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장을 찾은 많은 기자들의 모습.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지난 해 한 여자 연예인의 사과문이 화제였다. 어디에다 붙여도 다 통할 만큼 평이하고 구체적이지 않은 이 사과문을 네티즌들은 ‘만능 사과문’이라고 불렀다. 노상방뇨를 하다 걸렸어도, 불법 유턴을 하다 걸렸어도, 음주운전을 하다 걸렸어도 다 통용될 만한 사과문이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이랬다. “많은 분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러한 실수로 인해 많은 분들께 실망을 안겨드린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럽고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한 행동이나 글들이 많은 분들께 보여지고 있음을 명심하고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항상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저의 부족함으로 큰 실망을 드려 죄송합니다.”

요즘 K리그 경기장에서 경기 종료 후 ‘만능 사과문’에 버금가는 ‘만능 기자회견’이 펼쳐지고 있다. 프로축구연맹에서는 정관 ‘제36조 인터뷰 실시’ 항목에 경기 종료 후 15분 이내에 공식 기자회견을 하도록 명시했다. 인터뷰 대상은 미디어가 요청하는 선수와 양 클럽 감독으로 하고 인터뷰를 실시하지 않거나 참가하지 않을 경우에는 해당 클럽과 선수, 감독에게 50만 원 이상의 제재금도 부과할 수 있다. 팬들이 궁금했던 점을 기자들이 대신 질문하고 답변을 받아 전달하는 자리다. 이 기자회견을 통해 감독들은 오늘 경기 전술과 뒷이야기, 생각 등을 전달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기자회견을 듣지 않고도 대다수 감독들의 기자회견문을 쓸 수 있게 됐다. K리그 감독들이 하는 기자회견은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만능 기자회견문’을 한 번 써보려 한다. 아주 평이하고 구체적이지 않은 감독들의 기자회견은 큰 의미가 없다. 경기 내용과 결과는 다른데 매번 기자회견 내용은 똑같다. 재미가 없어도 너무 없다. 기자들은 이 자리에서 감독에게 별로 물으려 하지도 않고 감독들은 물어도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도 않는다. 팀이 이겼을 때와 졌을 때로 나눠 ‘만능 기자회견문’을 공개하겠다. K리그 감독들의 기자회견 답변은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 마나한 기자회견이 매 경기 의무적으로 열리고 있다. 당신이 응원하는 팀 감독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래 기자회견문을 읽어보시라.

기자회견장에 앉은 이들은 조금 더 솔직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해당 사진은 위 칼럼과 특정한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스포츠니어스

팀이 승리했을 경우

-먼저 오늘 경기 총평을 부탁드린다.

좋은 경기였다. 상대팀도 굉장히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지만 우리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거둔 승리였다. 승점 3점이 필요한 경기였는데 이겨서 기쁘다. 선수들이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플레이를 해줘 선수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선수들에게는 어떤 주문을 했나.

오늘 경기가 무척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선수들 스스로도 집중력을 잘 발휘해 준 것 같다.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선수들이 알아서 잘 준비한다. 특히나 주전들이 부상으로 빠져 힘든 상황이 될 수도 있었지만 나머지 선수들이 잘해줬다. 전반전이 끝나고 선수들에게 후반전에는 더 적극적으로 임하자고 했는데 선수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해줘 고맙다.

-최근 들어 경기력이 좋아지고 있다. 비결은 무엇인가.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준 결과다. 기복이 많이 줄어들었다. 또한 주전 선수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즌 초반에 비해 조직력이 살아난 것 같다.

-오늘 격돌한 상대팀의 어떤 점을 공략하려고 했나.

상대가 공격적으로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또한 상대 수비가 좋지만 포백 수비 뒷공간에 허점이 있어 공격수들에게 이 공간으로 많이 침투하라고 주문했다. 이 점이 잘 통한 것 같다.

-외국인 선수 XXX이 아직 제대로 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 기량은 뛰어난 선수인데 팀에 적응하려면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 봐야할 것 같다. 가진 능력은 충분하니 곧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몸 상태가 70%는 올라왔다. 선수가 이걸 이겨내야 더 좋은 선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경기에 임하는 각오는.

다음 상대인 XX도 굉장히 좋은 팀이다. 조직력도 좋고 선수 개개인의 능력도 좋다. 쉽지 않은 경기가 예상된다. 하지만 우리도 승점 3점을 따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오늘 경기도 이겨서 팀 분위기가 좋다. 남은 시간 동안 잘 분석해 다음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 (웃으며 앞에 있는 기자들과 악수를 하고 나간다.)

팀이 졌을 경우

-먼저 오늘 경기 총평을 부탁한다.

(한숨을 한 번 쉬고) 이겨야 했던 경기였는데 이기지 못해 아쉽다. 우리도 준비를 많이 했지만 상대도 우리에 대비해 많은 준비를 하고 나왔던 것 같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다음 경기에서는 꼭 승리할 수 있도록 하겠다.

-최근 들어 득점력이 부족하다. 어떻게 생각하나.

오늘도 좋은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과정은 괜찮은데 세밀함이 부족하다. 하지만 우리 공격수들의 능력을 믿는다.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심판의 애매한 판정이 나왔다. 이 판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머뭇거리다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감독관의 눈치를 한 번 보고) 아쉽긴 하지만 심판도 사람이다. 불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각오는.

다음 경기에서는 꼭 승리를 거둬 팬들의 응원에 보답하도록 하겠다. 오늘 패했지만 선수들이 자신감을 회복해 다음 경기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기자회견장에 앉은 이들은 조금 더 솔직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해당 사진은 위 칼럼과 특정한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스포츠니어스

늘 K리그가 끝난 뒤 의무적으로 열리는 기자회견은 이런 모습이다. 질문도 식상하고 답변은 더 식상하다. 그냥 이 ‘만능 기자회견문’을 가져다 붙이면 어느 경기건 감독의 기자회견 기사가 될 정도다. K리그 클래식 빅클럽 감독이건 K리그 챌린지의 관심이 적은 클럽 감독이건 크게 다를 것 없이 대부분 마찬가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답변을 매번 내놓으니 K리그 기자회견이 좋은 콘텐츠가 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기자회견장에서 누구를 험담하고 디스하라는 게 아니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임해달라는 거다. ‘만능 기자회견문’을 원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나는 몇 년 전 K리그 한 구단 선수들을 상대로 미디어 응대법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가장 강조했던 건 “언론을 상대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오늘 골을 넣어서 기쁘다. 믿고 기용해주신 감독님께 감사드린다”가 아니라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이다. 그래서 이 골을 어머니에게 선물할 수 있어 기쁘다”고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하다 못해 “페널티킥을 실축하는 꿈을 꿨는데 꿈은 반대였던 것 같다”라는 거라도 좋다. 그래야 언론도 이 발언에 매력을 느끼고 보도한다. 누구나, 언제든 할 수 있는 기자회견에 관심을 갖는 팬들은 별로 없다. K리그에서 경기 종료 후 의무적으로 열리는 기자회견은 이 자리에 참석하는 감독이나 선수, 언론 그리고 독자 모두에게 지금까지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다.

기자회견장에서 개성 넘쳐 기자로서 너무 좋은 지도자는 신태용 감독이다. 그는 2010년 성남일화 감독으로 인천유나이티드를 6-0을 이긴 뒤 가자회견장에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멋진 말을 남겼다. “경기 시작 전에 선수들에게 오늘이 화이트 데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경기 후 여자친구, 와이프와 쓰디쓴 소주를 마시면서 신경질을 낼 것인지 와인을 마시면서 분위기를 잡을 것인지 그 차이는 오늘 경기 결과에 달렸다고 선수들에게 강조했다. 오늘 경기 후 나가서 멋진 분위기를 즐기라고 했다.” 개성 넘치고 흥미로운 기자회견은 이렇게 완성된다. K리그 감독들은 이제 어디에 가서 지적을 받을 위치도 아니지만 기자회견을 대하는 태도 만큼은 한 번쯤 지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태용 감독 같은 멋진 멘트를 바라는 건 무리일까. 나는 K리그의 흥미로운 콘텐츠는 가장 기본적으로 기자회견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자회견에 참석하는 기자들도 더 집요하고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야한다. 서로 주고받는 호흡이 필요하다. 신태용 감독의 사례에서 보듯 똑같은 경기 평을 부탁해도 이렇게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주는 감독이 있는 반면 “기쁘다”고 언론이 받아 쓰기에 너무 건조한 말 한 마디로 끝내는 감독도 있다. 앞으로는 K리그 기자회견이 더 흥미로웠으면 좋겠다. “이겨서 기쁘다. 열심히 한 선수들에게 고맙다”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겠지만 기자회견을 이런 평이하고 구체적이지 않은 말로 다 채우는 건 아쉽다. ‘만능 사과문’에 버금가는 ‘만능 기자회견문’이 K리그에서는 통용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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