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명장 거스 히딩크 감독은 어떻게 한국 대표팀을 맡았을까. ⓒ피스컵조직위원회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한국과 거스 히딩크 감독. 이제는 당연해 보이는 조합이다. 하지만 이 조합이 성사되기까지의 험난했던 과정에 대해서는 그리 주목하는 이들이 없다. 그저 히딩크 감독이 2002년 한국 대표팀을 맡았고 그가 4강 신화를 이끌었다는 것에만 주목한다. 16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한국 축구의 영웅 대접을 받는 히딩크 감독을 다시 한 번 추억해 보자. 과연 우리는 어떻게 세계적인 명장 히딩크 감독과 함께할 수 있었을까. 지금부터 한국 대표팀이 히딩크 감독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 그 시절로 시간을 되돌려 보려 한다. 시계를 2000년 10월로 돌려보자.

니폼니시? 자케? 벵거?

2000년 10월 레바논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한국은 3위를 기록했다. 우승을 노렸던 한국은 이 아시안컵에서 우승 사냥에 실패한 뒤 허정무 감독과 작별하기로 방침을 굳혔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이제는 세계적인 명장을 모셔와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을 때였다. 이에 앞서 월드컵 기술지원단은 2000년 2월 제주도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세계적인 명장 영입을 언급하기도 했다. 보라 밀루티노비치(유고)나 발레리 니폼니시(러시아), 자갈로, 페레이라(이상 브라질), 에메 자케, 아르센 벵거(이상 프랑스) 중 한 명을 대표팀 기술고문으로 영입하겠다고 거론한 것이다. 하지만 2000년 아시안컵 실패 이후 기술고문이 아니라 대표팀에 세계적인 명장을 감독으로 직접 앉히자는 의견이 팽배했다.

그러던 중 대한축구협회 신임 기술위원장으로 이용수 세종대 교수가 선임됐다. 2000년 11월 2일이었다. 당시 니폼니시 감독은 J리그 산프레체 히로시마와 계약을 했고 밀루티노비치 역시 중국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자갈로는 브라질 플라멩구와 계약했다. 대표팀으로서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이때 이용수 신임 기술위원장은 이렇게 밝혔다. “니폼니시나 비쇼베츠보다는 한 단계 높은 지도자를 데려와야 한다. 프랑스의 에메 자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한축구협회는 대표팀 감독 1순위로 자케 감독을 점찍었다. 이 소식을 접한 한 스포츠 에이전트사에서 곧바로 프랑스로 날아가 자케 감독을 만났다. 하지만 자케 감독은 이 자리에서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는 것에 관심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자케 감독으로서는 한국 대표팀을 맡아야 할 간절함이 없었다. 이미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프랑스를 정상으로 이끌며 목표를 이룬 그가 아시아 팀을 맡아 또 다시 도전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에이전트사는 자케 감독과 대화를 나눈 뒤 확신했다. “그 어떤 거액의 유혹에도 자케 감독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케 감독은 한국 대표팀 감독 후보로 언급하며 의사를 물은 프랑스 언론에도 “어느 나라에서도 지도자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 프랑스 유소년 축구 발전에 남은 열정을 쏟고 싶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소속팀 없이 프랑스축구협회 기술고문으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자케 감독과 접촉해 연봉 등만 잘 협상하면 될 것이라고 믿었던 협회로서는 자케 감독의 칼 같은 거절에 당황했다.

보라 밀루티노비치 감독이 히딩크 감독 대신 한국 팀을 맡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미국 ESPN 캡처

히딩크 감독의 무리한 요구 두 가지

2000년 11월 14일 협회 기술위원회는 이용수 기술위원장 체제 이후 처음으로 회의를 열고 토론을 펼쳤다. 여전히 자케 감독이 1순위였고 네덜란드 출신의 요한 크루이프와 클레멘스 베스터호프 전 나이지리아 대표팀 감독 등이 거론됐다. 크루이프 감독은 바르셀로나를 프리메라리가 4연패로 이끌었고 베스터호프 감독은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나이지리아를 16강에 진출시킨 주인공이었다. 이들과 함께 후순위로 히딩크 감독도 후보 물망에 올랐다. 이날 기술위원회는 “그래도 일단은 자케 감독에게 먼저 직접적인 의사를 타진해 보자. 12월 20일에 열리는 한일 정기전 때까지는 감독 영입 작업을 마무리하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협회는 곧바로 가삼현 국제부장을 프랑스로 파견했다. 당시 현대중공업 직원이면서 정몽준 회장의 지시에 따라 협회에서 근무를 하던 가삼현 국제부장은 대외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이면서 능력도 인정받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가삼현 국제부장이 직접 만난 자케 감독은 단호했다. 2000년 11월 21일 밤 프랑스축구협회 사무실에서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지만 자케 감독은 “한국과 프랑스 대표팀은 물론이고 어느 나라의 대표팀이나 클럽팀도 맡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가삼현 국제부장은 대신 이 자리에서 한국과 프랑스가 2002년 5월 평가전을 치르기로 합의하는 의외의 성과를 냈다. 결국 협회는 후순위인 히딩크 감독과 협상을 시작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1999년 레알마드리드 감독으로 7달 만에 경질 당했고 이후 레알베티스 감독으로 부임해 강등권을 면치 못하다가 또 다시 경질 당해 사면초가에 몰린 상황이었다. 유럽 빅리그에서의 입지가 상당히 좁아져 있어 협상 조건만 잘 맞는다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을 가능성도 커 보였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가삼현 국제부장이 직접 날아가 히딩크 감독의 대리인과 대면했지만 수락을 받아내지 못한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를 잘 몰라 당장 결정하기 어렵다”며 직답을 피했다.

하지만 가삼현 국제부장은 스위스에서 다시 대리인을 만나 의사를 타진했고 히딩크 감독과 마주할 수 있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나이지리아 대표팀과 남아공 대표팀, 그리고 스코틀랜드 셀틱 등에서 감독직 제안을 받은 상황이었다. 이 자리에서 가삼현 국제부장은 히딩크 감독을 이렇게 설득했다. “이미 알려진 강팀을 이끌고 성적을 내는 것도 좋지만 아직 월드컵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한국이라는 팀을 이끌고 성적을 내는 것도 감독으로서는 매력적인 일 아닌가.” 그러자 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히딩크 감독은 납득할 수 없는 두 가지 제안을 했다. 첫 번째는 “훈련할 수 있는 시간의 무제한적으로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전세계 필요한 곳을 모두 돌아다니면서 전지훈련을 하고 강팀과 많은 경기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협회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보라 밀루티노비치 감독이 히딩크 감독 대신 한국 팀을 맡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미국 ESPN 캡처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다”

한 마디로 협회는 전폭적으로 지원만 하고 감독 권한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가삼현 국제부장은 “생각해 보겠다”면서 자리를 떴다. 히딩크 감독 입장에서는 ‘이런 파격적인 조건을 받아들일 나라는 없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큰 기대 없이 한 말이었다. 협회가 어느 정도로 자신을 진지하게 원하는지 테스트해보기 위해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열흘 뒤 다시 가삼현 국제부장과 마주한 히딩크 감독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삼현 국제부장이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히딩크 감독은 가삼현 국제부장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자 히딩크 감독도 한국행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2000년 11월 24일 스위스에서 두 번째 만난 히딩크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수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나무에 오르라고 해도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가.”

가삼현 국제부장이 “감독님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하자 히딩크 감독은 “그런 지원이라면 한국 대표팀을 맡을 용의가 있다”며 수락 의사를 표명했고 다음 날 다시 3차 회동을 열었다. 계약 조건 등을 합의하기 위해서였다. 가삼현 국제부장은 계약서에 사인을 받지는 않았지만 구두로 계약에 합의했고 구체적인 조건까지도 어느 정도 협의를 마쳤다. 계약금과 연봉은 각각 100만 달러 수준이었고 여기에 이에 버금가는 성과급도 따로 계약서에 명시하기로 했다. 가삼현 국제부장은 스위스에서 히딩크 감독과 세 차례 만나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유럽 빅리그에서 입지가 좁아졌던 히딩크 감독은 새로운 무대에서 도전해 성과를 내야 했고 그게 월드컵 개최국인 한국이라면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협회는 이 소식을 곧바로 공식 발표했다. “히딩크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내정했고 곧 계약서에 사인할 것”이라면서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히딩크 감독도 1999년 1월 이후 A매치 자료를 협회에 요청하면서 한국 대표팀 감독 부임을 준비했다. 네덜란드에서 활약한 허정무 감독과 대표팀 운영 방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로도 약속했다. 협회의 목표는 2000년 12월 10일까지는 히딩크 감독과 정식으로 계약한 뒤 12월 20일 일본에서 열리는 한일전부터 히딩크 감독이 벤치에 앉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이후 감감 무소식이었다. 구두 계약만 맺은 뒤 히딩크 감독은 허정무 감독과도 접촉하지 않았고 협회에도 연락 한 통 없었다. 대표팀 소집은 12월 10일이었는데 대표팀이 모이기 불과 나흘 전인 6일까지도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그러자자 “혹시 히딩크 감독이 마음을 바꾼 것 아니냐”, “협회가 확정되지도 않은 일을 성급하게 발표한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보라 밀루티노비치 감독이 히딩크 감독 대신 한국 팀을 맡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미국 ESPN 캡처

16년 전에 비해 나아진 게 있나

그렇게 협회가 애 태우던 2000년 12월 7일 마침내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히딩크 감독은 대리인을 통해 “감독직을 최종적으로 수락하겠다”면서 “대신 20일 일본에서 열리는 한일 친선전은 벤치가 아니라 관중석에서 지켜보겠다”고 했다. 협회는 히딩크 감독과 상의 후 네덜란드축구협회에 문의해 수석코치도 소개 받았는데 그가 바로 핌 베어백이었다. 네덜란드축구협회 측에서는 “히딩크 감독이 워낙 다혈질이니 부드러우면서도 사리분별이 명확한 코치가 옆에 있어야 한다”면서 베어백을 수석코치로 추천했다. 그렇게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 항공편으로 2000년 12월 16일 한국으로 향했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 대해서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비행기에서 펴 본 한국 안내 책자가 한국에 대한 전부였다. 히딩크 감독은 2000년 12월 17일 오전 10시 55분 김포공항에 첫 발을 내딛고 한국에서의 역사적인 18개월의 생활을 시작했다.

히딩크 감독은 이후 곧바로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열리는 일본으로 향했다. 협회와 언론의 요구에 따라 많은 플래시가 터지는 앞에서 선수들과 상견례를 할 예정이었지만 히딩크 감독은 이 상견례를 돌연 취소했다. “선수들에게 부담을 주는 게 싫다”는 이유였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년 1월 1일부터 정식 감독이다. 아직은 한국 대표팀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입장이 아니다. 한일전을 앞두고 긴장한 선수들에게 부담을 주기도 싫다.” 히딩크 감독은 훈련장에서 멀찌감치 선수들이 뛰는 모습만 지켜보다가 호텔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서 경기를 지켜본 뒤 네덜란드로 돌아갔다가 1월 10일 입국해 ‘4강 신화’의 여정을 시작했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한국이 월드컵에서 1승도 올리지 못한 팀”이라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그건 3년 전의 이야기일 뿐이다.”

단순히 히딩크 감독과 4강 신화의 추억을 곱씹어 보기 위해 그때를 되돌아 보는 게 아니다. 협회는 과연 15년 전과 비교했을 때 대표팀 지도자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고 지금의 대표팀 감독은 16년 전 히딩크 감독처럼 후회 없이 멋지게 이 도전에 임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히딩크 감독의 4강 신화를 단순히 어느 누구 혼자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당시 4강 신화는 “안방에서 망신 당하면 안 된다”며 이를 악문 모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러 모로 삐거덕거리는 지금의 대표팀이 새겨야 할 메시지도 바로 이거다. 이미 오래 전 떠난 히딩크 감독이 자꾸 그리워지는 건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답답하기 때문 아닐까. 그리고 과연 한국 축구 대표팀이 지금도 감독 누군가 명예를 걸고 도전할 만큼 매력적인 곳인지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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