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아이파크와 경남FC는 지난 19일 '낙동강더비' 서약식을 맺었다. 이날부터 1일이다. ⓒ부산아이파크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더비는 같은 도시나 지역을 연고로 하는 팀끼리의 경기로 19세기 중엽 영국의 소도시 더비(Derby)에서 기독교 사순절 기간에 성 베드로(St. Peters) 팀과 올 세인트(All Saints) 팀이 치열한 축구 경기를 벌인 데서 유래한 말이다. 하나님 믿으랬더니 그깟 공놀이 하나에 치고받고 싸운 어린양들이 바로 더비의 창시자들이다. 우리는 이렇게 같은 지역에 위치한 두 팀의 맞대결을 더비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제는 이 의미가 더 포괄적으로 변하면서 지역과 상관없는 치열한 라이벌전까지도 더비라고 칭해지고 있다. 스페인에는 레알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엘 클라시코가 있고 스코틀랜드 셀틱과 레인저스의 올드펌 더비, 아르헨티나 보카주니어스와 리베르 플라테의 수페르 클라시코도 유명하다.

더비는 전쟁이나 다름없다. 선수들도 다른 경기보다 더한 전투력을 느끼고 팬들도 거친 응원을 퍼붓는다. 언론도 이를 조명하면서 불에 기름을 붓는다. 여기에 갑자기 라이벌 팀으로 이적한 선수가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경기 내내 야유를 듣기도 한다. 바르셀로나에서 레알마드리드로 이적한 루이스 피구를 향해 팬들은 경기장으로 돼지머리를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꼭 이런 더비 경기에는 논란의 판정이나 언행이 나와 두고 두고 회자 된다. 정치와 종교, 구단 탄생 배경 등 역사와 현재의 열정이 뒤섞여 한 편의 드라마가 완성되는 것이다. 더비는 리그 흥행에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더비는 이제 같은 지역에 위치한 두 팀의 맞대결에서 지역과 상관 없는 라이벌전으로까지 더 의미가 커졌다.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우리 더비했어요’

그런데 지난 19일 K리그에 그토록 고대하던 더비가 탄생(?)했다. 바로 K리그 챌린지 부산아이파크와 경남FC가 더비 서약식을 맺고 “이제부터 우리 둘의 경기를 ‘낙동강 더비’로 불러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대결에서 패한 팀에 대한 벌칙도 정했다. 승리 팀의 다음 원정경기 때 유니폼, 머플러 등 구단 MD 상품을 착용한 원정팬 100명에게 입장 티켓 무료 제공하고 패배 팀의 마스코트가 승리 팀의 홈경기에 방문 응원전 봉사하기도 벌칙 중 하나다. 단, 마스코트는 패배 팀 프런트의 팀장급 이상이 직접 착용하기로 했다. 또한 패배 팀이 승리 팀에게 지역 특산물을 조공으로 바치는 벌칙도 있다. 주목을 받지 못하는 K리그 챌린지에서 이런 저런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은 박수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과연 이 ‘낙동강 더비’가 정착돼 팬과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세상에 서약서에 사인하고 웃으며 사진 찍고 서로 벌칙을 정하는 더비는 없다. 더비라는 건 역사와 라이벌 의식이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하는 법인데 갑자기 서약식을 맺었다고 해 이를 ‘낙동강 더비’라고 인정해줄 사람은 없다. 스토리를 만들기 위한 양 구단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차라리 다른 쪽으로 스토리를 만드는 게 더 나을 뻔했다. 이 더비 협약식은 언론에 기사 몇 개 나가는 것 말고는 큰 효과가 없다. 더비라는 건 남녀가 만나 썸을 타다가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라고 할 때처럼 딱 어느 순간 맺어지는 게 아니다. 경기가 치열하고 그러다가 사건 사고가 터지고 감정이 악화된 상황에서 누군가 상대팀으로 이적하고 또 그 선수가 골을 넣고 감독이 직접적으로 상대에 독설을 날리고 팬들이 상대의 역사를 부정하는 치열함이 수 차례 반복되다 보면 그때쯤 사람들은 이걸 더비라고 알아서 부르기 시작한다.

‘낙동강 더비 서약식’이라는 촌극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너무 인위적인 ‘더비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봐야 한다. 이런 똑같은 일이 2009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2009년 시즌을 앞두고 전주월드컵경기장 2층 브리핑실에서 양 구단 관계자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호남더비 매치 협약식’을 체결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이철근 전북 단장과 김영훈 전남 단장은 협약서를 교환하면서 환한 미소를 보였다. 으르렁대야 제대로 ‘더비 맛’이 나지만 이 두 신사는 카메라를 보고 훈훈하게 웃었다. ‘여러분, 저희 이제부터 더비합니다’라는 표정이었다. 양 구단은 이 경기를 앞두고 홍보에 열을 올렸지만 이 경기를 ‘호남더비’라면서 주목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호남더비’는 그럴싸한 더비처럼 보였지만 그 안엔 팬들이 서로 으르렁거릴 만한 요소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결혼했어요’도 아니고 ‘우리 더비했어요’다.

흥행을 위한 더비? 더비로 인한 흥행!

‘호남더비’가 끝난 뒤 양 팀 감독의 발언도 우리가 생각하는 더비와는 달랐다. “K리그 흥행을 위해 이 더비가 발전했으면 좋겠다.” 참 도덕적이고 올바르고 신사적이고 식상한 발언이었다. ‘호남더비’라는 명칭을 붙인 이상 양 팀 감독은 ‘K리그 흥행’을 먼저 생각할 게 아니라 상대팀을 박살낼 표정을 지어야 했다. “우리는 심판을 매수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리그 우승 한 번 없는 팀과는 라이벌로 엮이는 게 불쾌하다”는 말이 오고 갔어야 했다. “K리그 흥행을 위해 이 더비가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발언은 거의 ‘자매결연 매치’에 가까운 느낌이다. 더비는 사이좋게 발전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 서로를 깨부수기 위해 하는 거다. 상대 팬을 자극할 만한 것들이 자꾸 쏟아져 나와야 한다. 전북과 전남은 ‘호남더비’ 협약식을 열고 이후 지속적으로 시즌을 앞둔 상황에서 정기전을 치르기로 했었지만 이후 이 경기는 이뤄지지 않고 흐지부지됐다.

성남FC와 수원FC의 ‘깃발더비’도 마찬가지였다. 양 팀 구단주가 서로 내기를 해 이긴 팀이 적진에 깃발을 꽂기로 한 것 자체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런 역사가 지속된다면 꼭 더비라는 거한 명칭이 붙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관심을 끌만한 이벤트로 주목받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서로 충돌도 생기고 역사가 쌓여 라이벌로 주목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깃발더비’는 단 두 번만으로 끝났다. 이 역시도 흐지부지 되고 만 것이다. 인위적으로 급조된 자매결연 같은 더비는 누군가가 계속 추진하지 않으면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명맥이 끊기고 만다. 웃으며 악수를 하고 시작한 ‘호남더비’나 구단주끼리 내기를 해 주목받은 ‘깃발더비’가 왜 팬들에게도 큰 감흥이 없었고 언론도 주목하지 않았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는지를 잘 생각해 보자. 계약서 쓰고 하는 더비가 흥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이건 더비가 아니라 자매결연이다.

K리그에도 더비, 더 정확히 말하면 최고의 라이벌전이 있다. 바로 FC서울과 수원삼성의 이른바 ‘슈퍼매치’다. 역사를 짚을 때 어디부터 어떻게 짚어야 하는지조차 민감한 대결이다. 안양LG 시절의 역사부터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원 팬들이 발끈한다. “우리의 라이벌은 안양이었지 지금의 서울은 라이벌이 아니다”라고 할 게 분명하다. FC서울의 과거 역사를 부정하면서 라이벌로 엮이는 것조차 불쾌해 한다. FC서울은 계속되는 수원삼성의 부진을 보며 자신들의 찬란한 업적에 더 큰 자부심을 느낀다. 칼럼을 쓰는 입장에서 그들의 과거 역사와 최근의 경기력 모두 잘못 건드렸다가는 독자들에게 혼날 각오를 해야 한다. 누구도 그들에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더비 인증을 하라고 강요한 적도 없지만 우리는 이 경기를 K리그 최고의 라이벌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2009년 전북현대와 전남드래곤즈는 '호남더비' 협약식을 맺었다. ⓒ전북현대

‘슈퍼매치’와 ‘낙동강더비’는 뭐가 다를까

조광래 감독의 지도 방식에 불만을 품은 안양의 브라질 선수 뚜따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복수를 위해 수원으로 이적한 것도 이 라이벌전의 흥미로운 역사다. 뚜따는 결국 수원 유니폼을 입고 안양을 상대로 골을 성공시킨 뒤 조광래 감독 앞으로 달려가 ‘주먹 감자’를 날렸다. 서정원 감독도 이 ‘슈퍼매치’의 산증인이고 심지어 최근에는 이상호가 수원에서 서울로 이적하며 또 한 번 역사를 만들었다. 그런데 서울 유니폼을 입은 이상호가 첫 수원과의 맞대결에서 골까지 넣었으니 당연히 이 두 팀 팬들은 앞으로 더 치열하게 싸울 게 분명하다. 억지로 더비 명칭을 짓지 않아도, 그렇다고 양 쪽 구단에서 내기를 하지 않아도 이 ‘슈퍼매치’에는 늘 수만 명의 관중이 들어찬다. ‘슈퍼매치’는 ‘호남더비’나 ‘낙동강 더비’, ‘깃발더비’처럼 “이 경기를 통해 K리그가 더 흥행했으면 좋겠다”는 점잖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상대를 납작하게 눌러주는 게 그들의 가장 큰 목적일 뿐 이 한 경기로 리그 전체의 흥행까지 걱정해야 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슈퍼매치’는 리그 전체의 흥행을 일으켜 세울 K리그 최고의 매치로 자리 잡고 있다. 억지로 쥐어짜내 만들어낸 더비보다는 자연스럽게 역사가 쌓여 만들어진 더비가 훨씬 더 흥미를 끈다. ‘슈퍼매치’와 함께 진짜 K리그에서 라이벌전으로 꼽을 만한 승부는 울산현대와 포항스틸러스의 ‘동해안더비’ 정도다. 1973년과 1983년 창단된 포항과 울산은 중요한 길목에서 숱한 명승부를 펼치며 영남 지역 축구 흥행을 일으켰다. 골키퍼 김병지는 1998년 울산 소속으로 헤딩골을 꽂아 넣어 울산을 챔피언결정전에 진출시키더니 2년 후 포항으로 이적, 양 팀 대결에 불을 지폈다. 2002년에는 마지막 경기서 울산이 이기고 포항이 성남에 무승부만 거둬도 울산이 우승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포항이 성남에 패하며 우승컵이 성남 품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울산 팬들은 포항 특산물 과메기만 봐도 점심에 먹은 밥이 역류할 정도일 것이다.

또한 2004년 두 팀은 또다시 챔피언결정전 길목에서 만나 명승부를 펼쳤다. 울산은 통합 승점 1위로 4강에 진출했지만 플레이오프서 따바레즈에게 통한의 골을 허용하며 챔피언결정전 진출 티켓을 포항에 내줬다. 영남권에 위치한 두 팀은 오랜 팀 역사를 자랑한다는 사실도 닮았다. 여기에 설기현은 포항에서 울산으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수도권에 위치한 팀들의 경기가 아니라 ‘슈퍼매치’에 비해 다소 덜 조명되지만 역사와 전통, 스토리로 보면 이 경기도 충분히 더비라 칭하기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슈퍼매치’와 ‘동해안더비’를 빼면 K리그에서 제대로 더비로 묶을 만한 맞대결은 없다. 더비는 이 경기를 오래 지켜본 외부에서 만들어주는 거지 내부에서 만드는 게 아니다. 하루아침에 양 구단이 협약서에 서명한 더비나 언론 혼자 신나게 띄우는 라이벌전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2009년 전북현대와 전남드래곤즈는 '호남더비' 협약식을 맺었다. ⓒ전북현대

더비 협약식? 차라리 ‘죽빵’을 날려라

체통은 잃고 싶지 않고 라이벌은 만들고 싶으니 점잖게 더비 협약식이나 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 언론과 팬들의 조명을 받으려는 구단 관계자들의 노력까지 폄하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들 나름대로도 수도권 빅클럽에만 쏠리는 관심을 자신들에게 돌리기 위한 방법으로 여러 고민이 많을 것이다. 그들의 노력은 존중한다. 하지만 ‘호남더비’와 ‘낙동강더비’ ‘깃발더비’가 왜 ‘슈퍼매치’처럼 주목받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스토리를 양산하고 포장하는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 구단 관계자들이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나와 <스포츠니어스> 역시 K리그의 스토리를 더 잘 포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지금의 ‘낙동강더비’는 대다수가 한 번 피식 웃고 넘어갈 이벤트지만 이걸 앞으로 잘 포장하는 건 구단 관계자와 선수들, 그리고 언론 모두에 주어진 임무다. ‘낙동강더비’ 서약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펼치는 ‘엘 클라시코 더비’는 단순한 축구 경기가 아니라 독립 전쟁으로 발전했다.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 도시인 바르셀로나와 기득권을 가진 카스티야의 심장 레알 마드리드가 펼치는 축구 전쟁에는 정치적인 구호가 난무한다. 또한 셀틱과 레인저스가 치르는 스코틀랜드의 ‘올드 펌 더비’도 마찬가지다. 종교 문제까지 결부돼 그라운드는 물론 관중석에서도 종종 싸움이 벌어지는 악명 높은 더비다. 레인저스는 개신교, 셀틱은 가톨릭 팬이 많으며 라이벌의 역사는 자그마치 120년이 넘는다. 그런데 K리그에서는 이런 오랜 역사를 한 번에 생략하고 라이벌을 만들고 싶어한다. ‘더비 강박증’에 걸린 것 같다. 중요한 건 이렇게 명칭만 그럴싸한 더비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팬들 스스로가 먼저 전투력을 발휘할 만큼의 역사가 쌓여야 한다는 점인데 우리는 그걸 잊고 있다. 양 쪽 구단 대표가 만나 웃으며 ‘낙동강더비’ 서약식을 하는 것보다는 조금씩 앙숙의 역사를 쌓아가는 게 더 필요할 때다. 더비 협약서보다는 차라리 대표이사끼리 ‘죽빵’을 날리는 게 더 더비답지 않을까. 이제는 ‘더비 강박증’에서 벗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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