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회] U-20 선수들, 성적보단 그 자체로 즐겼으면


U-20 월드컵
U-20 월드컵에서 우리는 어떤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FIFA TV 캡처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2011년 콜롬비아 U-20 월드컵이 끝난 뒤 김경중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김경중이 16강 스페인과의 승부차기에서 실축을 하며 아쉬운 패배를 경험한 바로 직후였다. 하지만 김경중은 8강 진출 실패에 대해 아쉬워하면서도 동료들과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김경중은 당시 이런 말을 했다. “인생 최고의 추억이다. 이 좋은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건 앞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일 될 것이다.” 연령별 대표팀에 속해 큰 대회에 나갔던 이들과 인터뷰를 해보면 성적도 성적이지만 이렇게 또래 친구들과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아다는 걸 무척이나 행복해 한다. 청소년 대표팀에는 이렇게 성인 대표팀에 없는 풋풋함이 있다.

같이 눈물을 흘려준 또래 선수들
당시 故이광종 감독이 이끄는 한국 U-20 대표팀은 청소년 월드컵 첫 경기에서 말리를 2-0으로 가볍게 제압했다. 하지만 프랑스에 1-3으로 패하더니 콜롬비아와의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는 졸전 끝에 또 다시 0-1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프랑스전은 비록 패했어도 경기 내용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콜롬비아전 패배는 그 여파가 엄청났다. 비기기만 해도 자력으로 16강행이 확정되는 대표팀은 90분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팬들의 거센 비난을 샀다. 와일드카드로 16강에 올랐지만 다음 상대는 ‘최강’ 스페인이어서 팬들의 조롱은 더 거셌다. “어차피 대패할 테니 망신 당하지 말고 빨리 짐이나 싸라”고 했다.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유소년으로 구성된 스페인은 누가 봐도 가장 강력했다. 대학생 위주로 구성된 한국에는 너무나 큰 산이었다.

경기 전날 자발적으로 모인 선수들은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했다. “내일 질 때 지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지자”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이때 민상기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 지금 생각하는 거 다 틀려 먹었어. 어떻게 축구 선수가 ‘질 때 지더라도’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 우리는 내일 전쟁터에 나가는데 죽으러 가는 거야? 죽이러 가는 거야? 죽이러 가자.” 순간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파이팅이 넘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날 성인 대표팀은 일본에 0-3 참패까지 당해 후배들이 물러설 곳이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최강’ 스페인이라고 해도 물러서면 안 되는 경기였다. 누군가는 그들을 조롱했지만 그들은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들은 전의를 불태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갓 스무살이 된 선수들의 이런 모습을 떠올리면 참 귀엽다.

경기가 시작되자 실력에서는 밀렸지만 온 몸으로 스페인 공격을 막아내면서 선전을 펼쳤다. 김영욱은 몇 번이고 상대와 충돌해 실려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조별예선 세 경기에서 무려 11골을 뽑아낸 스페인은 120분 동안 한국에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연장전에 접어들면서 한국은 다리에 근육 경련이 일어나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상황이었지만 몸을 던져 스페인 공격을 틀어막았고 결국 승부차기까지 이끌었다. 승부차기 역시 팽팽했다. 8번째 키커까지 가는 치열한 승부가 펼쳐졌다. 하지만 한국은 8번째 키커 김경중이 실축하며 결국 승부차기에서 6-7로 패하고 말았다. 기회를 날린 김경중은 그라운드에 주저 앉아 눈물을 흘렸고 동료들은 달려가 그런 김경중을 위로하는 가슴 찡한 장면이 연출됐다.

강원 김경중
2011년 열린 U-20 월드컵에 나섰던 김경중은 당시 소중한 기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스포츠니어스

성적은 어른이 되면 그때 요구하자
그때는 패배가 안타까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린 선수들이 서로를 챙기는 모습이 참 귀엽기도 하다. 이런 게 바로 연령별 대표팀 경기의 매력인 것 같다. 이제 갓 대학생이 된 어린 선수들이 실수도 범하고 그 안에서 매 경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서로 다독여주는 모습만으로도 청소년 대표팀의 경기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나는 사실 U-17 월드컵이나 U-20 월드컵에서 성적을 강요하는 풍토가 그리 달갑지 않다. 뭐 이 나이에 세계를 제패하는 경험을 쌓는 것도 좋지만 정말 중요한 건 또래 선수들끼리 모여 즐거운 분위기에서 축구를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팀들이 청소년 월드컵에서 우승한다고 세계 축구가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아프리카 축구에 찬사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연령별 대회는 그냥 그 자체로 즐겼으면 좋겠다.

청소년 월드컵은 몇 년 묵혀 놓았다가 나중에 찾아보면 더 흥미롭다. 몇 년 뒤 살펴보면 그 중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성인 선수로 성장한 이들도 있고 프로 무대에서 제법 자리를 잡은 이들도 있다. 그리고 내셔널리그 등 주목받지 못한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도 생겨나고 아예 축구를 접게 된 이들도 있다. 청소년 월드컵에 나선 선수들이 다 성공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누군가는 성공을 맛보고 누군가는 실패한다. 과거 열렸던 청소년 월드컵 출전 명단을 지금 보면 참 재미있다. ‘이 선수가 이렇게 될 줄 몰랐고 저 선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번 대표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는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기대 만큼 성장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성적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냥 편하게 보자. 여기에서 특출난 기량을 보인다고 갑자기 대단한 스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실패한다고 한국 축구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박지성은 청소년 월드컵에 나오지도 못했고 1997년 말레이시아 U-20 월드컵에 주전 공격수로 참가해 브라질에 3-10, 프랑스에 2-4로 참패하는 동안 실망감만을 안겼던 이관우는 이후 팬들의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되기도 했다. 이기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 지면 서로 위로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 만으로도 충분히 좋지 않은가. 선수들이 이런 큰 대회에서 강팀을 이기며 자신감을 찾는 것도 좋지만 아직 어린 선수들이 또래들과 즐거운 추억을 쌓는 게 먼저인 것 같다. 연령별 대표팀을 거칠 나이가 지나면 그때는 죽어라 경쟁해야 한다. 성적은 그때 가서 요구하는 게 조금 더 현명한 어른의 모습 아닐까.

구자철
구자철에게 U-23 대표팀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JS파운데이션

7년 전 구자철의 눈물에 담겼던 의미
연령별 대표팀은 풋풋한 맛이 있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아시안게임 대표팀(U-23)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획득을 노렸다. 하지만 홍명보호는 준결승전에서 연장전 종료 1분을 남기고 아랍에미리트연합에 통한의 골을 허용하며 0-1로 패배,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향해 내달리던 홍명보호는 충격에 빠졌고 무엇보다 병역 혜택이 걸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놓쳤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 대단했다. 이렇게 한국 축구는 또 한 번 좌절을 맛봤고 사실상 의미가 없는 3·4위전은 맥 빠진 경기가 될 것처럼 보였다. 병역 혜택이라는 동기부여가 사라진 상황에서 3·4위전을 치르는 한국이 이란을 꺾는 건 힘겨워 보였다. 역시나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6분 만에 한 골을 허용한 한국은 전반 막판 또 다시 한 골을 내주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후반 2분 구자철이 한 골을 만회했지만 또 다시 2분 뒤 이란에 한 골을 더 허용하며 1-3으로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한국은 투혼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선수들끼리 다독이며 “아쉬움과 후회를 남기지 말자”고 힘을 모았다. 선수들을 이렇게 말했다. “부와 명예를 바라고 뛰지 말자. 오로지 축구에만 집중하자”고 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후반 32분 박주영이 두 번째 골을 기록하며 추격을 불씨를 살렸고 후반 42분 서정진의 크로스를 이어받은 지동원이 통렬한 헤딩슛으로 이란 골문을 갈랐다. 믿을 수 없는 3-3 동점이었다. 기세를 올린 홍명보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맹공을 퍼부어 1분 뒤 거짓말 같은 장면을 다시 한 번 연출했다. 윤석영이 올려준 공을 다시 한 번 지동원이 솟구쳐 올라 헤딩슛으로 연결한 것이다. 1분 동안 세 골을 기록하며 대역전극의 마침표를 찍었다.

비록 한국은 원하던 금메달과 병역 혜택을 놓쳤지만 마지막까지 투혼을 발휘하며 값진 동메달을 목에 걸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경기가 끝난 뒤 구자철은 이렇게 말했다.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는 동안 너무나 힘들었다. 석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하루하루가 고생의 연속이었다. 이란전 전반전이 끝나고 골대 뒤 1천여 붉은악마의 응원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분들은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나라를 대표해 우리가 투혼을 발휘해주길 원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후반전에는 죽기 살기로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이란전 후반 45분은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다. 이제까지 축구하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다. 끝까지 투혼을 발휘해 따낸 소중한 동메달을 보면 행복하다.” 이게 바로 연령별 대표팀이 주는 특별한 매력이다. 같은 또래끼리 똘똘 뭉쳐서 추억을 쌓는다면 이게 바로 멋진 성인 선수로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U-20 월드컵
U-20 월드컵에서 우리는 어떤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FIFA TV 캡처

U-20 선수들, 성적보다 더 많은 추억 쌓길
오늘(30일)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U-20 대표팀이 포르투갈과 운명의 16강전을 펼친다. 이기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하지만 승패보다는 이 어린 선수들이 후회하지 않는 멋진 한판 승부를 펼친다면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자신감은 갖되 그냥 그 자신감을 즐기는 90분이 됐으면 한다. 어린 선수들이 신이 나 축구를 즐긴다면 성적은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선후배 없이 또래들끼리 모여 합숙을 하며 여자 아이돌 이야기로 수다를 떨고 “누가 방귀 뀌었느냐”고 장난도 치고 여자친구 문제로 고민도 하면서 그 또래 평범한 학생들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누군가는 몇 년 뒤 나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때가 내 축구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해주면 좋겠다. 그 달달한 청춘들이 먼저 경기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팬들에게도 즐거움을 주지 않겠나. 심지어 이번 신태용호 공격수인 1999년생 조영욱은 미성년자라 편의점에서 맥주도 못 사고 담배도 못 사는 ‘애기’다.

승패에 대한 부담 없이 후회 없는 시원한 경기를 부탁한다. 벌써부터 이들에게 8강이니 4강이니 하는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다. 성인 대표팀이 되면 슈팅 한 번 실수에 평생 먹을 욕을 다 먹고 수비수의 헛발질 한 번에 SNS가 탈탈 털릴 텐데 뭐 벌써부터 그런 부담을 주나. 이기면 좋지만 승패를 떠나 어린 선수들의 멋진 도전 자체를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뒤 7년 전 구자철이 했던 말을 누군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축구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다. 이제까지 축구하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다.” U-20 월드컵에서 이런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빵셔틀’만 하던 나는 어린 시절 별로 즐거웠던 기억이 없어 이들이라도 어린 나이에 더 좋은 추억을 쌓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시간은 다신 안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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