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안양은 FC서울의 엠블럼을 흑백으로 표현하며 확실한 적대감을 나타냈다 ⓒ FC안양 제공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흥미진진한 경기가 펼쳐진다. 안양LG가 서울로 연고 이전을 한 뒤 어렵게 다시 창단한 FC안양, 그리고 이제는 K리그를 대표하는 빅클럽으로 성장한 FC서울이 역사상 첫 맞대결을 펼칠 예정이다. FC서울과 FC안양은 바로 내일(19일) 저녁 7시 30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2017 KEB하나은행 FA컵 32강 외나무다리 승부를 펼친다. <스포츠니어스>에서는 이 역사적인 맞대결을 앞두고 이 경기에 관한 연속 특집 기사를 준비했다. 이 한 경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스토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스포츠니어스 | 명재영 기자] 드디어 만난다. 프로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결이다. FC서울과 FC안양이 오는 19일 오후 7시 30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2017 KEB하나은행 FA컵 4라운드(32강전)를 치른다. K리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지는 FA컵에 평일 경기지만 이 경기만큼은 성사 시점부터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두 팀 간의 역사적인 관계 때문이다. 특히 안양 팬들은 이날만을 위해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4년 2월 2일

악몽의 시작이자 프로축구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날이다. 2003시즌 후반기, 축구계에는 긴박한 분위기가 흘렀다. 2002년 FIFA 한ㆍ일 월드컵이 끝나자 K리그에는 창단 붐이 일었다. 핵심은 수도 서울이었다. 인천, 대구 등 광역시를 중심으로 시민구단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빅 마켓’인 서울은 여전히 무주공산이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제기됐던 서울 연고 구단의 필요성이 현실로 다가왔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을 개점휴업 상태로 둘 수 없다는 축구인들의 판단에 따라 프로축구연맹이 중심이 돼 본격적인 창단 작업에 나섰다.

이 글은 안양 팬들의 가슴을 뻥 뚫리게 만들었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프로축구단이 없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창단 유치에 나섰지만 기업 내부 사정, 적지 않은 창단 비용 등의 이유로 모두 무산되었다. 시민구단 역시 지자체의 반대로 진행이 어려웠다. 결국, 연맹은 기존 구단의 연고 이전 형태로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채우기로 결정하고 이 과정에 부산아이콘스(현 부산아이파크)와 안양LG(현 FC서울)이 뛰어든다. 여기까지는 내부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2월 2일 오전, 마침내 안양은 구단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서울로의 연고 이전을 전격적으로 선언한다.

2004년 2월 18일

안양LG의 한웅수 단장이 연고 이전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 축구계는 충격에 빠져든다. 수원삼성과 K리그 최고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는 등 수도권에서 나름 입지를 탄탄하게 다진 구단이 연고지를 포기한다는 소식은 안양 팬들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안양 서포터즈 ‘RED(레드)’는 곧바로 이를 반대하는 행동에 나선다. 안양 시민사회 또한 움직였다. 안양LG 연고이전 범시민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안양시축구협회를 비롯한 안양 내의 축구인들도 같이 목소리를 냈다.

이 글은 안양 팬들의 가슴을 뻥 뚫리게 만들었다

안양이 사라진다는 소식에 ‘내 팀, 네 팀’은 없었다. 성남일화의 ‘천마불사’, 같이 연고 이전 의사를 밝힌 부산아이콘스의 ‘P.O.P.’,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붉은악마’ 그리고 서로를 증오한다는 수원 서포터즈 ‘그랑블루’까지 사실상 K리그의 모든 서포터즈가 레드와 함께 움직였다. 축구회관 앞에서의 항의, 안양 시내에서의 대규모 시위 등 자신들의 팀을 지켜내기 위한 행동들이 나타났다. 정점은 2월 18일이었다. 이날은 2006 FIFA 독일 월드컵 2차 예선 대한민국과 레바논 간의 경기가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레드는 이날 서포터즈 회장 명의로 총동원령을 내리고 경기장 내외에서 각종 퍼포먼스로 언론과 국민의 이목을 끌었다.

2004년 3월 29일

대기업의 결정 앞에서는 팬들의 목소리도 큰 소용이 없었다. LG 제품에 대한 화형식, 불매 운동 등 팬으로서 할 수 있는 극단적인 행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프로축구연맹은 3월 11일 이사회에서 안양LG 구단의 서울 이전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LG는 이사회 직후 시즌 개막이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서 이름부터 엠블럼까지 모든 것을 바꾸는 대규모 작업에 나선다.

이 글은 안양 팬들의 가슴을 뻥 뚫리게 만들었다

FC서울로 팀 명칭을 변경하고 그에 맞는 엠블럼 및 서울월드컵경기장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하기 위한 준비까지 모두 마친 LG는 3월 29일 서울시청 본관에서 허창수 구단주 및 이명박 서울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프로축구 서울연고 협약식’을 맺는다. 안양LG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또, FC서울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프로축구연맹은 안양 시절의 기록 또한 서울의 기록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2007년 8월 19일

2004년 4월 3일 47,928명의 관중 앞에서 FC서울은 세상 앞에 첫 모습을 선보인다. 상대는 공교롭게도 연고 이전 경쟁자였던 부산이었다. 안양 팬들은 협약식 및 개막전 이후에도 끊임없이 LG에 대한 규탄 목소리를 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동력이 떨어졌다. ‘시간이 약’이 비통함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흐른 뒤, 안양 팬들은 시민구단 창단을 목표로 새로운 꿈을 가진다. 시간이 어느덧 3년이나 흐른 2007년 8월 19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는 수원과 서울 간의 K리그 경기가 열렸다. 아직 슈퍼매치라는 명칭도 나오지 않았던 때였지만 이 둘의 맞대결은 이미 K리그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자리매김한 뒤였다.

이 글은 안양 팬들의 가슴을 뻥 뚫리게 만들었다

이날 또한 41,819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아 경기를 지켜봤다. 이관우의 멋진 논스톱 슈팅 골로 가장 많이 회상되지만, 경기 외적으로는 수원과 서울이 아닌 제3자가 떠오르는 경기다. 그 주인공은 바로 안양 팬들이다. 이날 안양 팬들은 경기 시작 전 서울 팬들이 위치한 원정석 1층 위에서 서울의 걸개 옆에 ‘우리는 안양이다’, ‘안양은 죽지 않는다’는 걸개를 걸었다. 수원 팬들은 이 모습을 보고 박수를 보냈고 서울 팬들은 즉각 2층으로 올라가 안양 팬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시민구단 창단 작업이 지지부진하던 때였지만 안양 팬들의 이 즉각적인 퍼포먼스는 10년 뒤를 예견하는 복선의 구실을 했다.

2013년 2월 2일

2012년 프로축구연맹은 2013시즌부터 K리그를 K리그 클래식과 K리그 클래식 2개 리그로 나뉘어 승강제로 운영한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이에 구단 창단 작업을 오랜 기간 준비해온 안양의 축구인들은 지자체를 통해 시민구단의 창단 의지를 밝힌다. 시의회에서의 정치적인 대립으로 창단 작업이 지체되기도 했지만 10월 10일 여러 난관을 거쳐 창단이 승인된다. 시의 승인이 떨어지면서 축구단 창단 작업이 본격적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 속에 내셔널리그의 고양 KB국민은행이 축구단을 해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안양시는 국민은행의 선수단을 인수하는 형식으로 구단의 전체적인 틀을 짠다. 물론 역사는 승계받지 않았으며 신생 구단의 자격으로 K리그 챌린지에 참가를 신청한다. 사무국 및 선수단의 구성이 끝나고 동계훈련이 시작되자 안양 팬들은 비로소 ‘내 팀’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그리고 2월 2일, 정확히 9년 전 안양LG 구단이 연고 이전 소식을 알리던 그 날 보란 듯이 창단식을 치른다. 이날 창단식이 열리는 안양실내체육관은 만석이 되어 안양 시민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을 확실히 보여줬다. 창단을 축하하는 수많은 화환 속에 서울 구단이 보내온 화환은 팬들에게 불태워지며 분노가 지워지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2017년 4월 19일

창단 첫해였던 2013년 FA컵의 첫 경기로 수원을 만나며 옛 라이벌과의 멋진 한판을 치른 안양이었지만, 정말 만나고 싶은 상대는 역시 서울이었다. 그러나 K리그 챌린지의 전쟁 같은 승격 경쟁 속에서 안양은 쉽게 올라서지 못했다. 2016시즌 또한 리그 5위를 차지하며 아쉽게 승격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간절한 바람은 FA컵에서 이루어졌다. 3월 7일 3ㆍ4라운드 대진 추첨식에서 안양이 3라운드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4라운드에서 서울 원정을 떠나는 대진이 결정된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안양 팬들은 환호했다.

물론 안양이 3라운드에서 아마추어팀에게 떨어지며 ‘다 잡은 고기’를 놓칠 수도 있었지만, 안양은 호남대를 상대로 90분에 극적인 결승골을 터트리며 드라마의 화려한 오프닝을 열었다. 그 드라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내일(19일) 오후 7시 30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그 결말을 알 수 있다.

hanno@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