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둘은 지난 8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나는 축구 기자로 일하고 있지만 과거 만났던 여자친구는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라돈치치를 늘 ‘립톤차차’라고 불렀던 그녀는 주말마다 축구장에 가는 나에게 불만이 많았다. 주말이면 남들처럼 벚꽃 구경도 가고 연남동 맛집에도 가고 싶어 했지만 내가 늘 그녀를 축구장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녀는 탄천종합운동장의 먼지 쌓인 의자를 보고는 기겁했었다. 아마 나를 비롯한 많은 남성들이 여자친구와 함께 축구장에서 맥주 한 잔하며 응원하는 걸 로망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만약 축구장에서 연인을 만나 축구장에서 결혼한다면 그건 3대가 덕을 쌓아야 이룰 수 있는 꿈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꿈을 이룬 이가 있다.

“데이트 코스 고민 안 해 좋다”

지성연(남, 39세) 씨와 강민진(여, 35세) 씨는 2009년 수원월드컵경기장, 흔히 말하는 빅버드에서 처음 만났다. 2005년부터 수원삼성을 응원한 강민진 씨는 이미 ‘클럽2030’이라는 수원 소모임에 가입돼 있었고 지성연 씨도 2009년 무렵 이 소모임에 가입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게 됐다. 하지만 이 둘은 그저 경기장에서 만나는 소모임 오빠 동생 사이였다. 당시 이 둘 모두 만나는 이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성연 씨와 강민진 씨는 만나는 이성과 헤어진 뒤에도 무려 7년 동안 경기장에서 자주 만나는 오빠와 동생이었다. 다른 소모임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경기장에서 늘 마주쳤고 원정 경기 응원을 갈 때도 함께 했다.

그러던 이 둘이 연인으로 발전한 건 지난해 5월이었다. 오랜 시간 오빠와 동생으로 지내던 이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결국 연인이 됐다. 오래 동안 알고 지내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이다. 다른 연인들이 최신 영화와 맛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이 둘의 대화는 달랐다. “조나탄 만한 공격수가 한 명만 더 있었으면 좋겠어.”, “우린 염기훈의 팀인 것 같아. 염기훈 같은 선수가 없어.” 다른 연인들 사이에서는 오가기 힘든 대화가 이 둘의 공통 관심사였다. 지성연 씨는 이렇게 말했다. “같이 선수나 구단 욕도 자주 했죠. 관심사가 같다보니 대화가 너무 잘 통했어요. 물론 애정이 있어서 욕도 하는 겁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축구를 좋아하는 이성을 만나는 게 남성 축구팬의 로망이다. 이 로망을 이룬 지성연 씨는 “좋은 게 너무 많다”며 실없이 웃었다. “원래 남자 분들이 데이트할 때 데이트 코스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고민이 별로 없었어요. 경기가 있는 날이면 다른 계획을 따로 세우지 않고 경기장으로 향했거든요. 빅버드에 가서 자연스럽게 축구도 보고 사람들도 만나면 그보다 더 행복한 데이트가 없었습니다. 딱히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데이트가 자연스럽게 이뤄졌죠. ‘밥은 뭘 먹어야 하나. 오늘은 어딜 가야하나’ 이런 고민을 별로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런 고민을 할 시간에 ‘오늘은 꼭 이겼으면 좋겠다’는 고민을 더 했죠.” 7년 동안 빅버드에서 주말마다 늘 얼굴을 마주했던 이 커플은 그렇게 정식으로 만난 지 5개월 만에 결혼을 약속했다.

웨딩 촬영도 우승 티셔츠 입고

다른 예비 부부들이 결혼식을 어디서 할 건지 고민하는 것과 달리 이 커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예식장을 정했다. “우리가 빅버드에서 처음 만났으니 결혼식도 빅버드에서 올리자.” 수원월드컵경기장 내에 있는 ‘WI컨벤션’에서 결혼식을 올리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곧바로 식장을 예약했다. 다른 예비 부부들은 여러 예식장을 따져 보고 둘러보지만 이 커플은 그 어떤 예식장도 알아 보지 않고 바로 곧바로 빅버드에 있는 예식장으로 향했다. 이 커플은 지난해 10월 벚꽃이 흩날리는 4월 9일 빅버드에서 결혼하기로 날짜와 장소를 잡았다. “설마 그럴 줄은 몰랐는데 정말 빅버드에서 결혼해?” 같은 소모임 회원들도 이 커플의 결혼식 장소를 반겼다. 그렇게 이 둘은 빅버드에서 만나 빅버드에서 결혼하는 꿈만 같은 일을 약속했다.

평생 남을 데이트 스냅 사진을 찍은 곳도 빅버드였다. 지난 달 1일 이 커플은 스냅 사진을 찍기 위해 빅버드로 향했다. 이 예비 부부에게 멋진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무려 9,228명이 이들을 반겼다. 사실 이 날 수원삼성과 광저우헝다의 2017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경기가 빅버드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이 커플은 비가 내리는 빅버드를 배경으로 수원의 푸른 유니폼을 입고 평생 간직할 스냅 사진을 촬영했다. “저희가 사진 촬영을 하니 다른 분들도 와서 축하해 주시더라고요. W석에도 비가 떨어졌는데 저희가 비 맞으면서도 사진 촬영을 하는 모습을 보고 결혼 기념으로 스냅 사진 촬영한다는 걸 아셨나 봐요. 잘 모르는 분들한테도 같은 팀을 응원한다는 이유로 과한 축하를 받았습니다.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빅버드 스카이박스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웨딩홀 패키지도 있었는데 예비 신부인 강민진 씨가 이를 잘 알아보고 신청해 이 둘은 처음으로 빅버드 스카이 박스에도 가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이 예비 부부는 웨딩 촬영 때는 아주 특별한 티셔츠를 나란히 맞춰 입기도 했다. 바로 지난 시즌 수원의 FA컵 우승 기념 티셔츠였다. 이 둘은 (또 언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를) 수원의 FA컵 우승 기념 티셔츠를 맞춰 입고 미래를 약속했다. 빅버드에서 처음 만나 빅버드에서 데이트 스냅 사진을 찍은 뒤 우승 기념티를 입고 웨딩 촬영을 한 후 빅버드에서 결혼하는 축구팬 모두의 로망을 이룬 것이다. 이 커플이 빅버드에서 스냅 사진을 찍던 날 수원은 비록 승리를 따내지는 못했지만 조나탄과 산토스가 이 예비 부부를 위한 골 축포를 쏘아 올리기도 했다.

이 커플은 웨딩 촬영 때도 수원의 FA컵 우승 기념 티셔츠를 입었다.

빅버드서 만나 빅버드서 결혼한 부부

이들에게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지난해 10월 결혼식장과 결혼 날짜를 잡았는데 올 2월 프로축구연맹이 발표한 K리그 일정을 보고 한숨부터 내쉰 것이다. 빅버드에서 공교롭게도 딱 결혼식을 올리는 순간 수원삼성과 상주상무의 경기가 예정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경기 하는 날을 피해 결혼식을 올리는 게 주변 분들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2월에 공지되는 K리그 경기 일정까지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객 분들 교통이나 주차 문제도 있잖아요. 경기가 있는 날 결혼식을 올리는 건 죄송했죠. 또 소모임 분들에게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수원 경기도 포기하고 결혼식장에 오라고 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하지만 결혼식이 열린 지난 8일 이들은 더 많은 축하를 받았다. 웨딩홀이 수원월드컵경기장 4층에 있는데 같은 층에 수원삼성 구단 사무실이 자리 잡고 있다. 웨딩 촬영 당시 촬영에 필요한 축구공을 빌리기 위해 구단 사무실에 잠깐 들렀던 적이 있는데 수원 경기장에서 만나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사연을 들은 구단 직원이 멋진 선물을 준 것이다. 수원삼성과 상주상무의 경기가 열리기 직전 빅버드 전광판에는 커다란 사진 한 장이 등장했다. 지성연과 강민진 씨의 웨딩 사진이었다. 그리고는 장내 아나운서가 크게 말했다. “빅버드에서 만나 빅버드에서 오늘 결혼하는 지성연, 강민진 씨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축하 멘트가 흘러 나오자 빅버드를 찾은 관중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빅버드 커플’을 위한 구단 직원의 선물이었다. 아마 이렇게 많은 이들의 축하를 받는 신혼부부는 드물 것이다.

경기 시작 시간은 오후 3시였고 이 커플의 결혼식은 오후 3시 반이었다. 그런데 소모임 회원들은 빅버드에서 열리는 수원 경기도 포기하고 결혼식장으로 달려왔다. 이들 중에는 수원 유니폼을 입은 이들도 있었다. 마음은 밖에서 열리는 축구 경기에 가 있지만 몸만 그 경기장 실내에 있는 결혼식장에 있는 듯했다. 지성연 씨와 강민진 씨도 본식이 끝난 뒤 기념 촬영을 하는 동안 소모임 회원에게 계속 물었다. “경기 결과는 어떻게 되고 있어? 뭐? 아직도 0-0이라고?” 이 소모임 회원 중 일부는 결혼식이 끝난 뒤 급하게 밖으로 나가 후반전을 지켜보기도 했다. 빅버드에서 열린 결혼식이기 가능한 일이었다. 지성연 씨는 이렇게 말했다. “예식이 끝나고 같이 축구를 볼 수 있도록 시간이 맞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선수들과 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결혼할 수 있었다는 게 행복합니다.”

이 커플은 웨딩 촬영 때도 수원의 FA컵 우승 기념 티셔츠를 입었다.

“평생 같이 기뻐하고 슬퍼할게요”

다른 부부나 커플이 상대의 눈치를 보며 축구장에 다니는 동안 이 부부는 이제 마음 놓고 축구를 볼 수 있다. “앞으로도 평생 연간회원권을 끊어서 축구장 데이트를 같이 즐겨야죠. 또 지금까지는 원정 경기 응원을 가면 당일로 다녀왔는데 부부가 됐으니 앞으로는 즐겁고 편하게 1박 2일, 2박 3일로 다닐 예정입니다. 축구도 보고 여행도 하고 좋잖아요.” 물론 이 둘은 배우자 눈치를 보며 유니폼이나 머플러를 사지 않아도 된다. “구단 커뮤니티에 가 보면 결혼한 형님들이 ‘유니폼을 사고 싶은데 아내에게 어떻게 허락받아야 하느냐’고 자주 그럽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걱정은 없을 것 같아요. 오히려 아내가 먼저 유니폼도 사고 머플러도 사거든요.”

이 부부는 평생 빅버드에서 추억을 쌓고 싶어한다. 지성연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축구 때문에 기분이 좋은 날은 아내도 기분이 좋습니다. 또 제가 축구 때문에 마음이 아픈 날은 아내도 기분이 우울해요. 기쁜 날은 같이 기뻐하고 마음이 아픈 날은 서로 위로해 주면서 사랑이 싹텄어요. 앞으로도 손잡고 수원 경기를 보러 다니면서 평생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하는 친구가 되고 싶어요. 아이가 생기면 수원을 응원하라고, 축구장에 같이 가자고 강요는 안 할 겁니다. 물론 그때도 우리 부부는 빅버드에 갈 거에요.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딱 하나만 강요할 예정입니다. 절대 FC서울 팬이 되면 안 된다고요. 그건 절대 안 돼요.” 신혼여행지인 몰디브로 떠나는 와중에도 FC서울을 ‘디스’하는 걸 보니 진짜 골수 수원팬 부부가 맞긴 맞는 모양이다.

처음 만났던 축구장에서 매주 데이트를 하고 그곳에서 추억이 듬뿍 담긴 사진을 찍고 그 선수들이 일궈낸 우승의 역사를 담은 옷을 입은 채 웨딩 사진을 찍은 이들은 그들의 성지와도 같은 그 축구장에서 결혼식까지 올렸다. 수십 년 후 수원의 푸른 유니폼을 입은 한 노부부가 다정히 손을 잡은 채 빅버드에 앉아 있을 모습을 상상해 보니 참으로 부러우면서도 흐뭇하다. 이 부부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라돈치치를 늘 ‘립톤차차’라고 불렀던 그녀가 오늘도 바람에 스치운다. 그때 그냥 ‘립톤차차’가 맞다고 해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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