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회] ‘잔디흙의 연결고리’ 배슬기와 권완규는 한 팀이 됐다


포항 권완규
지난 시즌 인천에서 뛰었던 권완규는 올 시즌을 앞두고 포항 유니폼을 입게 됐다. ⓒ포항스틸러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지난해 10월 29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벌어진 인천유나이티드와 포항스틸러스의 맞대결은 비장함이 감돌았다. 두 팀 모두 K리그 클래식 잔류를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를 잡아야 하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포항은 승점 42점으로 9위를 기록 중이었고 인천은 승점 39점으로 포항을 뒤쫓고 있었다. 포항이 이기면 안정적으로 잔류를 확정짓는 상황이었고 인천이 이기면 끝까지 누구도 잔류를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천은 이 경기 바로 전까지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며 7경기 연속 무패 중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이 두 팀은 일진일퇴의 공방을 펼치며 2-2로 팽팽하게 맞섰다.

잔디 투척 사건과 사과, 그리고 징계
후반 추가 시간이 5분 주어진 상황에서 인천이 마지막 총공세에 나섰다. 세트피스 상황에서 수비수들까지 모두 공격에 가담한 것이다. 그런데 김도혁의 왼발을 떠난 공은 포항 골문으로 향했고 이를 골키퍼 김진영이 쳐내자 인천의 한 선수가 몸을 날리며 득점으로 연결했다. 극적인 결승골로 팀을 강등권에서 구출한 이 선수는 바로 인천 수비수 권완규였다. 권완규의 거짓말 같은 골이 터지자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은 난리가 났다. 이 한 골로 인천은 무패 행진을 이어가며 K리그 클래식 잔류의 유리한 분위기를 선점할 수 있었다. 인천이 이기면서 인천과 포항은 승점이 42점으로 같아졌다. 인천에는 귀중한 승리였고 포항으로서는 절대 주지 않았어야 할 승점 3점을 헌납한 뼈아픈 패배였다.

당연히 이날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건 결승골의 주인공 권완규였다. 경기가 끝난 뒤 중계 방송사에서도 곧바로 권완규와 생방송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때 권완규를 향해 무언가 날아왔다. 모래가 한 움큼 권완규를 향해 날아온 것이다. 권완규는 깜짝 놀랐지만 다시 인터뷰를 이어갔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뒤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알고 봤더니 경기에서 패한 뒤 격분한 포항 배슬기가 인터뷰하는 권완규 쪽으로 잔디 한 뭉텅이를 집어 던진 것이었고 이 장면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진 것이다. 경기에서 졌다고 인터뷰 중인 선수에게 잔디를 집어던졌다는 이유로 배슬기는 온갖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배슬기의 잘못이었다. 애꿎은 권완규는 결승골을 넣었다는 이유로 잔디 뭉텅이로 얻어 맞는 피해자가 됐다.

배슬기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권완규에게 던진 건 아니었어요. 화가 나서 던진 건 맞는데 선수를 향해 던질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배슬기는 경기가 끝난 뒤 곧바로 인천 골키퍼 조수혁에게 권완규 연락처를 부탁했다. 배슬기는 1985년생이고 권완규는 1991년생이어서 같은 K리그에서 뛰고 있지만 친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연락처를 수소문 한 것이다. 배슬기가 인천 쪽 선수 중 연락을 주고 받는 건 건국대 후배였던 조수혁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배슬기는 경기가 끝나고 논란이 생기자마자 조수혁에게 권완규 연락처를 받은 뒤 곧바로 권완규에게 연락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미안합니다. 고의는 아니었어요. 오늘 승리 축하해요.” 비록 포항은 쓰라린 패배를 당했지만 배슬기는 그래도 상대 선수를 향해 사과와 함께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

포항 배슬기
포항 배슬기는 ‘잔디 투척 사건’ 이후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포항스틸러스

그런 둘이 한 팀에서 만났다
권완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저한테 의도적으로 던지지 않으셨다는 거 저도 잘 압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우리 같이 K리그 클래식에서 살아남아요.” 훈훈한 마무리였다. 배슬기는 자신의 SNS에도 사과문을 올렸다. “감정적으로 흥분했고 그 과정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습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패배로 인해 불만이 컸지만 프로 선수답지 못한 추태였습니다.” 하지만 배슬기는 프로축구연맹의 징계를 피할 수는 없었다. 배슬기는 상벌위원회에 호출됐고 결국 제재금 500만 원의 징계를 받아야 했다. 고의적으로 권완규를 노린 건 아니었지만 화가 나서 한 이 행동으로 배슬기는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징계까지 받고 말았다. 그렇게 이 둘의 사건은 마무리 됐고 올 시즌 준비에 돌입했다.

그런데 지난 1월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인천을 잔류로 이끄는 귀중한 골을 넣었던 바로 그 권완규가, 배슬기에게 잔디를 얻어맞은 그 권완규가 포항으로 이적을 확정지은 것이었다. 잔디 투척으로 논란이 됐던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란히 한 팀에서 뛰게 되는 거짓말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권완규는 포항의 이적 제안이 들어왔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배)슬기 형이 있는 팀이라는 걸 의식적으로 떠올리기는 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제가 이적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어요. 그냥 프로 선수 경력 중 가장 짜릿한 득점의 상대인 포항으로 이적해 기분이 묘했어요.” 배슬기는 권완규와 한 팀에서 만나게 됐다는 소식에 이렇게 답했다. “깜짝 놀랐어요. 사실은 팬들이 이제는 잊게 된 사건이 또 회자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지만 그래도 좋은 선수가 우리 팀에 오니 반가웠습니다.”

권완규와 다시 만난 배슬기는 또 한 번 사과했다. “형이 그때는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 다시 한 번 미안하다. 우리 같은 팀에서 잘해보자.” 권완규도 웃으며 화답했다. “네. 잘 알고 있어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논란의 이 두 명이 한 팀에서 뛰는 모습은 이채로웠다. 더군다나 배슬기는 중앙 수비 중 오른쪽을 담당하고 있었고 권완규는 오른쪽 풀백이었다. 잔디를 던지고 그 잔디에 맞았던 이 둘이 나란히 한 팀의 한 쪽 수비를 책임지는 모습은 신선한 광경이었다. 특히나 분위기 메이커인 배슬기가 새로 이적해 모든 게 어색한 권완규를 잘 챙긴다. “타지에서 왔잖아요. (권)완규하고 (이)승희가 새로 왔는데 이 동생들하고 자주 어울려 다녀요. 이 둘은 팀에 아는 선수도 없어서 어색할 것 같아요. 제가 같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챙겨주려고 합니다. 원래 제가 또 이렇게 누구 챙기고 오지랖 떠는 걸 좋아하거든요.”

권완규 배슬기
이 둘은 결국 이렇게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포항스틸러스 페이스북 캡쳐

이렇게도 인연이 된다
구단 프런트들은 배슬기를 ‘흙카우터’라고 놀린다. 배슬기가 흙을 던져 점찍은 선수가 포항에 왔다는 뜻이다. 권완규도 웃으며 반긴다. “아마 그때 저를 점 찍어주신 것 같아요. 가뜩이나 수비수들은 호흡이 중요한데 (배)슬기 형이 그 잔디 한 번 던진 걸로 저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신지 더 잘 챙겨 주시거든요. 요새는 늘 붙어 다녀요. 그때 잔디에 맞은 게 잘한 일 같아요.” 이 둘은 이제 편한 동료가 됐다. 지난 시즌의 그 사건은 웃으며 넘길 만큼 아무렇지 않다. 서로 스스럼 없이 대하고 늘 붙어 다닌다. 배슬기는 권완규를 향해 농담도 던진다. “네가 27살이라고? 생긴 거 보면 서른은 돼 보이는데 아직 군대도 안 다녀왔어? 난 너 벌써 군대도 갔다 왔는 줄 알았지. 너 그렇게 어려 보이지 않아. 야, 네가 어떻게 27살이야?” 배슬기는 거울을 보지 않는 모양이다.

호흡도 아주 좋다. 이 둘은 올 시즌 개막 이후 5경기에서 줄곧 호흡을 맞추며 3승 1무 1패를 기록, 팀을 리그 3위에 올려 놓았다. 5경기를 통해 5골을 내주면서 안정적인 수비력을 선보이는 중이다. 비록 자책골로 최종 결론이 났지만 지난 라운드 인천전에서는 권완규가 득점과 유사한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했고 벌써 도움도 두 개나 기록 중이다. 어느덧 포항 수비의 핵인 된 배슬기는 팀 분위기를 리드하며 고참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배슬기는 이렇게 말했다. “선수 생활하면서 ‘잔디 투척 사건’은 오점으로 남았어요. 그 오점을 반성하고 이제는 실력으로 보여 드려야죠. 그리고 제가 결혼을 아직 하지 않고 아이도 없었더라면 (권)완규를 더 잘 챙겼을 텐데 아쉬워요. 요새 신혼이라 칼퇴근 해야 하거든요.” 권완규도 배슬기와 함께 하게 된 포항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지금도 너무 좋아요. 호흡이 이렇게 초반부터 잘 맞을지는 몰랐어요.” 포항을 향해 비수를 날렸던 선수와 그 선수를 점찍은 ‘흙카우터’는 이제 한 팀에서 끈끈한 조직력을 과시하고 있다.

인천전에서 권완규가 골과 다름 없는 플레이로 상대 자책골을 유도한 뒤 권완규와 배슬기는 서로 부둥켜 안으며 기뻐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그렇게 앙숙이 될 뻔 한 이 둘은 이제 한 팀에서 누구보다도 서로를 더 챙기는 선수가 되고 있다. 이렇게도 인연이 되려면 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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