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U-20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기니와 한 조에 속했다. ⓒ2017피파20세월드컵조직위원회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또 죽음의 조란다. 한국이 어제(15일) 수원 아트리움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기니와 함께 A조에 편성되자 많은 이들은 우리가 죽음의 조에 걸렸다고 탄식하고 있다. 이름만 들으면 그럴 듯하다. 마라도나의 나라 아르헨티나와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 그리고 늘 청소년 월드컵에서 강한 면모를 보인 아프리카에 속한 기니가 한 조에 포함됐으니 잔뜩 쫄 법도 하다. 다들 한국이 죽음의 조에 속했다면서 절망적인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조를 죽음의 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면 무시무시한 팀들이지만 따지고 보면 뭐 대단한 팀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값으로 축구 하는 거 아니지 않은가.

턱걸이 한 아르헨티나, 1승뿐인 기니

남미의 축구 강국 아르헨티나는 이번 지역 예선에서 지옥까지 떨어졌다가 기사회생했다. 남미 지역 예선 B조에서 아르헨티나는 네 경기를 치러 딱 한 번 이겼다. 볼리비아를 5-1로 대파했을 뿐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페루 등과 모조리 비겼다. 볼리비아전을 제외하면 4경기에서 4득점 4실점이다. 운 좋게 조별예선을 통과한 아르헨티나는 6개 팀이 겨루는 남미 지역 최종 예선에서도 흔들렸다. 이 6개 국가 중 풀리그를 통해 4위까지 본선 진출 티켓이 주어졌는데 아르헨티나는 마지막 경기에서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가까스로 4위에 턱걸이했다. 5차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후반 50분 극적인 2-2 동점골을 넣지 못했더라면 마라도나는 지금쯤 한국에서 조추첨을 하는 게 아니라 아르헨티나 이과수 폭포 앞에서 광어회 한 접시를 먹고 있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가 브라질과 가까스로 비기고 1승 1무 2패 승점 4점인 상황에서 이미 본선 진출이 확정된 베네수엘라를 2-0으로 꺾는 사이 5위였던 브라질이 콜롬비아와 0-0으로 비겼기 때문에 아르헨티나가 극적으로 본선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만약 브라질이 최약체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 단 한 골이라도 넣었더라면 아르헨티나는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상황이었는데 브라질이 예상 외의 삽질(?)을 해 아르헨티나가 어부지리로 4위에 턱걸이했다. 우리로 치면 도하의 기적에 버금가는 기적을 연출한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심지어 우루과이와 에콰도르에는 각각 0-3 대패를 당할 정도로 전력이 좋지 않다. ‘마라도나의 나라’이자 U-20 월드컵 최다 우승팀인 아르헨티나는 다 옛날 얘기다. 절대 주눅들 이유가 없다.

기니 또한 마찬가지다. 아프리카 조별예선에서 1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인상적인 경기력을 선보이지 못했던 기니는 이후 아프리카 지역 U-20 준결승에서 세네갈에 0-1로 패하고 말았다. 조별예선 8개 국가 중 네 팀이나 본선 진출 티켓을 따낼 수 있는 여유로운 환경에서 기니가 보여준 경기력은 그저 그랬다. 8개 팀 중 4강에 진출했다고 대단하다는 평가를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기니는 황당하게도 조별예선과 준결승 등 네 경기에서 딱 한 번을 이기고 본선 무대에 합류했다. 참고로 기니가 승리를 따낸 팀은 조별예선 꼴찌를 차지한 말리 뿐이다. 아프리카 팀들은 다들 저력이 있고 청소년 월드컵에서 자주 돌풍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만약 이번 대회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기니보다는 잠비아나 세네갈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잉글랜드, 지난해 우리가 세 번이나 이겼다

가장 주목해야 할 건 잉글랜드다. 이름만 들어도 뭔가 뻥뻥 차면서 축구를 잘 할 것 같은 나라지만 청소년 대표팀 경기력은 실망에 가깝다. 특히나 1993년 호주에서 열린 청소년 월드컵 3위 이후 잉글랜드는 청소년 무대에서는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질 못했다. 특히나 1999년 나이지리아 청소년 월드컵부터는 최악의 결과에 머물러 있다. 1999년부터 최근까지 유럽 예선도 잘 통과하지 못해 딱 5번의 본선 무대에 나왔는데 본선에서의 성적이 7무 8패 4득점 17실점이다. 무려 20년 가까이 청소년 월드컵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것이다. 1999년에는 일본에 0-2로 패했고 2003년에도 일본과 이집트에 각각 0-1로 무너졌다. 2009년에는 우즈베키스탄과도 1-1로 비겼고 2011년에는 북한과도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거의 ‘동네북’ 수준이다.

심지어 이 2011년 콜롬비아 청소년 월드컵에서는 세 경기에서 단 한 골도 내주지 않았지만 단 한 골도 넣지 못하면서 3무승부에 그치는 진기록을 내기도 했다. 축구 종주국이자 가장 발전한 프로리그를 운영하고 있어 겁을 먹을 만도 하지만 잉글랜드 청소년 축구는 그저 성인으로 거쳐 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잉글랜드가 지난 해 열린 유럽축구연맹 U-20 선수권대회조별예선에서 3전 전승을 기록하며 본선 진출 티켓을 따냈지만 준결승에서는 이탈리아에 1-2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데이비드 베컴과 마이클 오언의 나라지만 그건 다 성인 무대에서의 이야기다. 20년 가까이 청소년 무대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나라와 한 조가 됐는데 오히려 잔치를 벌이면 벌였어야지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전혀 없지 않은가. 잉글랜드가 개최국 한국과 한 조에 속한 걸 걱정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은 최근 잉글랜드를 농락(?)했다. 지난해 6월 두 차례 평가전에서 한국은 잉글랜드를 각각 2-0, 3-0으로 손쉽게 꺾었다. 잉글랜드가 최정예가 아니었다고 핑계 댈 것도 없다. ‘신성’ 톰 데이비스(에버턴)를 비롯해 루카스 은메차(맨체스터시티), 마커스 에드워즈(토트넘) 등 잉글랜드 축구를 이끌 유망주들이 대거 출전했었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한국에 2연패를 당한 잉글랜드는 지난해 11월 최정예 멤버를 꾸려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뜨는 별’ 아데몰라 루크만을 포함해 도니믹 칼버트 르윈(이상 에버턴), 오비에 에자리아(리버풀), 조슈아 오노마(토트넘), 에인슬리 메이틀란드나일스(아스널), 해리슨 채프먼(미들즈브러) 등 전력을 모두 동원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뛸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이번 대회에 턱걸이로 합류하게 됐다. ⓒCONMEBOL 캡처

어차피 다 그 조가 그 조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도 한국을 잉글랜드를 2-1로 제압했다. 잉글랜드는 가용할 수 있는 선수들 대부분을 가용하고도 지난해 한국에만 3전 전패 1득점 7실점이라는 최악의 성적에 머물렀다. 아마도 청소년 축구에서는 ‘공한증’이라는 단어를 중국이 아니라 잉글랜드에 써야할 것 같다. 도전자는 한국이 아니라 오히려 잉글랜드 쪽이다. 아르헨티나와 기니 등도 이름값에 비해 해볼 만한 상대인 건 분명하다. 절대 쫄고 들어갈 이유가 없다. 성인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기니를 만난다면 죽음의 조라는 표현이 적합할 수도 있지만 청소년 월드컵에서 이 정도는 충분히 해볼 만한 상대다. 바누아투나 베트남 등을 빼면 어차피 청소년 월드컵에 나선 팀들의 실력은 다 거기서 거기다. 개최국 자존심이 있지 벌써부터 죽음의 조라고 벌벌 떨지 말자.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된다. 우리 조에 대륙별 예선 1위 팀은 단 한 팀도 없다. 오히려 남미 챔피언 우루과이와 아시아 챔피언 일본이 속한 D조가 더 혼돈일 것이다. 이 조에는 유럽 준우승팀 이탈리아도 속해 있다. 대륙별 예선 챔피언은 물론 준우승팀 하나 없는 조에 속했으면서 죽음의 조라고 엄살 부리지 말자. 우리가 죽음의 조면 일본, 우루과이, 이탈리아, 남아공은이 속한 조는 섬뜩한 ‘연쇄살인의 조’쯤 되겠다. 어차피 남미와 유럽에서 한 팀씩은 우리와 같은 조에 묶여야 하는데 이들 중 이름값으로는 우리에게 밀릴 만한 팀은 없다. 독일이 걸려도, 포르투갈이 걸려도, 에콰도르가 걸려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걸려도 우리에겐 다 죽음의 조처럼 보인다. 하지만 청소년 월드컵에 나서는 팀을 성인 대표팀하고 같은 위치로 놓고 보면 절대 안 된다.

또한 이번 청소년 월드컵에는 스타들이 대거 불참할 가능성도 높다. 이전에 열렸던 대회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에 개막하기 때문이다. 성인 대표팀 차출처럼 구단이 의무적으로 선수를 내줄 의무가 없는 가운데 5월 20일에 대회가 시작되기 때문에 스타가 대거 나오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5월 21일이 최종전인데 차출 의무도 없는 대회에 톰 데이비스 등 소속팀에서 주전으로 뛸만한 선수들을 내줄 이유가 없다. 또한 이미 성인 무대에서도 실력을 입증했고 소속팀에서도 자리 잡은 선수들은 이 연령대 대표팀을 건너뛰는 경우도 많다. 반면 안방에서 대회를 치르는 한국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투입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다. 역대 대회 중 가장 이름 있는 선수들이 적게 출장하는 대회가 될 가능성이 큰데 이게 우리한테는 시차와 일정, 장소 등 모든 면에서 유리하다.

쫄지 말자 ‘죽음의 조’ 아니다

도대체 어느 구석을 따져 봐야 우리가 죽음에 조에 속했다는 건지 모르겠다. 방심을 해서도 안 되지만 지레 겁을 먹고 들어갈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 자꾸 우리는 그들의 이름값만 보고 벌써부터 죽음의 조라면서 덜덜 떤다. 참고로 2015년 U-17 월드컵에서 한국은 지금과 유사한 조에 속했었다. 잉글랜드와 기니, 그리고 브라질과 묶였기 때문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이름값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조와 크게 다를 게 없다. 그런데 이 조별예선에서 한국은 2승 1무로 1위를 차지했다. 이름값으로만 보면 한국이 꼴찌를 해야 정상인데 우리는 예상을 뒤집었다. 세르비아가 브라질을 이기고 말리가 독일을 꺾는 게 U-20 청소년 월드컵이다. 성인 대표팀에서 일어났으면 놀라운 일이겠지만 청소년 무대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결과다.

그런데도 자존감 없이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 기니를 만났다고 해 먼저 겁을 먹고 들어갈 필요는 없다. 겸손한 것과 자존감이 없는 건 다른 문제다. 조심하는 것과 숙이고 들어가는 것도 다른 문제다. 이 정도 조편성이면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은가. 이런 조에서도 떨어지면 그냥 어느 조에 속했어도 떨어질 실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쫄지 말자. 우리가 속한 조는 죽음의 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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