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20 월드컵’, 기대 만큼 성장 못해 아쉬운 스타들


프레디 아두, 펠레
분명 재능만큼은 세계 최고였다. 하지만 펠레와의 만남에서 볼 키스를 선물 받은 프레디 아두는 이후 끝없는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다. ⓒ D.C 유나이티드 공식 홈페이지

[스포츠니어스ㅣ남윤성 기자] FIFA U-20 월드컵인 ‘FIFA U-20 월드컵 코리아 2017’이 지난 20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개막했다. 1977년 시작 이후 지난 40년간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을 배출해왔기에 이번 대회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디에고 마라도나, 루이스 피구, 라울 곤잘레스, 티에리 앙리, 리오넬 메시, 폴 포그바 등도 U-20 월드컵을 통해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다. 그만큼 U-20 월드컵은 세계적인 스타들의 등용문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모두가 U-20 월드컵을 통해 떠오른 스타들을 주목하는 이 시점에서 <스포츠니어스>는 반대로 기대와 달리 성장하지 못하며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간 선수들을 다시 한 번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처음 들어보는 선수부터 ‘아 그때 그 선수!’하며 떠오를 법한 선수들까지 모아봤다.

1981년 카타르 준우승 돌풍을 이끈 알 사드 듀오

바드라 빌랄과 칼리드 살만은 알 사드의 위협적인 공격 듀오였다. 1962년 같은 해에 태어난 이들은 알 사드 유스팀에서 처음 만났다. 이중 먼저 두각을 드러낸 건 빌랄이었다. 빌랄은 1군에 갓 데뷔한 79-80시즌 17살 나이로 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카타르 축구의 미래로 떠올랐다. 이후 출전한 1981년 U-20 월드컵에서 당대 최강으로 평가받던 폴란드를 만난 카타르는 빌랄의 행운 섞인 골을 앞세워 1-0 승리를 거뒀다. 이어 펼쳐진 미국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도 빌랄은 후반 56분 헤딩으로 동점골을 터뜨리며 카타르의 8강 진출을 이끌어냈다.

Badr Bilal 카타르
바드라 빌랄은 폴란드와 미국전에서 귀중한 득점을 기록하며 카타르의 토너먼트 진출을 이끌었다. ⓒ 유튜브 화면 캡쳐

그리고 8강에서 세계 최강 브라질을 만났다. 모두가 브라질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지만 이번엔 살만이 맹활약을 펼쳤다.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살만은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종료직전 페널티킥을 포함,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카타르의 3-2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잉글랜드와의 4강전에서 빌랄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환상적인 바이시클킥 골을 터뜨리며 카타르의 결승 진출을 이끌어냈다. 비록 결승에서 당시 세계 축구를 호령하던 서독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지만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FIFA 주관 대회에서 결승전에 진출한 카타르의 돌풍은 분명 세계 축구의 흐름에서 제외되어 있던 아시아를 주목받게 한 눈부신 성과였다.

칼리드 살만 카타르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칼리드 살만은 브라질과의 8강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 유튜브 화면 캡쳐

카타르의 U-20 월드컵 돌풍을 함께 이끈 빌랄과 살만이었지만 이후의 행보에는 차이가 있었다. 카타르 축구는 1980년대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이 과정에서 빌랄은 경쟁력을 잃으며 자리 잡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로는 소속팀 알 사드와 대표팀에 불어 닥친 귀화열풍에 있었다. 빌랄은 결국 남미 공격수들의 등장과 잔부상에 시달리며 존재감을 잃어갔고 결국 29살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반면 살만은 알 사드와 대표팀에서 주축으로 활약하며 카타르 축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4년 미국올림픽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는 2골을 기록하며 무승부를 이끌었고 1989년에는 환상적인 프리킥으로 소속팀 알 사드에 첫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現 AFC 챔피언스리그) 타이틀을 선사하기도 했다. 1998년을 끝으로 은퇴한 살만은 현재 카타르의 스포츠전문 프로그램 알 카스에서 축구 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다.

홀로 일본을 농락했던 퀸시 오수-아베이

지금까지도 다양한 축구 커뮤니티에서 그의 영상이 돌아다니고 있다. 2005년 네덜란드 U-20 월드컵에서 보여준 퀸시 오수-아베이의 활약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아스날 유스팀 신분으로 자국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참가한 19살 퀸시는 일본과의 조별예선 첫 번째 경기에서 놀라운 스피드와 개인 기량을 앞세워 말 그대로 일본을 찢어놓았다.

특히 전반 17분 선보인 질주는 경기의 하이라이트였다. 하프라인 아래에서 공을 잡은 퀸시는 피지컬과 스피드를 앞세워 질주를 시작, 4명의 일본 수비수들을 그대로 제쳐낸 뒤 라이언 바벨의 결승골을 도왔다. 그의 활약은 경기 내내 이어졌다. 타고난 밸런스와 스피드, 타이밍을 뺏은 이후 밀고 들어가는 퀸시의 드리블에 일본 수비는 추풍낙엽처럼 나뒹굴었다.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제프 블레터가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으로 내려와 퀸시에게 직접 악수를 건낼 정도였다. 비록 네덜란드는 8강에서 나이지리아에 패했지만 FIFA는 대회가 끝난 뒤 기술보고서를 통해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특별함 그 자체. 스피드의 최정점에서도 힘이 줄어들지 않는다”

“속도와 기술적인 측면에서 그저 호화로움으로 가득한 선수”

2005년 U-20 월드컵을 통해 스타로 떠오른 그는 아스날로 돌아온 뒤 벵거 감독의 극진한 대접 속에 경기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프로무대에서 활약하기에는 한계점이 뚜렷했다. 그가 가진 스피드와 힘, 기술은 유소년 레벨에서는 탁월한 편에 속했지만 프로무대에서는 평범한 수준이었고 패턴도 단순했다. 결국 기대와 달리 최악의 시즌을 보낸 그는 이듬해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로 이적한다. 하지만 스피드만 빠를 뿐 플레이에 별다른 특별함이 없었던 퀸시는 계속해서 자리 잡기에 실패하며 임대와 이적을 반복해야 했다. 이후 9번이나 클럽을 옮긴 퀸시는 현재 에레디비시의 NEC 네이메헨에서 주로 교체로만 그라운드를 밟고 있다.

미국의 축구천재, 프레디 아두

2003년 미국 축구천재의 등장은 전 세계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만 14세 나이에 U-17 월드컵에 출전한 프레디 아두는 우리나라와의 조별예선 첫 경기 해트트릭을 포함해 대회에서 총 4골을 기록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대회가 끝난 뒤 IMG 아카데미 소속이었던 그를 향한 빅클럽들의 영입 제의가 쇄도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이 국가적으로 나서서 자국의 축구천재를 보호해야 했을 정도였다.

아두는 같은 해 11월에는 U-20 대표팀 최종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UAE에서 열린 FIFA U-20 월드컵에 참가, 나이에 걸맞지 않는 플레이로 축구팬들을 더욱 열광하게 만들었다. 고작 14세의 나이로 20세 이하 대회에 출전했을 만큼 그의 재능은 매우 특별했다. 스피드와 파워, 기술면에서 이미 성인 레벨 수준으로 평가받은 그는 2004년 연봉 50만 달러(한화 약 6억 원)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D.C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입었다.

프레디 아두
미국 축구천재의 등장에 전 세계가 술렁였다. 만 14세의 나이에 U-20 월드컵에 출전했던 프레디 아두는 성인 레벨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 미국축구연맹 공식 홈페이지

입단 후 축구천재의 재능을 맘껏 뽐낸 아두는 이후 한 번도 출전하기 어렵다는 U-20 월드컵을 무려 세 번이나 연달아 출전했다. 특히 2007년 캐나다 대회 폴란드와의 경기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었다. 비록 폴란드전을 제외하면 미미한 활약으로 일부 언론으로부터 한물갔다는 소리를 들어야했지만 당시 그의 나이가 고작 18살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분명 야박한 평가였다. 너무 어린 나이 때부터 언론의 감당할 수 없는 주목과 상대 수비수들의 강한 견제를 받아서였을까. 슬럼프와 부상이 반복되며 완전히 폼을 잃어간 아두는 이후 총 13차례 팀을 옮겨 다녔고 이번시즌 템파베이 라우디스에서 총 136분 출전을 끝으로 계약이 만료되어 현재는 새로운 소속팀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를 상대로 6골을 터뜨린 아다일톤

1997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U-20 월드컵을 시청하던 국내축구팬들은 크게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역대 최강의 전력이라 자부하며 참가한 대회에서 무기력한 플레이를 일관하며 조별예선 최하위로 탈락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 3-10으로 패한 두 번째 경기는 한국 축구 역사상 최대의 치욕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세계최강 브라질이었다 하더라도 한 선수에게 6골을 허용했다는 것은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스포츠 신문은 온통 그의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시아의 호랑이 상대로 6골 퍼부은 아다일톤, 도대체 누구?’

아다일톤 주벤투드
우리나라를 상대로 6골을 터뜨린 아다일톤은 날카로운 왼발과 정교한 드리블이 장점이었다. ⓒ 주벤투드 공식 홈페이지

화려한 드리블과 뛰어난 개인기량을 갖추고 있었던 아다일톤은 무엇보다 날카로운 왼발이 매우 특별했다. 정확한 슈팅과 크로스로 말레이시아 대회에서 총 10골을 기록한 그를 향해 유럽의 빅클럽은 군침을 흘렸다. 결국 이탈리아 세리에A의 파르마가 그를 차지했다. 하지만 포지션 경쟁에서 밀리고 말았다. 아다일톤의 주 포지션은 세컨드 스트라이커였는데 그 자리엔 이미 에르난 크레스포와 엔리코 치에사가 위치해있었다.

결국 두 시즌 만에 헬라스 베로나로 떠났다. 비록 이적 후 세리에B로의 강등을 경험해야 했지만 아다일톤은 의리를 지키며 팀에 남았다. 그리고 전성기를 맞았다. 나이가 들면서 기량이 만개했다. 헬라스 베로나에서 7시즌동안 163경기에 출전해 50골을 기록했다. 이후 제노아와 볼로냐를 거친 아다일톤은 2008년 1부 리그 승격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하며 볼로냐의 레전드로 자리 잡았다. 아다일톤은 은퇴를 앞두고는 자신을 키워준 친정팀 주벤투드로 돌아와 마지막 시즌을 소화한 뒤 2013년을 끝으로 현역 유니폼을 벗었다. 자신을 주목받게 한 날카로운 왼발만큼 팀에 대한 의리도 지킬 줄 알았던 아다일톤은 그라운드의 진정한 로맨티시스트였다.

슈퍼 이글스의 돌풍을 이끈 크리스토퍼 오헨과 무티우 아데포주

자국 리그의 율리우스 베르거에서 함께 뛰던 크리스토퍼 오헨과 무티우 아데포주 또한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U-20 월드컵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오헨과 아데포주는 개막전에서 나란히 동점골과 역전골을 기록, 개최국 사우디에 2-1 극적인 승리를 이끌며 기분 좋게 대회를 시작했다. 개막전에서의 귀중한 승리로 조별예선을 통과한 나이지리아는 8강에서 당대 최강 소련을 만나 기적과 같은 명승부를 연출했다.

소련에 네 골을 연거푸 실점하며 패색이 짙던 후반 61분과 75분, 오헨은 두 골을 기록하며 추격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사무엘 엘리자와 은두카의 극적인 연속골이 터지며 경기는 연장 승부로 이어졌다. 결국 승부차기 끝에 강력한 우승후보 소련을 물리친 슈퍼 이글스 군단은 이어 미국을 만났다. 그리고 4강에서는 아데포주가 맹활약을 펼쳤다. 아데포주는 연장 전반 역전골을 포함해 두 골을 터뜨리며 나이지리아의 결승행을 이끌었다. 비록 결승전에서 포르투갈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지만 대회 내내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오헨과 아데포주는 이후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나이지리아 아데포주
오헨과 달리 아데포주는 성인대표팀에서도 활약을 이어갔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조별예선 스페인전에서 동점골을 기록하며 나이지리아의 3-2 역전승을 이끌었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그렇게 나이지리아 듀오는 나란히 레알에 입단했지만 1군 진입의 장벽은 너무나 높았다. 결국 오헨과 아데포주는 각각 세군다 디비전(2부)의 콤포스텔라와 라싱 산탄데르로 팀을 옮겨야 했다. 1994-95시즌 오헨은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콤포스텔라의 라리가 승격을 이끌었다. 그리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는 동점골을 터뜨리며 친정팀 레알에 비수를 꽂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후 다시 한 번 강등의 아픔을 겪었고 2002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대표팀과 인연이 없었던 오헨과 달리 아데포주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주역으로 활약하며 슈퍼 이글스의 비상을 이끌었다. 특히 무적함대 스페인과의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아데포주는 헤딩 동점골을 기록하며 나이지리아의 3-2 역전승을 이끌었다. 월드컵 이후 계속해서 경쟁력을 이어간 아데포주는 99-00시즌까지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활약했고 이후 2006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skadbstjdsla@sports-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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