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명가? 발렌시아에서 축구는 삶이고 자존심이다


발렌시아 에스타디오 데 메스타야
발렌시아 에스타디오 데 메스타야 ⓒ 스포츠니어스

현재 스페인 발렌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배시온 기자는 스포츠니어스 독자 여러분들께 스페인 축구의 생생한 이야기를 직접 전달해드릴 예정입니다. 세계 3대 프로축구 리그로 손꼽히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그리고 축구 없이 못사는 스페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 드립니다 – 편집자 주

[스포츠니어스 | 발렌시아=배시온 기자] 라리가의 평균 관중은 약 27000명(15/16시즌 기준)이다. 세계적인 클럽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제외하고, 소위 중소 규모라 하는 클럽 역시 확실한 지역 연고 팬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축구와는 반대로 경제 상황은 힘들어 실업률이 높은 나라다. 여가를 즐기기에 여유롭지 않을 수 있지만 축구를 포기할 순 없다. 이들에겐 축구가 단순히 여가가 아닌 지친 현실을 위로하는 또 다른 일상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 번 시간 내서 경기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처럼 경기 시간에 축구장을 찾고, 텔레비전 앞으로 향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지역 내 어디서든 연고 구단의 엠블럼이 붙어있고 여러 MD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것으로 축구가 삶에 자연스레 녹아들었음을 알 수 있다.

경기장을 찾는 성별이나 연령대가 한정되어 있지도 않다. 남녀노소 누구나, 혼자 또는 친구와, 심지어 목발을 짚거나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맡긴 채 발걸음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축구팬까지 합쳐 언제나 구름 관중을 이루고, 경기장 바깥으론 과자부터 맥주, 머플러를 파는 노점상이 길게 늘어져 있어 언제나 북적이는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경기장에서 무엇을 할까? 단순히 경기만 보고 집에 가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축구가 이들에게 삶이라고 해도,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또 다른 일상이고 탈출구다. 이들은 경기장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희노애락을 표출한다. 승리의 기쁨, 부당한 대우나 상대에 대한 분노, 패배의 슬픔 등을 마음껏 드러내며 자신을 위로한다.

각국의 축구팬들 역시 축구가 일상인 이들의 삶을 동경하고, 수준 높은 경기를 직접 보기 위해 스페인을 찾는다. 축구팬이라면 한 번쯤 가고 싶은 그곳. 스페인에 사는 사람들은 경기장에서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스페인 발렌시아 에스타디오 데 메스타야 경기장을 찾아 샅샅이 살펴봤다.

메스타야 앞 관중들
메스타야 앞 관중들 ⓒ 스포츠니어스

발렌시아는 인구 약 81만명으로 스페인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프로팀으로는 프리메라리가 발렌시아CF와 비야 레알, 15-16시즌 세군다디비시온으로 강등된 레반테UD 총 3개 구단이 있다. 이 중 발렌시아CF는 세 팀 중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경기력이 주춤해 클럽 규모나 명성도 과거의 얘기가 되고 있지만 팬들에겐 여전히 자부심이다. 팬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팀에 대한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상대에게도, 선수에게도, 구단 보드진에게도 꿋꿋하게 자존심을 지켰다. 그렇기에 5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홈구장 에스타디오 데 메스타야는 매 경기마다 약 40000명 관중의 환호로 가득 찬다.

2월 22일 발렌시아 에스타디오 데 메스타야. 레알 마드리드와의 2016-17시즌 프리메라리가 16라운드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상대가 리그 1위인 레알 마드리드인 만큼 발렌시아의 승리를 점치는 여론은 많지 않았다. 여기에 평일 오후 원정임에도 불구하고 힘을 실으러 온 레알 마드리드 팬들도 많았다. 하지만 메스타야는 유독 레알 마드리드에게 강했고, 발렌시아 팬들 역시 개의치 않고 그들의 자존심인 발렌시아CF를 목청껏 외쳤다.

전투의 시작, 메스타야임을 상기시키다
킥오프 두 시간 전인 오후 4시 40분. 평일 오후, 시에스타(siesta: 지중해 연안 국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이른 오후에 자는 낮잠)가 막 끝난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장 앞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그 앞엔 말을 탄 경찰들이 있었다. 경찰들은 딱딱한 표정으로 메스타야를 찾은 팬들을 바라봤고, 팬들은 흥분을 감추지 않은 채 시끌벅적하게 메스타야 앞을 꽉 채웠다. 이들이 대비된 표정으로 메스타야 앞을 지킨 이유는 곧 선수단 버스가 도착하기 때문이다. 도착 시간이 다가오자 경찰과 팬들은 각각 다른 이유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원정팀인 레알 마드리드 버스가 들어오자 발렌시아 팬들은 야유를 보내고, 레알 마드리드 팬들은 환호했다. 경찰의 통솔 하에 팬들은 선수단이 들어서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몇 분간의 북적임이 끝나고, 곧 이어 발렌시아 선수단이 들어섰다. 레알 마드리드에 야유를 보내던 팬들은 환호와 박수, 응원가를 떼창 하며 발렌시아 선수단을 맞이했다. 한 쪽에선 금관악기를 부는 학생들이 있어 선수 입장에 웅장함을 더했다. 발렌시아 팬들은 힘을 잔뜩 실어줄 수 있는 홈경기의 이점을 가득 살리며 이곳이 메스타야임을 상기시켰다. 킥오프 두 시간 전부터 이들에게 축구는 축제고 전쟁이었다.

발렌시아 시위 서포터즈
경기장 앞에서 시위하는 팬들 ⓒ 스포츠니어스

우리는 클럽을 위해 싸운다

선수단 입장을 마친 킥오프 한 시간 전. 한 곳에 모여 있던 팬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각자 방식대로 남은 시간을 즐겼다. 그런데 일정 사람들이 같은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곳엔 발렌시아 서포터즈들이 동그랗게 모여 있었고 사뭇 진지했다. 이들이 치르는 전쟁 상대는 원정팀뿐이 아니라 구단 수뇌부도 있었다. 구단주인 피터 림(Peter Lim)을 비롯한 수뇌부는 선수 영입과 재정 문제로 감독과 팬들에게 여러 차례 결정을 번복했고, 이에 대한 공식적인 피드백엔 제대로 된 사과가 담기지 않았다. 성적부진과 잦은 감독 교체의 사태에 이르자 팬들은 이 책임을 수뇌부에게 물으며 퇴진을 요구했다. 5개월가량 ‘LIM, PARA TI UN NEGOCIO PARA NOSOTROS UN SENTIMIENTO(림, 너에겐 사업이지만 우리에겐 감정)’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이어갔다. 구단을 사업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구단주보다 발렌시아CF와 일상을 살아가며 감정을 쏟는 우리가 클럽을 지키겠다는 뜻을 내비췄다. 삶의 일부인 구단 역사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들은 내, 외부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축구장에선 모두 친구가 된다
킥오프 30분 전. 무거운 분위기와 반대로 온전히 축구를 즐기기 위한 이들 역시 구름 관중을 이뤘다. 이들에겐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이 친구였다. 맥주 한 잔을 들고 옆에 있던 이와 자연스레 축구 얘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국적, 나이에 상관없이 살갑게 말을 거는 것은 스페인 사람들의 친절함과 관심도 한 몫 할 것이다. 여기에 ‘축구’가 더해지니 친구가 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원래 친구와 경기장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 이들에겐 축구장이 만남의 장소이고, 굳이 친구를 설득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약속 장소가 되어버리는 곳이었다.

발렌시아 어디든 에스타디오 데 메스타야였다

킥오프 5분 전, 경기장 밖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북적이고 입장을 기다리는 줄 역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여유로운 스페인 사람들도 이때만큼은 다급해 보였지만, 하나같이 들뜬 표정이었다.

메스타야에 발을 들이지 않더라도 주변 펍과 카페에서 경기를 즐기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관중석 의자 대신 카페 테이블과 바 의자가 있을 뿐, 분위기는 경기장과 같았다. 오히려 좁은 공간에 인산인해를 이뤄서 경기에 더 열광할 수 있었다. 전반 10분도 채 안되어 발렌시아가 두 골을 몰아넣자 펍은 환호로 가득했다. 이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추격골이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일어났다. 축구만을 위한 펍이 아닌 평범한 펍에서 축구를 틀어 놓고, 맥주를 파는 것뿐인데도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축구에만 집중했다. 다른 일을 하거나 관심 없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펍의 통유리를 통해 경기 중계를 확인한 이들이 일부러 들어오기도 했다. 이렇게 또 하나의 경기장에서 축구를 즐긴 발렌시아 사람들은 2-1 승리로 경기가 끝나자 다 같이 박수치며 기쁨을 나눴다.

이날의 경기는 역사가 됐다
경기 후 메스타야를 떠나는 사람들, 인근 펍을 떠나는 이들 모두 열기가 식지 않았다. 발렌시아는 2연승으로 반등을 노릴 수 있게 됐다. 특히 전반 10분 만에 두 골을 몰아넣은 것에 자신감도 얻었다. 레알 마드리드와 최근 10경기 전적이 1승5무4패로 초라했기 때문에 승리를 더욱 갈망했고, 내부적 시위도 이어가고 있는 발렌시아 팬들에게 더 값진 승리였다. 그렇기에 발렌시아 사람들은 이날의 경기를 ‘Historia(역사)’라고 말한다. 각종 SNS는 물론 현지 뉴스에서도 이날의 역사를 전하기 바빴다. 발렌시아 사람들은 자부심을 드러내며 승리의 기쁨을 숨기지 않았고 경기 후 며칠이 지나도 화두가 됐다. 스페인 발렌시아. 이들은 축구와 함께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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