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티리그 출범식에서 포부를 밝히는 하오하이동 ⓒ 중국 시티리그

[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전설의 선수, 하오하이동을 기억하시나요?

비록 중국 선수지만 우리에게 하오하이동은 다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축구 게임을 했던 분들은 중국 팀에서 유일하게 불꽃 슛이 나가던 선수로 기억하고, 다른 축구팬들은 잉글랜드 챔피언십의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입단할 때 이적료 1파운드(약 1,800원)에 입단하며 화제를 뿌리기도 했으며 툭하면 "한국 축구는 강하지 않다"는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추억을 떠올릴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비교적 이상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중국에서 하오하이동은 전설 중의 전설입니다. 중국의 유일한 월드컵인 2002년 월드컵에 출전한 경험이 있고 A매치 115경기 출전에 41골을 기록했습니다. 중국 통산 A매치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죠. 클럽 커리어도 화려합니다. 다롄 스더에서 9시즌을 뛰는 동안 중국 슈퍼리그(CSL) 우승을 6번이나 이끌었고 2002-03 AFC 챔피언스리그(ACL)에서는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 중국에서는 CF를 찍을 정도로 잘 나갔던 하오하이동

하오하이동은 선수 커리어 동안 공한증(恐韓症)과 싸워 왔습니다. 그가 선수로 뛸 동안 중국은 한국에 한 번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승부욕이 강한 하오하이동은 한국전만 되면 열의를 불태웠습니다. 문제는 중국의 실력이 그의 열의만큼 따라와주지 못했다는 것이죠. 재밌는 것은 그는 공한증의 실력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2010년 2월 동아시안컵에서 중국이 한국을 3-0으로 꺾으며 공한증을 극복했을 때 그는 "당연한 결과"라며 "나는 예전부터 중국이 한국보다 강하다고 주장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라운드에서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공한증 역시 2010년에 깨지고 말았죠. 하지만 아직도 그는 중국 축구를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리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해외 연수를 통한 수업 후 코치, 감독으로 이어지는 지도자의 길을 걷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오하이동이 걷고 있는 길은 전혀 다릅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도자 할 줄 알았는데 행정가로 변신한 하오하이동

2007년 은퇴한 그는 이후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습니다. 2004년 다롄 스더에서는 선수 생활 도중 감독 대행직을 맡기도 했고 2005년 이적료 1파운드에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것도 선수 생활보다는 코치로의 경험을 쌓기 위해 간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곳에서 선수로서는 단 한 경기만 뛰었습니다. 그것도 FA컵 콜체스터전에 교체로 들어갔습니다. 부상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죠. 대신 코치로 활동하며 팀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후 행보는 달랐습니다. 셰필드 유나이티드를 떠나 중국으로 돌아온 하오하이동의 첫 행선지는 2부리그 클럽인 톈진 송지앙(現 톈진 취안젠)이었습니다. 하지만 코치나 감독으로의 취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톈진에 징리(經理)라는 직책으로 합류했습니다. 행정가로 구단에 합류한 것이죠.

이 '징리'라는 직책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한국과 중국의 사무국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죠. 한자 그대로 읽으면 경리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그 경리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한국에서 가장 비슷한 직책을 찾으라고 하면 사장이나 단장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과는 약간 다릅니다. 한국은 사장이나 단장이 대부분 한 명인 것에 비해 중국은 여러 명이 공동 직책을 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오하이동 역시 단장 직책을 맡은 한 명으로 팀에 합류했습니다.

톈진 송지앙에서 하오하이동은 꽤 안정적으로 구단을 운영했습니다. 그 결과 톈진은 2010년 3부리그 격인 중국 을리그에서 갑리그(2부리그)로 승격합니다. 이후 톈진 송지안은 취안젠에 인수되어 새로운 거물 구단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물론 이는 하오하이동이 구단을 떠난 이후의 얘기입니다. 톈진 송지앙의 자세한 속사정은 아래 칼럼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팩트리어트] CSL 최고 흥행 카드 예약? '톈진 더비'가 온다

행정가로서 실무 경험을 쌓은 하오하이동은 이후 갑리그 칭다오 하이니우로 자리를 옮겨 계속해서 행정가로 활약했습니다. 2개 구단의 징리 직을 맡으면서 하오하이동은 이제 경험을 갖춘 행정가의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구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됐고, 돈의 흐름이나 운영 면에서 어떤 점이 중요한 지 알게된 것입니다.

하오하이동의 또 다른 도전, '풀뿌리 축구'

2016년, 하오하이동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중국 축구협회와 손을 잡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중국 시티리그'입니다. CSL과 중국 프로축구를 주로 알던 우리에게는 생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중국 시티리그는 프로축구와 큰 관련이 없는 새로운 리그입니다. 바로 '사회인 축구'입니다. 우리나라의 조기축구와 비슷한 개념이죠.

중국 시티리그는 중국 내 최고의 아마추어 축구팀을 가르는 대회입니다. 각 성 별로 사회인 리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팀들에 출전 자격이 주어집니다. 대회 방식은 ACL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32개 팀이 8개 조로 나뉘어 조별예선을 거친 다음 토너먼트를 통해 우승팀을 가립니다. 토너먼트가 홈 앤 어웨이가 아닌 단판 승부라는 것이 ACL과의 차이점이죠.

중국 시티리그는 중계로 2억 명 이상이 시청하는 탄탄한 콘텐츠로 성장 중입니다 ⓒ 중국 시티리그

잘 알려지지도 않고, 아마추어 리그이기 때문에 단순한 중국의 아마추어 대회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중국 시티리그는 TV 중계로도 만날 수 있고 실제로 HD중계를 통해 무려 2억 3천만 명이 시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축구에 관심이 뜨거운 중국이다보니 이런 아마추어 리그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뒤에는 중국 시티리그의 운영을 총괄하는 하오하이동이 있습니다. 그의 능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사실 '공한증'으로 대표되는 중국 축구의 성장은 크게 두렵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CSL이 머니 파워를 자랑하고 국가적으로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키운다고 하지만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근거는 '풀뿌리 축구'에 있었습니다. 나무 기둥이 굵고 잎사귀가 화려한 나무가 현재의 중국 축구이지만 뿌리가 굉장히 약하다고 내다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오하이동이 프로축구의 단장직을 내던지고 사회인 리그로 간 것은 앞으로 중국 축구협회에서 무언가를 하겠다는 생각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풀뿌리 축구가 튼튼해야 중국 축구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가 그토록 외쳐왔던 '한국 타도'는 바로 풀뿌리 축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죠.

하오하이동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다면 중국은 유소년부터 아마추어, 세미 프로, 그리고 프로축구에 이르기까지 연령별 축구 시스템을 완성하게 됩니다. '축구굴기'를 외치면서도 정작 중국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마지막 퍼즐인 아마추어 축구를 하오하이동이 맞춰가는 셈입니다. 중국의 경제와 인구 규모를 생각했을 때 모든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그들의 축구 경쟁력은 생각보다 더 올라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타도'를 외쳤던 하오하이동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게 보입니다.

wisdragon@sport-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