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이진호를 직접 만나 은퇴에 관한 심정을 들어봤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2012년 울산현대를 떠났으니 벌써 5년이 흘렀다. 이후 여러 팀을 거치며 새로운 유니폼도 입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울산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늘 열정적인 플레이와 쇼맨십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 ‘울산의 아들’이 지난 시즌을 끝으로 조용히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우리는 그에게 그동안 고생했다는 박수를 보낼 틈도 없었다. 영원한 ‘울산의 아들’ 이진호를 만나 팬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를 들어봤다.

반갑다.

나도 반갑다.

살이 많이 찐 것 같다.

무슨 소린가. 많이 찌지 않았다. 원래 얼굴이 큰 편이다.

아무리 봐도 쪘다.

아니다. 안 쪘다.

알겠다. 독자들이 판단해줄 것이다. 요새 어떻게 지내나.

내셔널리그 천안시청에서 뛰다가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리고 이제 회사에 들어온 지 갓 2개월 차 된 신입 직장인이다. ‘KY스포츠’라는 에이전트사에 들어와 새롭게 일을 시작했다. 이제 일을 막 배워나가는 단계다.

이제 만 32세로 아직 은퇴를 하기에는 이른 나이다. 왜 이렇게 갑자기 선수 생활을 그만두게 됐나.

2~3년 전부터 미래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28살 전까지는 집의 빚을 갚느라 돈을 모으지 못했고 그 이후부터 돈을 조금씩 모아 지금은 작은 상가에서 임대업을 하고 있다. 축구를 그만두면 아예 그런 투자 쪽으로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내 에이전트로 오래 일하는 친구로부터 “에이전트를 한 번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내 성격이면 잘 할 수 있겠다고 하더라. 사실 일부 선수들에게는 에이전트가 동행자가 아니라 밑에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 자기보다 밑으로 생각하고 막 대하고 막말을 하는 이들도 종종 있다. 그런데 이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다. 당장 내 직장을 알아봐 주고 내 가치를 올려주는 사람인데 일부 선수들은 에이전트에게 그에 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안 그런 선수들도 많지만 몇몇은 에이전트를 존중하지 않더라. 에이전트에 대한 그런 인식을 바꿔보고 싶었다. 그래서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은퇴를 하면 대부분은 지도자를 생각하는데 의외의 선택이다.

선수 생활을 할 때부터 은퇴하면 지도자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경험한 좋은 지도자 분들이 많았는데 지도자는 어쩔 수 없이 선수들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경쟁도 시켜야 하고 싫은 소리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그게 숙명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더라. 내 성격상 지도자가 되면 선수들을 많이 다그칠 것 같더라. 선수로서의 꿈은 컸지만 지도자로서의 꿈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진호는 울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프로 데뷔까지 했다. ⓒ울산현대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천천히 해보자. ‘울산의 아들’이라는 별명은 당신과 뗄 수 없다.

‘울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울산에서 초,중,고를 다 나왔다. 1998년 (김)병지 형이 헤딩골을 넣었던 그 순간에는 그 경기장에 있었다. 당시 아버지를 졸라 함께 경기장에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바쁜 일이 있으셔서 나에게 돈만 주고 “혼자 다녀오라”고 하셨었다. 근데 경기장 앞에서 배고파서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군것질을 한 뒤 나 혼자 전반이 끝날 때쯤 몰래 담을 넘어서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그때 병지 형의 골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고 떠올릴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그 경기를 본 뒤 감격해 나도 울산에서 꼭 뛰고 싶어 축구부에 들어갔고 학창시절부터 프로까지 줄곧 울산에서 선수 생활을 하게 됐다. 나에게 ‘울산의 아들’이라는 별명은 영광과도 같은 것이다.

울산의 프렌차이즈 스타였는데 결국에는 원클럽맨이 되지 못했다. 아쉬울 것 같다.

나도 (김)영삼이 형처럼 울산의 원클럽맨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2012년 대구FC로 이적할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 그것밖에 없었다. 냉정히 말하면 김신욱이라는 큰 선수가 있었고 내가 경쟁에서 밀려서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그건 쿨하게 인정한다. 다시 내 둥지를 찾아 존재를 알려야 했다. 지지해 준 팬들에게 미안했지만 당시에는 자세한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었고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냥 내가 경쟁에서 밀렸다는 걸 쿨하게 인정하고 나온 거다.

당신의 대구 이적은 울산 구단의 의사였나.

아니다. 내 의사였다. 사실 울산에 남아 있어도 되는 상황이기는 했는데 내가 더 이상 팀에 남아 있어도 팀에 기여를 하거나 선수로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에이전트한테 “새 팀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이 상황에서 팀에 남아 있는 건 팀에도 미안한 일이었고 나 자신에게도 옳지 못한 일이었다. 당시 (이)근호가 일본에서 뛰다가 국내 복귀를 타진했는데 국내로 돌아오려면 대구로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구에서 (이)근호의 높은 연봉을 맞춰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와 이적료를 묶어 대구에 내주고 울산이 (이)근호를 받는 트레이드가 이뤄진 것이다.

울산에 대한 감정은 어떤가. 프렌차이즈 스타와의 이별은 늘 찜찜함을 남긴다.

좋지 않은 감정은 전혀 없다. 지금도 프런트와 자주 연락하고 잘 지내고 있다. 내가 추진해서 팀을 옮긴 거라 구단하고 감정의 골이 깊어질 이유가 없다.

울산에서 뛰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

역시 2005년에 K리그에서 우승했을 때다. 1996년 이후 무려 9년 만에 우승이었다. 그때 내가 플레이오프 성남일화와의 경기에서 후반 막판 결승골을 넣어서 챔피언결정전에 올랐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할 얘기가 참 많다.

당시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군 입대를 했다가 다시 급하게 울산으로 복귀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원래 그해 9월까지는 경기에 거의 나가지 못했고 시즌이 끝나면 군대에 가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그런데 상무 입대가 확정되고 나서부터 경기에 나서게 됐고 7경기에서 5골을 넣었다. 더 욕심이 생겨 군대를 미루려고 했는데 이미 울산과 상무 간의 이야기가 끝난 상황에서 그럴 수가 없었다. 플레이오프에서 결승골을 넣고 어쩔 수 없이 바로 그 다음 날 군대에 가야했는데 챔피언결정전에 너무 나가고 싶었다. 울산을 우승으로 이끌고 싶었고 그 현장에 꼭 있었으면 했다. 사실 그때 나는 실제로 피로골절 때문에 발에 금이 가 있는 상황이었다. 훈련소에 들어가서 상황을 설명한 뒤 “다 치료 받고 다시 입대하겠다”고 했고 다시 울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편법은 절대 아니고 합법적인 퇴소였다. 그리고 울산의 K리그 우승을 경험한 뒤 딱 두 달 뒤에 다시 군대에 갔다. 당시 우승했을 때의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진호는 울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프로 데뷔까지 했다. ⓒ울산현대

반대로 가장 아쉬웠던 때는 언제였나.

당연히 울산을 떠날 때다. 울산과 너무 정이 들어 있었다. 팬이 아니라 나에게는 그 분들이 친구였고 형, 동생이었다. 울산에서 포항으로 임대를 떠났을 때는 울산이 내가 돌아갈 팀이니 심리적으로 크게 흔들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대구로 이적하고 네 번째 경기가 대구 홈에서 울산과의 경기였는데 그때는 만감이 교차하더라. 내가 본 원정 경기 중에 울산 팬들이 그렇게 많이 오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반대쪽 골대 뒤가 다 울산 팬들로 찼다. 그 경기에서 대구가 1-0으로 이겼는데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눈물이 막 쏟아졌다. 엎드려서 펑펑 울었다. 울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떠나게 됐는데 되게 서럽더라. 태어나서 가장 많이 울어본 것 같다. 내가 울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고생했던 걸 잘 아는 (곽)태휘 형, (고)슬기, (김)신욱이, (김)영광이 형이 다 와서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주더라.

정말 만감이 교차하는 경기였을 것 같다.

경기가 끝난 뒤 울산 팬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데 계속 눈물이 나서 미치겠더라. 너무 눈물이 나서 팬들을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큰절을 올리고 유니폼과 축구화를 팬들에게 선물해 준 뒤 돌아가는데 내가 라커룸에 들어갈 때까지 팬들이 내 이름을 불러주셨다. 그때가 가장 슬펐다.

‘울산의 아들’이었던 당신은 이후 저니맨(?)이 됐다. 세상 일은 참 모르는 것 같다.

대구가 강등된 뒤 원래는 사우디로 이적하는 상황이었다. 연봉도 괜찮았고 몸도 좋을 때였다. 대구가 태국으로 전지훈련을 갔는데 나는 전지훈련에도 참가하지 않고 사우디 이적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계약까지 마무리하고 비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정식 계약이 계속 미뤄지는 거다. 나중에는 연락이 없어서 알아보니 유럽 어디 대표 선수가 내 자리를 대신해 그 사우디 팀하고 계약했더라. 임대인데도 연봉이 30억 원이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짐작이 가나. 내 연봉의 4배는 족히 되는 선수였다. 그래서 다른 팀을 알아보고 있는데 태국 쪽에서 제안이 왔지만 거기는 이적하려면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고 마침 K리그 클래식으로 승격한 광주FC로 가게 됐다. 광주에서 뛰다 태국을 잠시 들렀다가 내셔널리그 천안시청으로 가게 됐다.

당신이 K리그가 아닌 내셔널리그 천안시청으로 이적하게 된 것도 나에게는 의아한 일이었다. K리그에서 더 도전할 능력이 충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은퇴를 하려고 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있고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비록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딱 그 시기에 K리그 팀들이 긴축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29세가 넘는 선수들은 노장 취급을 받았다. 23세 이하 선수의 의무 출전 조항도 생기면서 설 자리가 없어지더라. 나를 찾는 곳도 많지 않았고 연봉을 맞추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런데 그때 천안시청 당성증 감독님이 나에게 전화를 주셨다. 대구에서 나와 (이)근호의 트레이드를 성사시킨 분이고 나를 한 번 살려주신 분이다. 이후 천안시청 감독으로 가셨는데 내가 이거는 무조건 감독님께 은혜를 갚아야 했다. 그래서 천안시청으로 가게 된 거다. 거기에서 딱 1년만 하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구단의 요청으로 1년을 더 뛰었다.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하게 됐는데 다시 무를 생각은 없나.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은 없다. 다만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은퇴하게 된 점에 대해서는 아쉽게 생각한다. 내가 몸 담았던 팀과 그곳의 팬들에게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라는 이야기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된 건 너무나도 아쉽다.

이진호는 울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프로 데뷔까지 했다. ⓒ울산현대

선수 생활을 하면서 “난 이렇게도 열심히 해봤다”라고 자부할 수 있는 부분이 있나.

프로 선수들은 다 열심히 했으니 그 자리에 오른 거다. 나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나는 열심히 하면서도 나름대로 꼼수를 좀 썼다. 이제는 은퇴했으니 다 말할 수 있다.

어떤 꼼수였나.

어떤 감독님이 계실 때였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모 감독님이 계실 때였다. 감독님이 새벽마다 숙소에서 차를 타고 어딜 가시는 거다. 나가는 시간과 들어오는 시간을 파악했다가 일부러 얼굴에 물을 묻히고 도로 바로 옆에서 줄넘기하는 척을 했다. 새벽에 날이 어두우니 감독님이 나가시다가 자동차 창문을 내리고 “거기에서 운동하는 거 누구니?” 물어보시면 “네. 진호입니다”라고 열심히 개인 운동하는 척을 했다. 그러면 감독님께서 “열심히 하는구나”라고 흡족해 하시더라. 내 나름대로의 어필이었다. 나중에는 나도 잔머리가 늘어 분무기로 얼굴에 물을 뿌리고 운동복에도 물을 뿌리고 더 열심히 하는 척했다.

효과가 좀 있었나.

효과가 없어도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 일부러 공을 들고 훈련장에 나가 훈련장에서 숙소 쪽으로 공을 뻥뻥 차기도 했다. 누가 들으라고 “와, 나 진짜 힘이 남아 돈다”고 큰 소리로 혼잣말을 하면서 연기도 좀 했다. 코치님 방 바로 밑으로 공을 차고 코치님이 깜짝 놀라 창문을 열면 “죄송합니다”라고 어필도 해봤다. 나만의 살아남는 꼼수였다. 국내 선수들하고 경쟁하면 얼마든지 해볼만한데 외국인 선수하고 경쟁하는 건 너무나도 버거워서 뭐라도 해보고 싶었던 거다. 외국인 선수는 많은 돈을 써서 데려오는데 그러니 경기에 내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그 선수들을 밀어내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고 결국 어떻게 얘네들하고 같은 팀에서 교체로라도 뛸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다. 결론은 그 친구들이 잘하는 걸 따라하려면 이길 수도 없을뿐더러 내가 늦는다는 걸 알았고 그 친구들이 못하거나 안 하는 걸 내가 해야 경쟁력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 친구들이 못하거나 안 하는 게 뭐였나. 줄넘기 연기를 한다거나 코치님 방으로 공을 차는 것이었나.

도도와 마차도 같은 선수들은 울산의 역대급 외국인 선수였다. 그 친구들하고 득점이나 슈팅을 비교할 수는 없다. 그 선수들은 대체적으로 수비 가담이나 팀 플레이, 헤딩, 공이 끊겼을 때 끝까지 상대를 압박하는 플레이 등을 지적받았는데 걔네가 못하는 그런 걸 내가 해야 경쟁력이 생긴다. 내가 그런 플레이를 해야 감독님이 나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했다. 그렇게 나만의 장점을 만들어 역대급 외국인 선수인 도도나 마차도와 경쟁했다.

도도는 울산의 역대급 선수가 아니라 K리그 전체를 통틀어서도 역대급 선수였다. 그런 엄청난 선수들과 경쟁했다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다.

도도는 ‘넘사벽’이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 가장 잘하는 축구선수 1위는 도도다. 나는 지금도 심심하거나 시간이 남으면 도도의 플레이 영상을 본다. 원래 울산으로 오기 전에 바르셀로나에 가려고 하다가 나이가 많아서 바르셀로나에 가지 못했다고 하더라. 기가 막힌 선수였다. 한 번은 김정남 감독님이 전반이 끝난 뒤 라커룸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도도한테 패스 다 줘. 얘한테 공 주면 얘는 알아서 동서남북으로 패스가 다 나가. 그러니까 얘한테 줘.” 그 정도로 도도는 밀어주면 알아서 다 하는 엄청난 선수였다.

지금 생각해도 도도와 마그노 같은 선수들은 브라질의 경기 침체와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 등 절묘한 상황이 맞물리면서 K리그 무대에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엄청난 재능을 가진 외국인 선수들이 다시 K리그에 오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

도도하고 마그노가 득점왕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할 때였는데 경기가 끝나면 도도가 항상 “오늘 마그노는 몇 골 넣었느냐”부터 물어볼 정도였다. 제주에 있을 때 페드로도 경기가 끝나면 선수단 버스에 탄 뒤 나한테 “오늘 ‘빅맨’ 골 넣었느냐”고 물어보더라. 그 ‘빅맨’이 바로 (김)신욱이였다. 그래서 인터넷 찾아보고 “못 넣었다”고 하면 좋아하더라. 내가 브라질 유학을 다녀와 포르투갈어를 하니 항상 자기 기사를 검색해 “이거 무슨 얘기냐”고도 자주 묻더라.

그렇다면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선수는 누구였나.

이거 얘기 잘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천수 형이 같은 팀에 있을 때는 가장 믿음직했다. 원래 크로스는 구질이 다 다른 법인데 (이)천수 형의 크로스가 가장 헤딩하기에 적합한 구질이었다. 워낙 축구 센스가 좋은 선수였다. 그리고 (현)영민이 형의 크로스도 ‘택배’ 수준이었다. (설)기현이 형은 인성부터 태도 등 배울 게 너무 많은 형이다. 경기력 면에서도 자기가 받지 못할 공은 내가 잘 받을 수 있도록 공간도 잘 열어주고 공 없을 때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좋다. 역시 큰 경험을 한 선수들은 달라도 뭐가 다르더라.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아쉬움은 뭐였나.

역시나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 것이다. 꿈에나 그려볼 법한 큰 무대를 축구선수로서는 한 번쯤 상상해 보지 않나.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내가 부족했던 것이고 나보다 능력 있고 잘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런 큰 무대에 서지 못했던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100점 만점으로 당신의 선수 생활에 대한 점수를 매겨보자.

88점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상대 수비수들한테 “내가 위협적이냐”고 물어보면 10명 중 8명은 위협적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조금 후하게 줬다. 다만 12점을 더 주지 못한 건 조금 더 노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수 시절 팬 서비스가 유난히 좋았던 선수로 기억에 남는다.

나는 선수들이 경기가 끝나고 들어가면서 관중에게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게 싫었다. 우리를 응원해준 이들에게 하이파이브도 해주고 악수도 해줄 수 있지 않은가. 솔직히 나도 골 넣고 텀블링 하면 힘들었다. 그래도 팬들이 좋아하니 계속 한 거다.

지금은 텀블링 못하지 않나.

무슨 소린가. 지금도 할 수 있다. 나 아직 날렵하다.

살이 그렇게 쪘는데 거짓말 하지 말라.

이거 살 찐 거 아니다. 좀 부은 거다.

부은 게 오래가면 그때는 살로 인정해야 한다.

아니다. 정말 부은 거다.

이진호는 울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프로 데뷔까지 했다. ⓒ울산현대

알겠다. 이제 에이전트로 직장 생활 2개월 차인데 할 만한가.

1월에 첫 월급을 받았다. 나는 선수 시절 때도 부모님께 번 돈을 다 드리고 용돈을 받아 생활했는데 직장인이 돼 받은 첫 월급은 의미가 남다르더라. 축구를 할 때는 나만 잘하면 됐다. 내 관리만 잘하고 동료들하고 좋게 지내면 크게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직장 생활은 옆 사람과 같이 가야 하더라. 공유도 많이 해야 하고 무언가를 같이 해야 할 일이 많다. 출근해서 밥 먹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아직은 어색하지만 새롭고 좋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건가.

에이전트는 팀을 알아봐 주고 연봉 협상을 하는 게 가장 큰 임무인데 우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으려고 한다. 선수의 훈련과 성장에 관해서는 지도자들이 도와주지만 그 외에 선수들의 ‘멘탈’을 잡아주는 것도 필요하다. 선수 출신인 내가 어린 선수들의 이런 부분까지도 도와주려 한다. 경기를 보러 다니면서 우리 회사 소속의 어린 선수들에게 조언도 해줄 수 있고 내가 해왔던 보강 운동이나 재활 프로그램도 전수해 줄 수 있다. 쉬는 시간에 텔레비전을 볼 때도 그냥 텔레비전만 보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운동이 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이 선수들과 식사를 하면서 대화도 하고 운동장에 나가 같이 운동도 할 예정이다. 선수의 세세한 부분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선수 출신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기대하고 있다. 다 성장한 성인 선수들이 아니라 이제 성장 단계에 있는 중,고등학생의 어린 선수들을 관리한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앞으로 어떤 에이전트가 되고 싶나.

지도자들은 한 팀의 경기 전체를 봐야 하지만 나는 경기장에 있는 수많은 선수 중에 딱 한 명만 계속 지켜볼 수 있다. 내가 선수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어린 선수들에게 전수해 성장에 도움이 되는 에이전트가 되고 싶다. 에이전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 내가 도움이 됐으면 한다.

당신의 축구 인생 후반전을 응원한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그 동안 당신을 사랑해준 팬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17살 때부터 프로에서 생활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경기는 학교에서 하고 운동은 계속 프로팀에서 해왔는데 이게 벌써 15년이 됐다. 그렇게 15년 동안 했던 프로 생활이 은퇴라는 한 순간의 선택으로 모두 끝나버리더라.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었다. 이 <스포츠니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동안 예뻐해 주고 응원해 주신 분들께 고마웠다는 말을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내 능력보다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좋게 봐주셔서 너무 감사드린다. 앞으로 어린 선수들이 더 큰 무대에 도전할 수 있도록 선수를 육성하면서 받은 사랑을 보답하고 싶다. ‘울산의 아들’이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포항과 대구, 제주, 광주, 천안에서 뛰면서 많은 사랑을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진호는 이제 축구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한다. 그라운드에서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고 팬들에게는 누구보다도 친근했던 그를 이제 다시 경기장에서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쉽다. 하지만 에너지 넘치는 그는 이제 또 다른 무대에서 열정적으로 도전한다. ‘울산의 아들’에서 에이전트로 변신한 이진호의 도전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이건 부운 게 아니라 살 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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