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수원월드컵경기장=명재영 기자]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맞붙을 팀이 ‘슈퍼클럽’ 광저우헝다였다. 안방에서 치르는 경기였지만 객관적인 전력 차이가 상당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우려는 곧 기우로 바뀌었다. 수원은 자신들만의 색깔로 빅버드를 뜨겁게 만들었다.

1일 오후 7시 수원월드컵경기장(빅버드)에서 펼쳐진 2017 AFC 챔피언스리그(ACL) G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수원삼성은 광저우헝다를 불러들여 2-2 무승부를 거뒀다. 90분 내내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난타전 속에서 어느 팀도 웃지 못한 채 경기는 마무리되었다. 수원 염기훈의 환상적인 크로스와 광저우 히카르두 굴라트의 마법 같은 중거리 골 등 이날 경기장을 찾은 팬들은 수준 높은 축구를 눈앞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이날 수원은 지난해 11월 27일에 열린 2016 KEB하나은행 FA컵 결승 1차전 이후 95일 만에 홈경기를 가졌다. 3개월 동안 수원에는 내외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수원은 혹독했던 지난 시즌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겨울 이적 시장에 나섰다. 호주 수비수 매튜, 국가대표 출신 미드필더 김민우, 화제를 모았던 크로아티아 미드필더 다미르 등 서정원 감독 부임 이후 가장 알뜰한 보강에 성공했다. 외적인 변화는 경기장에 들어서자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FIFA U-20 월드컵 2017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빅버드는 개장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변신에 나섰다.

빗방울이 추적추적 떨어지던 오후 5시, 입장 게이트를 지나 그라운드에 가까워졌을 때 두 가지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이 부셨다. 기존의 메탈 조명을 LED 조명으로 바꾼 영향이었다. 그라운드를 비추는 빛이 확연히 밝아졌다. 조명을 둘러보고 난 후에 전광판을 보자 ‘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쏟아졌다. 마치 수원의 유니폼에 새겨져 있는 스폰서 로고가 떠오를 만큼 전광판의 화질이 엄청나게 좋아졌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원정 석 상단에 있는 전광판에서만 영상 송출이 가능했지만 이번 시설 개선 공사로 2개의 전광판이 모두 최상급의 영상으로 팬들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출전 선수 명단 외에는 다른 정보를 전광판에서 볼 수 없었던 빅버드 원정 팬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수원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경기 전날 원정 석에서만 2천 장의 티켓이 팔려나갔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단한 인파였다. 입장 게이트 앞은 흡사 명동을 떠올리게끔 했다. 끝이 안 보이는 대기 줄과 계속해서 몰려드는 광저우 팬들의 모습은 인해전술(人海戰術)이었다. 모두가 비를 피해 지붕 밑으로 자리를 잡을 때 비를 맞으면서도 경기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이야기를 듣기 위해 “Can you speak Korean?”을 열심히 외쳤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식은땀이 나던 순간 한 줌의 빛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저 가능합니다!”

쑨종쉰 씨(왼쪽에서 세 번째)를 비롯한 광저우 팬들은 축제를 즐기러 온 분위기였다.

인천대학교로 유학을 왔다는 쑨종쉰(21) 씨는 “인터뷰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시켜주세요”라며 적극적인 구애(?)를 보냈다.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인터뷰를 곧바로 시작했다. 쑨종쉰 씨는 “지난 2013년 AFC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광저우를 응원하기 시작했다”며 “오늘도 광저우가 수원을 4-0으로 크게 이길 것”이라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시아 무대에서 중국 클럽의 선전에 대해 “국가적인 투자의 결실”이라고 짧지만 강렬하게 표현했다.

수원 팬들의 의견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경기장 한 바퀴를 돌아 수원 서포터 ‘프렌테 트리콜로’의 안방인 N석에 도착했다. 많은 팬이 비를 피해 좌석 뒤쪽에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며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다. 옷을 맞춰 입고 한 책상 앞에서 서 있는 무리였다. 책상에는 ‘청춘 가입 부스’라는 종이가 붙어져 있었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다들 멋쩍게 웃으면서 서로에게 인터뷰를 미루더니 시선이 한 사람에게 몰렸다. 최경준(27) 씨였다. 최경준 씨는 “아버지를 따라 수원의 창단 시즌인 1996년부터 응원을 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최 씨는 자신들의 정반대 편을 바라보며 “해외 원정인데 저 정도의 인원을 꾸릴 수 있다는 것이 솔직히 부럽다”며 “우리 K리그 팬들도 더욱 규모가 커져서 이국땅에서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원의 작년 성적과 올 시즌의 기대 성적에 관해 묻자 최 씨는 “모든 수원 구성원들이 작년에 아주 힘들었다”며 “올해는 서정원 감독 부임 이후 가장 많은 전력 보강이 이루어진 만큼 최소한 작년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전했다. 앞서 만난 광저우 팬이 4-0 스코어를 예상했다고 전하자 그는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광저우는 분명 강한 팀이지만 이곳은 중국 팀에게 진 기억이 없는 우리 안방입니다. 난타전 속에 수원의 3-2 승리를 예상합니다”

쑨종쉰 씨(왼쪽에서 세 번째)를 비롯한 광저우 팬들은 축제를 즐기러 온 분위기였다.

팬들과의 이야기를 위해 경기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보니 금세 킥오프 시간인 오후 7시가 다가왔다. 취재석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경기에 앞서 양측 서포터의 응원전이 시작됐다. 비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쏟아지고 있었지만, 우비를 입고 팬들은 자리를 지키며 우렁찬 구호로 자신들의 팀을 응원했다. 경기는 광저우가 우세할 것이라는 예측과는 다르게 팽팽하게 흘러갔다. 인상이 깊었던 쪽은 수원이었다. 지난 1차전과 다르게 빗속에서도 짧은 패스 플레이가 이어지며 광저우를 압박했다. 두드리면 열리는 것처럼 압박이 계속되자 수원이 선취점을 뽑아냈다. ‘왼발의 지배자’ 염기훈의 코너킥을 165cm의 단신 공격수 산토스가 멋진 헤더로 광저우의 골문을 흔들었다.

수원의 선제골로 빅버드의 분위기가 달아오를 무렵 굴라트가 환상적인 슈팅으로 동점 골을 만들어냈다. 광저우 응원석을 제외한 모든 관중석이 할 말을 잃었다. 취재석 옆자리에서는 “저게 들어가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기력은 두 팀의 명성답게 훌륭했다. 탄탄한 내실을 다진 수원과 막강한 외국인 공격진을 갖춘 광저우의 불꽃 튀는 경쟁이 이어졌다. 수원 팬들의 압도적인 응원에 짜증이 났던 탓일까.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 광저우의 골키퍼 정청이 그라운드에 공이 2개가 떨어지자 한 개의 공을 뒤로 돌려보냈다. 문제는 그 공을 수원 서포터 쪽으로 슈팅을 하듯이 찼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고 정청 골키퍼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홈 팬들의 미움을 독차지했다.

굴라트의 득점 이후 양 팀은 조나탄과 알란 카르발류가 한 골씩을 추가하며 2-2로 아쉽게 경기를 마무리했다. 수준 높은 경기를 펼친 만큼 양 팀 선수들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작년과 같이 막판 실점으로 승리를 눈앞에서 놓친 수원 팬들은 아쉬움에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했고 광저우 팬들은 경기력에서 생각보다 많이 밀린 모습에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선수들이 인사를 위해 다가오자 큰 박수를 보냈다. 그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쑨종쉰 씨(왼쪽에서 세 번째)를 비롯한 광저우 팬들은 축제를 즐기러 온 분위기였다.

이날 빅버드에 모인 관중은 9,228명이었다. 수치로는 적어 보일 수 있지만, 비 내리는 추운 날씨에 평일 저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선방한 결과였다. 경기는 TV 생중계로도 전파를 탔지만 9천여 명의 관중들은 TV로는 온전히 느낄 수 없는 두 팀의 기 싸움과 수준 높은 경기력을 눈앞에서 마주한 뒤 기분 좋게 집으로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본 기자 또한 귀가를 위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잠시 후 한 승합차가 다가왔다. 광저우 팬의 차량이었다. “쓰울이요~ 쓰울 갑니다(서울 갑니다)” 추운 날씨에 버스가 너무 오지 않아 순간 망설였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던 탓일까. 고심 끝에 차량을 그냥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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