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조성룡 기자] 세바스티안 소리아. 우루과이 출신 카타르 귀화 공격수. 우리를 위협했던 실력 있는 선수. 그리고 슈틸리케 국가 대표팀 감독의 '최애캐'.

요즘들어 축구계에서 가장 핫한 이슈는 세바스티안 소리아라는 인물이다. 슈틸리케 감독이 카타르전 이후 "소리아 같은 선수가 우리에게 없다"고 발언한 이후 그는 본의 아니게 세관의 관심을 받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카타르 선수 하나에 관심을 쏟은 적이 있는가 생각이 들 정도다.

소리아가 한국어를 할 수 있었다면 살짝 섭섭했을 것이다. 슈틸리케 감독이 손흥민, 기성용 등 세계적인 자원을 데리고 있으면서 "소리아같은 선수가 없다"고 말하는 바람에 '어떻게 중동 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프리미어리거보다 뛰어날 수가 있는가', '그래봤자 중동 선수다'라는 비아냥이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소리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괜찮은 선수다. 아니, 뛰어난 선수이자 국가적 영웅이다. 지금부터 슈틸리케 감독에 의해 아시아의 축구 강호, 대한민국의 롤 모델이 되어버린 소리아를 소개하려고 한다.

유망주 소리아, 전직 사이클 선수가 캐낸 원석

소리아는 1983년 11월 8일 우루과이의 파이산두에서 태어났다. 풀 네임은 안드레스 세바스티안 소리아 킨타나다. 남미, 그리고 우루과이는 축구를 사랑하는 동네지만 파이산두는 유별나게 축구를 사랑하는 곳이다. 우루과이 대표팀 에이스 아레발로 리오스, 세계 최초로 남성들과 함께 공식 축구 경기를 뛰었던 클라우디나 비달 등이 이곳 출신이다.

우루과이 제 3의 도시라지만 파이산두는 인구 7만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주로 농축산업이 발달한 이 도시에서 소리아는 때로는 농장의 들판에서, 때로는 공장의 공터에서 공을 차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워왔다.

지역 아마추어 팀에서 '공 좀 차본' 선수로 이름을 알린 소리아는 입소문이 퍼지며 입단 테스트를 받게 된다. 수도 몬테비데오에 있는 디펜소르 스포르팅이었다. 1913년 창단해 리그 우승을 세 차례 차지한 명문 구단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와 이 구단의 인연은 짧았다. 2주 동안 그를 지켜본 팀 관계자는 "나쁘지 않은데… 문제는 우리 팀은 얘보다 훨씬 좋은 선수가 많다"는 평가를 내렸다. 탈락이었다. 하지만 소리아는 쿨하게 받아들였다. "괜찮아요. 대신 집에 가게 버스비만 좀 내주세요"

버스비를 쥐어준 그 사람은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까? ⓒ 세바스티안 소리아 페이스북

2주 간의 짧고 달콤했던 꿈이 끝나고 소리아는 다시 훈련에 매진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소리아는 현재 실력 가지고는 프로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빠르게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축구화 끈을 묶었다. 언젠가는 자신을 알아보는 곳이 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전직 사이클 선수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2001년 소리아의 경기에 찾아온 한 남자는 그의 플레이에 반하게 된다. 그는 전직 사이클 선수였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맥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남자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제안했다. "내가 저번에 진짜 괜찮은 선수를 보게 됐는데 말이야…". 그 친구의 직업은 바로 축구 에이전트였다.

이 에이전트는 소리아의 플레이를 관찰한 다음, 프로에서 충분히 통할 실력을 갖췄다고 판단했다. 소리아는 다시 몬테비데오로 향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프로에 입성할 차례였다. 결국 그는 몬테비데오를 연고로 삼는 리버풀 데 몬테비데오의 유니폼을 입었다. 리저브 팀에서 뛰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훌리오 리바스 감독의 부름을 받아 1군으로 승격했다. 약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41경기에 출전해 8골을 득점하며 장래가 촉망받는 유망주로 발돋움했다. 소리아의 시대가 점점 눈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뜬금없는 카타르 행, 신의 한 수가 될 줄이야

2004년, 갑자기 에이전트는 뜬금없는 제안을 해왔다. "카타르에서 뛰어보지 않을래?". 당시 소리아는 유럽 리그의 이적을 모색하다 무산된 상황이었다. 계약 조건은 좋았지만 그는 카타르가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 지도 몰랐다. 그가 에이전트에게 제안을 듣자 처음 물어본 것은 연봉도, 계약 기간도 아니었다. "도대체 카타르가 어디에 있어요?".

걸프 만에 붙어있는 작은 나라라는 설명을 듣자 소리아는 그 때서야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냈다. 우루과이의 옆 동네 아르헨티나의 레전드, 바티스투타가 떠오른 것이다. 바티스투타는 당시 카타르의 알 아라비 SC에서 뛰고 있었다. 그가 카타르에 있다는 사실은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 생소한 나라에서 뛰어야 한다는 두려움을 줄여주었고 결국 소리아는 결정 할 수 있었다. "좋아요. 갑시다"

소리아의 첫 카타르 팀은 알 가라파SC였다. 시차만 7시간 차이 나는 곳으로 넘어와 경기에 나서야 했지만 첫 시즌부터 그는 펄펄 날았다. 저돌적인 돌파와 적극적인 플레이, 그리고 훌륭한 골 결정력은 카타르 수비수들을 압도했다. 그는 26경기에 출전해 무려 15골을 넣었다. 알 가라파는 소리아의 활약에 힘입어 2004-05 카타르 스타스 리그 우승컵을 차지할 수 있었다. 팀의 우승을 이끈 소리아는 리그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는 영광까지 누렸다.

버스비를 쥐어준 그 사람은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까? ⓒ 세바스티안 소리아 페이스북

카타르 축구계에 충격을 안긴 소리아는 그 다음 시즌부터 카타르SC의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2003년 26년 만에 리그 우승컵을 차지한 이후 별 다른 성과가 없었던 카타르SC의 입장에서 소리아는 재도약을 위해 꼭 필요한 카드였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일이 소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귀화 제의였다. 당시 카타르는 AFC 회장 모하메드 빈 함맘의 나라였다. 2012년 FIFA에 의해 영구제명 당할 때까지 그는 아시아, 그리고 세계 축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조국 카타르의 축구가 함맘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상황이 단번에 해결될 수는 없었다. 현재 카타르의 인구는 240만 명, 그 중에서 카타르 대표팀에 호출할 수 있는 진짜 카타르인, 즉 '카타리'는 28만 명에 불과했다. 좋은 선수를 키우고 싶어도 쓸 만한 재목을 찾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카타르 축구계는 축구 발전을 위한 전략 중 하나로 '외국인 귀화'를 선택했고, 적합한 선수를 찾고 있었다. 그 와중에 카타르 리그에 소리아라는 별이 등장한 것이었다.

소리아를 면밀히 검토한 카타르는 그에게 공식적으로 귀화를 제의했다. 카타르에서 완벽한 적응력을 보여줬고, 대표팀 출전 경력도 없어 이후 대표팀 차출에도 큰 문제가 없는 소리아는 카타르의 '위시 리스트' 1순위였다. 카타르 정부의 제의에 소리아는 큰 망설임 없이 귀화를 선택했다. 카타르 국적을 취득하면 얻게 되는 혜택도 많았고, 무엇보다 소리아는 '오일 머니'로 나날이 성장하는 이 국가가 마음에 들었다. 결국 그는 카타르의 첫 번째 귀화 축구선수가 됐다.

막중했던 첫 미션에서 영웅이 된 소리아

소리아가 귀화한 시기는 2006년이었다. 갓 카타르 국적을 취득한 소리아에게 카타르 축구계는 곧바로 특명을 내렸다. 바로 얼마 후 자국에서 열리는 2006 도하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두라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만 23세이기 때문에 와일드카드로 차출될 필요도 없었다. 한국, 일본, 이란 등 강팀들이 즐비한 아시안게임에서 카타르 국민들의 기대를 짊어진 소리아의 어깨는 무거웠다.

하지만 그는 기대에 완벽히 부응했다. 조별예선 1차전 요르단전에서 선제 결승골을 넣었고, 8강 진출을 결정짓는 UAE와의 3차전 '단두대 매치'에서는 혼자서 두 골을 몰아 넣으며 팀의 4-1 완승을 이끌었다. 카타르의 입장에서는 지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조별예선 탈락의 아픔을 씻어내는 순간이었다.

버스비를 쥐어준 그 사람은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까? ⓒ 세바스티안 소리아 페이스북

사실 카타르의 입장에서는 8강 진출로 만족할 수 있었지만 소리아가 중심이 된 카타르 대표팀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8강전에서 태국을 3-0으로 가볍게 꺾은 카타르는 이제 아시안게임 메달이 눈 앞에 와있었다. 문제는 4강전 상대가 이란이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비교적 수월한 팀들과 맞붙었던 카타르는 이제 아시아 강호를 상대로 진정한 시험대에 오른 것이었다.

누구도 카타르가 이란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란은 전통적인 아시아 강호였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디펜딩 챔피언이기 때문이었다. 경기 주도권 역시 이란이 잡았다. 카타르의 수비진은 끈끈한 조직력으로 이란의 공격진을 묶었지만 반격으로 이어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단 한 번의 찬스가 생겼다. 공격에 치중하던 이란의 허점을 노려 카타르가 빠르게 역습을 전개했고, 결국 이는 선제골이자 결승골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바로 소리아였다. 역습 한 방에 무너진 이란은 제대로 경기를 풀어나가지 못했고, 결국 후반 29분에 추가골을 얻어 맞으며 이변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4강전에서 믿을 수 없는 승리를 거둔 카타르는 여세를 몰아 결승전 상대 이라크마저 1-0으로 꺾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카타르의 사상 첫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금메달이었다. 카타르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구호를 외치고 카타르 국기를 흔들며 금메달 획득의 감격을 마음껏 누렸다. 그리고 소리아는 동시에 카타르 축구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소리아에게는 축구 인생 중 최고의 순간이 바로 이 때였을 것이다.

소리아는 한국이 아닌, 카타르의 롤 모델이다

소리아는 아시안게임 금메달 이후 카타르 축구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U-23 대표팀의 에이스가 국가대표팀에 차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국가대표팀에 115경기 출전, 37골을 기록하며 센추리클럽에도 가입했다.

버스비를 쥐어준 그 사람은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까? ⓒ 세바스티안 소리아 페이스북

그렇다고 대표팀에서만 반짝 활약하는 존재는 아니다. 소속팀에서도 매우 준수한 활약을 보여줬다. 카타르SC에서는 2005년부터 2012년까지 152경기 출전, 102골을 기록했다. 특히 2010년에는 소리아의 활약에 유럽 구단은 깊은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우디세네(세리에 A), 헤타페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프리메라리가)가 영입을 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카타르SC와 계약을 연장하며 팀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이후 레크위야로 둥지를 옮겨 2015년까지 64경기 출전 42골을 넣었다. 현 소속팀인 알 라이얀에서는 22경기 출전 10골을 기록하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슈틸리케 감독 입장에서도 소리아는 눈엣가시였다. 슈틸리케는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카타르의 알 아라비와 알 사일리야 감독직을 맡고 있었다. 소리아는 슈틸리케의 상대 팀 공격수로 항상 그의 골칫거리였다. 특히 소리아가 레크위야에서 뛸 당시 그는 남태희와 함께 팀 공격의 선봉이었다.

올해로 소리아는 만 33세다. 6년 뒤 카타르 월드컵이 열릴 때 그는 39세다. 아마 그를 카타르 월드컵에서 볼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하다. 하지만 그는 카타르의 귀화 정책, 그리고 축구 발전의 시작을 알린 전설적인 선수로 이름이 남을 것이다. 단 10년 동안 소리아가 카타르 축구에 남긴 족적은 그 누구보다도 거대하다.

슈틸리케 감독의 발언으로 소리아는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단순히 우리를 위협했던 상대 공격수 중 하나로 끝날 수 있었지만 순식간에 그는 모든 축구팬들이 아는 선수가 됐다. 앞서 말했지만 소리아는 대단한 선수다. 충분히 롤 모델로 꼽힐 만한 선수다. 하지만 그를 롤 모델로 꼽아야 하는 사람은 슈틸리케 감독이 아닌, 카타르 국민들이 아닐까? 부랴부랴 "말 뜻이 잘못 전달됐다"고 수습에 나섰지만, 경솔했던 발언 하나로 한국 국민들도, 소리아도 본의 아니게 피곤해졌을 것이다.

wisdragon@sports-g.com

[사진 = 카타르SC 시절의 세바스티안 소리아 ⓒ Doha Stadium Plus Qa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