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팀 감독은 독이 든 성배? 역대 외국인 감독 잔혹사


울리 슈틸리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장수 감독이었던 울리 슈틸리케는 지난 15일 경질됐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스포츠니어스ㅣ남윤성 기자] 2014년 9월 24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수장으로 울리 슈틸리케가 취임했다. 그는 취임 직후 참가한 2015 호주 아시안컵에서 일명 ‘한국형 늪 축구’로 대한민국에 27년만의 준우승을 선사하며 데뷔무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또한 A매치 16경기 연속 무패, 10경기 연속 무실점 등의 대기록을 세우며 축구팬들 사이에서 ‘갓틸리케’라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월드컵 최종예선에 접어들면서 한계점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승리하긴 했지만 경기력은 부진했고 초라한 원정성적까지 겹치며 경질론이 대두됐다. 이 과정에서 선수단과의 소통 부재, 무원칙적인 선수선발, 무전술 논란, 특정 선수와의 비교 등 잡음 또한 끊이지 않았다.

결국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15일 오후 2시 파주 국가대표 트레이닝 센터에서 기술위원회를 열어 슈틸리케 감독의 경질을 발표했다. 재임기간 총 2년 9개월, 996일, 39경기 27승 5무 7패, 승률 69.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장수 감독이자 일곱 번째 외국인 감독이었던 슈틸리케호의 여정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슈틸리케 이전에 성인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역대 외국인 감독들은 어땠을까. 결과적으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을 제외하고는 모두 독이 든 성배를 마신 꼴이었다.

최초의 외국인 감독, 아나톨리 비쇼베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소련을 이끌고 금메달을 따내며 세계적 명장 반열에 올라선 아나톨리 비쇼베츠는 1994년 2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기술고문으로 한국과 다시 한 번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1994 미국월드컵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 김호 감독 이후 A대표와 올림픽대표팀의 사령탑을 함께 맡았다.

비쇼베츠가 A대표팀을 이끌고 처음으로 나선 국제대회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었다. 8강전에서 홈팀이자 숙적인 일본을 3-2로 꺾고 4강에 진출했지만 이후 우즈베키스탄과 쿠웨이트에 패하며 4위로 대회를 마쳤다. 하지만 비쇼베츠는 이후 1996년 3월 애틀란타 올림픽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서 일본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국민들의 기대감을 한층 높였다. 그는 1996 애틀란타 올림픽 본선에서도 가나를 잡으며 한국에 올림픽 사상 첫 승리를 안겨줬다. 하지만 이탈리아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1-2로 패하며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후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조국 러시아로 돌아갔다.

Anatoliy Byshovets
아나톨리 비쇼베츠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었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비록 그는 재임기간 동안 축구 협회와의 수차례 마찰과 일부 감독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지만 전술적으로 백지상태에 가까웠던 한국축구에 현대적인 전술을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히 챙겼으며 연습 때도 선수처럼 열심히 뛰며 지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재임시절 선수들의 피지컬을 특히 강조했다. 유럽선수들과 맞붙어도 뒤지지 않는 체격 조건을 갖추어야 비로소 기술과 조직력이 통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비쇼베츠의 축구철학을 뒤집은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꾀돌이’ 윤정환이었다. 비쇼베츠도 처음에는 왜소한 체격의 윤정환을 외면했다. 하지만 이후 그를 중심으로 미드진을 구성했을 만큼 윤정환의 천부적인 재능과 뛰어난 축구감각에 신뢰를 보냈다.

월드컵 4강 신화 거스 히딩크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우리나라에 0-5 치욕적인 패배를 안겼던 네덜란드의 콧수염 감독이 2년 뒤인 2000년 12월 대한민국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을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거스 히딩크는 부임과 동시에 우리나라 축구계에 충격을 선사했다. 그의 부임이전까지 한국축구는 체력적으론 우수하지만 전술과 기술적으로 선진축구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히딩크는 전혀 다른 의견을 나타냈다. 그는 “한국 선수들은 기술적으론 훌륭하지만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파워프로그램을 통한 선수들의 지구력 및 체력 훈련에 집중했다. 동시에 박지성, 이영표, 차두리, 이천수 등 무명에 가까웠던 선수들을 파격적으로 기용했고 한국축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포백에 바탕을 둔 지역수비 전술을 꺼내들기도 했다.

거스 히딩크

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0-5로 패했고 이어진 체코 원정에서도 0-5로 패하며 ‘오대영’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히딩크는 흔들리지 않았다. 언론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초점은 오로지 월드컵에만 맞춰져있었다. 히딩크의 뚜렷한 축구철학과 선수선발에 대한 강경한 태도는 최종명단 승선을 당연하게 생각하던 선수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노장들도 경기장에서 젊은 선수들만큼 열심히 뛰어야 했고 대표팀 내 존재하던 형님 문화도 사라졌다. 긴장감이 흐르던 훈련장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긴장감이 사라지자 젊은 선수들도 자신들의 실력을 십분 발휘하기 시작했다.

‘히딩크 효과’는 결국 역사적인 월드컵 4강 신화로 이어졌다. 히딩크는 월드컵이 끝난 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외국인 최초 대한민국 최고 체육훈장인 청룡장을 받았다. 또한 법무부는 그에게 명예국적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축구협회는 히딩크와의 계약연장을 희망했지만 PSV 아인트호벤의 지휘봉을 잡기로 예정되어있던 터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히딩크는 대한민국이 가장 사랑한 외국인이었다.

명장이라더니? 불신 속 지휘봉 잡은 코엘류

히딩크 이후 대표팀 사령탑을 향한 언론과 대중들의 기대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에 축구협회도 세계적인 명장들을 차기 감독 후보군에 올리며 깜짝쇼를 준비했다. 하지만 2003년 1월 인천 공항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포르투갈 국적의 움베르투 코엘류였다. 이름도 낯설었지만 무엇보다 첫인상은 구멍가게 아저씨 같이 친근하고 푸근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의 감독을 기대했던 축구팬들은 모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코엘류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움베르투 코엘류
그에게 감독으로서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

그의 감독 데뷔경기는 콜롬비아와의 친선전이었다. 결과는 0-0 무승부에 그쳤지만 안정적인 포백과 우세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언론은 이튿날 ‘첫술에 배부르랴’라고 표현하며 애써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이후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전에서 연패를 기록하자 국민들의 싸늘한 시선이 쏟아졌다. 결국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아시안컵 2차 예선 베트남, 오만 원정에서 충격적인 2연패를 기록한 것이다.

이어 5개월 뒤인 2004년 3월에는 졸전 끝에 FIFA 랭킹 142위 몰디브와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박지성과 차두리를 제외하고 가능한 해외파를 총출동시키고도 기록한 무승부 소식은 FIFA 홈페이지의 메인을 장식할 정도였다. 씻을 수 없는 치욕에 국민들의 분노는 치밀어 올랐고 언론의 맹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코엘류는 2004년 4월 19일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분명히 알아둬야 할 것은 나는 사임하는 게 아니라 양측 간 합의 하에 계약을 종료시키는 것”이라고 말해 사퇴 과정에서 협회의 압력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닥공 축구’의 원조, 조 본프레레

지난 2004년 12월 19일 당시 1.5군에 가까웠던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최정예 멤버였던 독일에 3-1로 승리한 경기는 지금까지도 축구팬들 사이에서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코엘류의 뒤를 이어받아 대한민국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조 본프레레는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나이지리아를 이끌고 금메달을 차지, 아프리카축구 사상 최초의 국제대회 우승을 달성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감독이었다.

조 본프레레
조 본프레레 시절 축구는 그래도 나름 재미있었다. ⓒ 유튜브 화면 캡처

하지만 그 역시 한없이 높아진 국민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그를 향한 무차별적인 비난 여론은 부임 직후 출전한 2004 AFC 아시안컵에서부터 시작됐다. 이란과의 8강전에서 난타전 끝에 3-4로 패하며 탈락하자 취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뭇매를 맞아야했다. 결과적으로 6회 연속 월드컵 본선진출을 달성했지만 최종예선에서 이어진 답답한 경기력, 박주영 선발을 둘러싸고 일으킨 논란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전 2연패와 동아시아 선수권에서의 부진으로 2006년 독일월드컵까지이던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2005년 8월 중도 하차했다.

계속된 네덜란드 감독 선임 하지만 결과는..

히딩크 영광을 잊지 못한 축구협회의 네덜란드인 감독선임은 본프레레 이후에도 계속됐다. 본프레레 경질 이후 사령탑에 오른 이는 과거 네덜란드대표팀을 지휘했던 딕 아드보카트였다. 그는 2006 독일월드컵이 채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인 2005년 10월 급히 선임됐다. 당시 아드보카트는 UAE 대표팀 사령탑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적극적으로 월드컵 출전을 희망하며 UAE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하고 대한민국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렇게 출전한 독일월드컵에서 아드보카트는 토고와의 1차전을 2-1 승리로 이끌며 대한민국에 사상 첫 월드컵 원정 승리를 안겼다. 이어진 프랑스와의 2차전에서도 선전을 펼치며 값진 무승부를 기록, 16강 진출의 희망을 키웠지만 마지막 스위스전에서 판정논란 끝에 0-2로 패하며 원정 첫 16강 진출에 실패한 채 월드컵 종료와 함께 대표팀을 떠났다.

아드보카트 베어벡
네덜란드인 감독을 향한 축구협회의 사랑은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한국 축구에 대해 많은 정보가 없었던 아드보카트는 2002년 월드컵을 경험했던 핌 베어벡의 능력을 필요로 했다. 이에 그를 대표팀 수석코치로 임명했다. 이후 아드보카트가 지휘봉을 내려놓으며 베어벡은 자연스럽게 차기 사령탑에 올랐다. 하지만 선수차출 문제로 부임 직후부터 K리그 구단들과 마찰을 빚었다. 이후 출전한 2007 AFC 아시안컵에서는 3경기 연속 무득점 졸전 끝에 3위에 그쳤고 성적 부진을 책임지고 대회 직후인 2007년 8월 자진 사퇴했다.

역대 외국인 감독들 중 거스 히딩크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결국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들은 저마다 다양한 이유와 매력을 느끼며 대한민국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협회·구단과의 지속된 갈등, 언론으로부터의 지독한 성화, 팬들의 높기 만한 기대치 등의 문제는 이들로 하여금 결국 독이든 성배로 작용했다. 슈틸리케가 대표팀 사령탑에서 물러난 지금 일부 팬들은 그보다 더 능력 있고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세계적인 명장의 선임을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쯤에서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2002년 당시 히딩크를 감독으로 선임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비교적 높았던 수준의 연봉도 있었지만 당시 대한민국이 월드컵 개최국이었던 이유가 더 컸다. 지금의 대한민국 대표팀 사령탑은 예전만큼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 가치를 다시 회복시키는 주체는 비단 선수들만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난 2002년의 기적은 우리 모두가 함께 일궈낸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축구는 아직 죽지 않았다.

skadbstjdsla@sports-g.com

이 기사의 단축 URL은 https://www.sports-g.com/orR4x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