 김포할렐루야

2004시즌 K리그 13개 팀 중 10위를 차지한 대구FC가 2004년 K2리그 후기 최하위에 머문 김포할렐루야를 상대로 어려운 경기를 펼칠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없었다. 김포할렐루야는 K2리그에서도 손에 꼽히는 약체였기 때문이다. 해체설이 나올 정도로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대구FC 박종환 감독은 김포할렐루야와의 경기를 준비하면서 2004 시즌 도움왕 홍순학을 포함한 주전 멤버들을 곳곳에 포진시켰다. 송정현과 윤주일, 진순진, 나희근 등 쟁쟁한 선수들이 모두 선발 출격했다. K2리그 김포할렐루야를 상대하기에는 필요 이상으로 강한 베스트11처럼 보였다. 전반을 0-0으로 마친 대구는 후반 들어 김경일과 윤원일, 하은철까지 투입하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후반에만 무려 12개의 슈팅을 김포할렐루야 골문에 퍼부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도우셨을까. 대구가 날린 슈팅은 골문을 벗어나거나 김포할렐루야 골키퍼 허성원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김포할렐루야가 후반에 날린 5개의 슈팅 중 세 개가 득점으로 연결된 것이었다. 김포할렐루야가 후반에만 이주상과 성호상, 김철민의 골로 달아나는 동안 대구는 무려 12개의 슈팅을 날리고도 하은철이 한 골을 만회하는데 그쳤고 결국 경기는 김포할렐루야의 3-1 승리로 막을 내렸다. 김포할렐루야 선수들의 입에서 경기가 끝난 뒤 “할렐루야” 소리가 절로 나올 법한 경기였다. 경기 종료 직전 대구FC 관계자들은 경기장 주변이나 라커의 ‘빠따’를 모두 어딘가로 숨겨야 하지 않았을까.

칼을 들었을 때보다 '빠따'를 들었을 때가 훨씬 더 무서운 박종환 감독. ⓒ성남FC

2004년 12월 14일 성남일화 1-3 수원시청

성남FC와 수원FC의 이른바 ‘깃발더비’는 언제부터였을까. 두 팀이 K리그 클래식에서 마주한 2016년이 첫 맞대결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사실 이 두 팀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악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2004년 12월 14일은 바로 그 오랜 역사의 시작이었다. 당시 AFC 챔피언스리그 준우승과 삼성하우젠컵 우승 등 역사를 쓴 성남일화는 이 경기를 앞두고 차경복 감독이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감독대행 딱지를 단 이는 우리에게 지금도 너무나 익숙한 인물이다. 바로 이후 성남 축구를 이끈 김학범 감독이 그 주인공이었다. 당시만 해도 코치라는 직함이 더 어울렸던 그는 감독대행으로 수원시청을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주전인 장학영과 전광진 등을 비롯해 김철호, 마르셀로, 오승범, 백영철, 서혁수 등 쟁쟁한 선수들을 투입한 성남은 전반 16분 만에 수원시청 고재효에게 선취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후 후반 들어 김도훈과 이기형을 투입하며 총공세에 나섰지만 후반 14분 김한원에게 두 번째 골을 허용했고 이후 김도훈이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만회했지만 또 다시 이기부에게 골을 내주며 1-3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 모습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차경복 전감독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성남 김도훈이 후반 종료 직전에야 슈팅다운 슈팅을 날렸을 정도로 성남은 수원시청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K리그 역사상 가장 강하다던 그 시기 성남도 수원시청은 버거웠다.

2004년 12월 14일 포항스틸러스 0-1 동의대

나흘 전 수원삼성과 K리그 챔피언결정전 연장 혈투를 펼치며 준우승에 머문 포항스틸러스는 동의대와의 승부에서도 방심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오범석과 신화용, 남익경, 박원재, 황진성 등을 선발로 내세웠다. 2004년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동의대가 대학 무대의 강자는 아니었지만 포항은 전력의 상당 부분을 활용했다. 외국인 선수와 노장 등을 제외하고 1.5군 선수들로 팀을 꾸렸다. 동의대 김종부 감독도 선수들에게 “배운다는 마음으로 편하게 하라”면서 부담을 덜어줬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박빙이었다. 전반전에 오히려 동의대가 슈팅수에서 4-3으로 앞서 나가며 대등한 경기를 펼친 것이다.

그러다 이날 경기의 유일한 골을 넣은 건 동의대였다. 후반 19분 동의대 박천신의 오른쪽 코너킥을 공격수 탁경남이 오른발로 꽂아 넣으며 결승골을 뽑아냈다. 이후 포항은 황지수까지 투입하면서 경기를 뒤집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걸로 끝이었다. K리그 준우승 팀이 그리 유명하지 않은 대학교 팀에 발목을 잡히는 사상 초유의 이변이 발생한 것이었다. 김종부 감독은 지금도 이때를 기억한다. “내가 그때 우리 애들로 포항도 잡고 그랬어요.” 이미 K리그 준우승 이후 사의를 표명했던 포항 최순호 감독은 동의대에 굴욕을 당하며 팀을 떠나야 했다.

칼을 들었을 때보다 '빠따'를 들었을 때가 훨씬 더 무서운 박종환 감독. ⓒ성남FC

2004년 12월 14일 건국대 0-1 재능교육

재능교육은 순수 동호인으로 구성된 팀이다. 당연히 제대로 된 훈련을 할 수 없었다. 해가 긴 여름에는 오후 6시에 퇴근해 고등학교 축구부를 찾아가 연습경기를 부탁할 정도로 사정이 열악했다. 2003년 FA컵 본선 첫 경기에서는 포항스틸러스를 만나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0-5로 대패했다. 그리고 1년 동안 칼을 간 재능교육은 이듬해 FA컵에서 건국대를 만났다. 당시 건국대는 봄철 대학선수권대회를 우승할 정도로 강했다. 건국대가 FA컵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많았다. 당시 건국대에는 서동현과 배슬기, 심우연 등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재능교육의 재능은 남달랐다. 전반 37분 유일하게 대학시절까지 선수 생활을 했던 관리부 최근진 사원이 통렬한 선제골을 터뜨린 것이었다. 최근진 선수, 아니 사원, 아니 선수는 원진재 관리부 과장, 아니 감독으로부터 총애를 받는 선수였다. 한 골을 실점한 건국대는 이후 파상공세를 펼치면서 8개의 슈팅을 날렸지만 결국 재능교육 골키퍼 김천섭의 선방에 막혀 땅을 쳤다. 그리고 후반 막판 얻은 귀중한 페널티킥 또한 김천섭이 막아내면서 승부는 재능교육의 1-0 승리로 막을 내렸다. 2종클럽이 FA컵 본선에서 승리한 건 생활체육팀의 FA컵 출전이 처음 허용된 이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팀 이름 한 번 잘 지었다. 정말 재능교육은 재능이 넘치는 팀이다.

유럽 빅리그에서 하위권 팀의 반란이 일어나면 이걸 ‘언더독’이라고 하고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상위권 팀을 손가락질 하는 일이 앞으로는 없었으면 한다. 칼레가 하면 기적이고 목포시청이 하면 상대팀의 굴욕인가. 스포츠에서 하위 팀들의 반란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또 이런 ‘언더독’이 우리를 즐겁게 하기도 한다. 목포시청에 충격패를 당한 성남FC에 위로의 말과 함께 목포시청의 승리에도 축하를 보낸다. 스포츠에서는 이런 일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이렇게 약체가 강호를 꺾는 건 스포츠의 진정한 묘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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