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태국의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그것은 축구도 마찬가지였다.

태국 국왕이 서거했다. 지난 13일 오후 7시 태국 정부는 성명서를 통해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 국왕이 오후 3시 52분 시리라즈 병원에서 영면했다"고 발표했다. 70년 간 태국을 통치하며 세계 최장 재위 기록을 보유했고, 태국의 근현대사를 함께 해온 아버지 같은 존재가 태국 국민들에게 떠난 순간이었다.

태국 전역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모든 활동이 중단됐다. 이 여파는 축구에도 미쳤다. 태국 프로축구 1부리그인 타이 프리미어리그(TPL)은 3라운드가 남은 잔여 시즌을 중단하고 이대로 리그를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더불어 태국 축구협회 역시 태국 FA컵 4강전 이후 일정을 취소하고 추첨을 통해 우승팀을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조기 종료된 시즌, 핵심은 '집중 애도 기간'

TPL과 태국 축구협회의 결단이 있다면 리그와 FA컵을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비록 애도 기간 중 추모 열기로 인해 경기장이 텅텅 비더라도 경기는 강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태국 정부의 방침에 따르면 정상적으로 축구 경기를 개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태국 정부는 국왕의 서거로 인해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쁘라윳 찬-오차 태국 총리는 국영 TV 방송을 통해 "1년 간의 애도 기간을 가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1년 동안 태국의 분위기가 상당히 가라 앉아있을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다. 특히, 서거 후 30일 간은 집중 애도 기간이다. 30일 동안은 조기가 게양되고, 공무원들은 검은 상복을 입고 출근한다. 이 기간이 태국에서는 추모 열기가 가장 뜨거운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해외 각국도 이 시기에 태국으로 떠나는 관광객들에게 각별히 주의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TPL 홈페이지도 추모의 의미로 검게 변했다 ⓒ TPL 공식 홈페이지 캡쳐

집중 애도 기간에는 민간인들도 예외 없이 국왕 추모에 동참한다. 태국 정부는 축제나 엔터테인먼트 관련 행사를 열지 말라고 권장했다. 따라서 예정되어 있던 축제나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태국에서 뜨거운 관심을 모으는 K-POP 콘서트도 예외는 아니다. 11월 5일과 6일 열리는 JYP엔터테인먼트 주최 'JYP네이션' 방콕 콘서트가 취소됐고, 11월 12일 예정된 아이돌 그룹 몬스터 엑스의 팬미팅도 취소됐다.

TPL과 FA컵이 조기에 종료된 것은 이 30일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축구 역시 하나의 엔터테인먼트이기 때문이다. TPL의 남은 3라운드는 10월에 잡혀있고, FA컵 4강전과 결승전은 11월 2일과 5일에 열릴 예정이었다. 모두 30일 안에 스케줄이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경기를 한 달 연기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태국 축구계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웠을 것으로 보인다. 집중 애도 기간이 막 끝난 시기에 다시 축구 경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국민들의 정서와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한 달 간 실전 경기를 치르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 팀의 경기력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국가 대표팀의 월드컵 최종예선 홈 경기도 장소 변경을 요청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최선은 '조기 종료'였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결정이 각 구단들의 운명도 뒤흔들었다는 사실이다. 상위팀의 기쁨, 하위팀의 슬픔을 느낄 틈도 없이 갑자기 리그가 끝났다. 아직까지는 본격적인 논란이 일지 않고 있지만, 국왕 서거로 인한 '폭풍전야'일 뿐이다. 조만간 강등 당한 팀들의 형평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시작되면 TPL의 고심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리그 조기 종료로 희비 엇갈린 강등권

리그 우승컵 향방은 거의 확정된 상황이었다. 무앙통 유나이티드가 승점 80점으로 1위를 달렸고 2위 방콕 유나이티드가 승점 75점으로 뒤를 쫓고 있었다. 3위인 방콕 글래스는 승점 57점이었다. 리그 2위까지 주어지는 AFC 챔피언스리그(ACL) 티켓의 주인공은 일찌감치 확정됐다. 우승 역시 무앙통이 유력했다. 남은 3경기에서 무앙통이 1승 1무 이상 거두면 자력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방콕 유나이티드의 입장에서는 기적을 기대했지만 물거품이 됐다.

반면에 환호와 탄식이 제대로 엇갈리는 동네가 있다. 바로 하위권 팀들이다. TPL은 16위부터 18위 팀을 하부리그인 디비전 1로 강등 시킨다. 사실 시즌 막판 TPL의 최고 관심사는 강등권 싸움이었다. 약 8개 팀이 강등과 잔류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이었다. 하지만 리그가 도중에 끝나면서 이 경쟁도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아미 유나이티드, 차이낫, BBCU의 강등이 확정됐다.

TPL 홈페이지도 추모의 의미로 검게 변했다 ⓒ TPL 공식 홈페이지 캡쳐

BBCU를 제외한 나머지 두 팀은 억울할 수 밖에 없다. 남은 3경기 동안 충분히 잔류가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강등이 확정된 16, 17위 두 팀과 가까스로 잔류한 15위 사뭇 프라칸의 승점 차이는 고작 1점이다. 게다가 강등 당한 두 팀은 사뭇 프라칸보다 골득실에서 10골 이상 앞선다. 해 볼 만한 싸움이었다.

14위 해군 역시 사뭇 프라칸과 승점이 같기 때문에 두 팀의 입장에서는 남은 세 경기 결과에 따라 충분히 잔류할 수 있었다. 물론 강등 당한 두 팀의 남은 일정이 쉽지는 않았다. 아미 유나이티드는 리그 1, 2위 팀인 무앙통, 방콕 유나이티드와 맞붙어야 했고, 차이낫은 3위 방콕 글래스, 9위 벡테로와의 경기가 남았다. 하지만 두 팀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반전을 노릴 기회가 박탈당한 셈이니 아쉬울 수 밖에 없다.

2부리그 팀이 ACL에 나갈 수 있다?

리그만 조기 종료된 것이 아니다. 태국 최고의 축구팀을 가리는 태국 FA컵 역시 중단됐다. 문제는 FA컵 잔여 일정이다. 태국 축구협회는 FA컵 4강전 이후 일정을 치르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잔여 경기들은 추첨으로 승자를 가린다고 밝혔다. 태국 최고 실력의 축구팀이 아닌, 태국에서 제일 운 좋은 축구팀을 가려내는 셈이다.

현재 촌부리, 수코타이, 랏차부리, 차이낫이 4강전에 올라 있다. 태국 FA컵에서 가장 아찔한 결말은 아마 차이낫의 우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촌부리, 랏차부리, 수코타이는 TPL 5~7위에 몰려있는 팀들이다. 승점 차이도 6점 정도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고만고만'한 팀이다. 누가 우승해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문제는 하위권임에도 불구하고 4강까지 진출한 차이낫이다. 리그가 조기에 종료되면서 차이낫은 하부리그인 디비전 1로 강등이 확정됐다. 차이낫이 기가 막힌 동전 던지기로 우승을 차지할 경우 내년 태국 축구는 복잡해진다. 태국 역시 FA컵 우승팀에게 ACL 출전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ACL 진출의 문이 한국보다 좁은 태국에서 2부리그 팀이 ACL에 출전하는 진풍경을 볼 수도 있다.

TPL 홈페이지도 추모의 의미로 검게 변했다 ⓒ TPL 공식 홈페이지 캡쳐

하지만 '차이낫이 FA컵을 우승하고 강등당해 2부리그 팀으로 ACL에 출전하는' 시나리오의 성사 가능성은 크지 않다. 차이낫이 현재 강등 결정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구단은 TPL 사무국에 강등을 재고 해달라는 공문을 발송했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 차이낫 구단의 부회장은 "강등 결정이 번복되지 않으면 팀을 해체하겠다"고 말했다. FA컵 우승도 해야 하지만 차이낫의 입장에서는 강등을 막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차이낫이 FA컵을 차지할 경우 시나리오는 두 가지가 생긴다. 하나는 차이낫을 잔류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이낫은 내년 시즌 1부리그 소속으로 ACL에 정상적으로 출전할 수 있다. 나머지 하나는 차이낫의 강등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경우다. 이럴 경우 차이낫은 팀 해체라는 초강수를 둘 수 있다. 이렇게 되면 FA컵 우승팀에게 주어지는 ACL 출전권 재분배 등 골치아픈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내년 시즌 최대 변수는 TPL 사무국

현재 시스템 대로 내년 시즌이 운영될 경우 TPL은 이번 시즌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가장 큰 변수는 따로 있다. 바로 TPL 사무국이다. 이들의 결정에 따라 내년 시즌에 큰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올 시즌이 시작되기 전 그들이 보여준 모습을 살펴보면 내년 역시 삐걱댈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TPL은 올 시즌부터 1부리그 팀 수를 2개 늘린 20개 팀으로 운영될 예정이었다. TPL 사무국은 개막 한 달 전까지 "올 시즌부터 20개 팀이 TPL에 참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TPL 사무국은 현실을 몰랐다. 태국에는 1부리그에 정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팀이 20개가 되질 못했다. 결국 TPL 사무국은 20개 팀 확대를 포기하고 현행 체제를 유지했다.

TPL의 현실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벡테로의 잔류다. 올 시즌 리그 9위를 차지한 벡테로는 사실 TPL에 있을 수 없는 팀이었다. 그들은 지난 시즌 16위로 2부리그로 내려가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올 시즌 벡테로는 멀쩡히 1부리그에 살아남았다.

그들이 잔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진 강등' 때문이었다. 2015 시즌 리그 14위를 차지했던 사라부리가 재정난에 시달리며 더 이상 1부리그에 참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팀은 자진해서 3부리그인 디비전 2로 내려갔고, 벡테로는 어부지리로 잔류할 수 있었다.

물론 승격권을 확대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2부리그 역시 상황이 좋지 못했다. 1부리그에서 자진 강등 사태가 일어날 때 2부리그에서는 승격 거부 사태가 동시에 일어난 것이었다. 주인공은 심지어 2부리그 1위를 차지한 폴리스 유나이티드였다. 이들 역시 재정난이 문제였다. 결국 폴리스 유나이티드는 승격을 최종적으로 포기했고 2016 시즌 디비전 1 참가 금지라는 징계를 받았다. 이 팀이 포기한 승격권은 2부리그 4위팀 BBCU에게 넘어갔고, 시설 미비 등으로 1부리그 참가를 불허당할 뻔 했으나 가까스로 합류할 수 있었다.

TPL 홈페이지도 추모의 의미로 검게 변했다 ⓒ TPL 공식 홈페이지 캡쳐

이러한 상황에서 TPL 사무국의 '20개 팀 확대'는 얼마나 어불성설인 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시즌 일어났던 일을 비추어보면 내년 시즌 다시 한 번 20개 팀 확대를 시도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면 TPL은 국왕 서거 여파에 이어 다시 한 번 격한 혼란에 휘말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국왕의 서거로 TPL이 혼란에 빠졌지만 그래도 태국 축구팬들은 우선 추모를 우선하고 있다. 국왕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적어도 태국 국민들은 국왕을 굉장히 존경하고 따랐다. 일각의 표현대로 국왕은 태국 국민들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70년의 통치 기간 동안 19번의 쿠데타와 20번의 개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신뢰가 두터웠다.

문제는 그 이후다. 지금까지는 차이낫의 반발 외에는 태국 축구계에 큰 논란이 없었다. 하지만 집중 애도 기간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다가올 수록 이번 시즌의 성급한 마무리는 많은 논란을 불러올 것이다. 발전과 정체의 갈림길에 선 TPL에 '국왕 서거'라는 엄청난 변수는 그들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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