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팀들에 비하면 사진 속 완산 푸마는 빅클럽에 속한다. 일단 유니폼부터가 좋은 브랜드 아닌가.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팀이 있는 반면 우리의 기억에 채 자리 잡기도 전에 사라진 팀들도 있다. 찬란한 역사를 자랑해 전설로 남은 팀이 아니라 주변 상황도 최악이었고 결국 짧은 역사를 마감해 전설로 남아야 했던 그 팀들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이 팀들에 비하면 1994년 창단한 딱 한 시즌만 K리그에서 뛴 전북 버팔로는 빅클럽이다. 바람처럼 사라진 비운의 7개 팀을 꼽아봤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다.

7. 페스코리아

스포츠 용품 제초 업체 페스코리아는 2000년 11월 창단식을 열고 실업 축구계에 뛰어 들었다. 포철을 거치고 이후 일본과 브라질 축구까지 공부한 피은형 감독을 초대 사령탑으로 선임하면서 야심차게 출발했지만 한 경기도 치르지 못하고 불과 4개월 만에 팀이, 아니 선수와 감독이 사라지고 말았다. 페스코리아에 이어 창단된 엄브로 축구단으로 이들이 통째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구단 운영에 대한 불만 등이 쌓인 결과였다. 하지만 페스코리아는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한때 국가대표팀 골키퍼로 이름을 날리다 개인 사업을 하고 있던 김황호 감독을 만나 축구단을 재창단한 것이다.

김황호 감독과 페스코리아의 만남은 축구계에서도 꽤 놀랄 만한 만남이었다. 1990년대 청소년 대표팀 골키퍼 코치까지 지내다가 축구계를 떠났던 김황호 감독이 페스코리아와 손을 잡았다는 건 페스코리아의 축구단 운영 의지가 그만큼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페스코리아는 공개 테스트를 통해 선발한 선수들을 데리고 2002년 다시 실업축구 무대에 등장해 데뷔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페스코리아는 데뷔전조차 치르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실업축구가 2003년 K2리그로 재출범하는 과정이었는데 페스코리아는 연고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했던 연고지는 충북 청주였지만 충청북도와 청주시의 반응이 미지근했고 이어 경기도 화성과 안성 등을 연고지로 타진했지만 이마저도 무산되고 말았다. 대기업도 아니고 생긴지 얼마 되지도 않은 회사가 K2리그에 참가한다고 하니 덥석 받아줄 연고지가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서울 도봉구에 본사가 있던 페스코리아는 지역 기반도 약했다. 연고지를 구하지 못하고 K2리그에 참가하지도 못한 페스코리아는 1년여를 더 운영하다가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연고 정착만 잘 됐더라면 아마 우리는 지금 “오 필승 코리아”라는 응원가 대신 “오 페스 코리아”라는 응원가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청주에서 벌써 K리그 경기를 관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6. 슈퍼레즈

싱가포르 리그에 한국 교포들이 만든 팀이 있었다. 2007년 창단한 슈퍼레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현지 한국 교민 사회를 기반으로 창단한 슈퍼레즈는 싱가포르 S리그에 참가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코리안 슈퍼레즈라는 이름으로 출범했지만 이후 ‘코리안’을 빼고 슈퍼레즈로 이름을 바꿨다. 청소년 대표팀을 거쳐 양지팀에서 활약했던 홍인웅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고 순수 한국의 어린 선수들로 구성된 ‘진짜 한국팀’이었다. 하지만 창단 첫 시즌은 가혹했다. 3승 9무 21패로 12개 팀 중 최하위에 머물고 만 것이다. 홍인웅 감독도 성적부진으로 중도 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듬해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현지의 한국인 기업가 찰리 윤이 구단을 인수해 투자했고 과거 포항과 부천, 전북 등에서 뛰었던 전경준 감독이 지도자로 합류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2008 시즌 개막전에서 싱가포르리그 최고 명문인 암드포스에 3-2로 승리를 따낸 슈퍼레즈는 이후 6연승을 기록하는 등 펄펄 날기 시작했다. 싱가포르 현지 팬들도 경기장을 찾아 슈퍼레즈의 플레이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슈퍼레즈는 창단 2년 만에 싱가포르 리그에서 준우승을 거두는 쾌거를 이뤘다. 리그컵 결승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슈퍼레즈의 성공시대는 쭉 이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찬란할 것만 같던 슈퍼레즈의 시대는 여기에서 끝났다. 구단주가 자금난을 이유로 운영에서 손을 뗐고 결국 2009년 시즌을 마친 뒤 재정난으로 해체하고 말았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싱가포르 리그에서 정상을 넘볼 정도로 강했던 슈퍼레즈는 이제 싱가포르 축구 역사에 남을 것이다. 물론 이 팀에서 뛰다가 해체된 후 같은 싱가포르 리그 팀인 게이랑 유나이티드로 이적해 승부조작에 가담했던 두 명의 한국인 선수는 흑역사다. 슈퍼레즈, 게이랑 등 이름이 다 이상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이상하게 생각하는 당신이 더 이상한 거다.

슈퍼레즈는 창단 2년 만에 싱가포르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적을 썼다. 하지만 현재 이 팀은 존재하지 않는다. ⓒ슈퍼레즈

5. 한국합판 축구단

전라북도 군산에 위치한 한국합판은 1960년대 합판 수출로 커진 회사였는데 회사 내에 동호인 성격의 축구팀이 무척이나 강했다. 1968년 군산에서 열린 직장인 축구대회에서 한국합판이 덜컥 우승을 차지하자 고판남 회장이 이렇게 외쳤다. “이 팀을 아예 실업팀으로 육성하자.” 그러면서 판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냥 취미로 공 차는 직장인 팀이 아니라 정식 실업팀이 된 것이다. 축구팀에 별도로 책정된 예산도 없어 회사 내 매점 이익금으로 축구단 운영비를 충당할 정도였지만 직원, 아니 선수들에게는 오전 근무만을 시키고 오후에는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팀은 그저 직장인 축구팀 정도가 아니라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와 전국체전 등 굵직한 실업 무대에 정식으로 도전장을 내민 실업축구팀이다.

물론 한국합판은 직장인 축구팀 수준에서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 팀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지만 실업 무대에서는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1969년 6월 열린 제17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첫 경기에서는 한양대를 맞아 0-4로 대패하는 등 늘 약체로 손꼽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군산 지역에서는 꽤 의미 있는 축구팀이었다. 각 지역별로 올스타를 구성해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발전에 참가했는데 전남,북 혼성팀에는 골키퍼 황일연을 비롯해 한국합판 선수가 두 명이나 포함될 정도로 연고지에서는 인정받는 팀이었다. 한국합판 출신 백영식은 이후 군산시축구협회장을 지낼 정도로 군산 축구 발전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한국합판이 대형 사고를 친 적도 있다. 1971년 전국체전에 전북 대표로 나선 한국합판은 8강전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이 즐비한 부산 대표 육군을 만났는데 이 경기에서 믿기지 않는 2-0 승리를 따낸 것이다. 한국합판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승리였다. 하지만 결국 한국합판은 1972년 3월 운영 자금 부족 등을 이유로 해체하고 말았다. 비록 대형 스타를 배출하거나 큰 대회 우승을 기록한 적은 없지만 어쩌면 이런 팀이야말로 연고지에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는 팀이 아니었을까.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이런 팀이야말로 축구가 뿌리를 내린 유럽과 비슷한 출발 아니었을까. 어쨌든 한국합판은 이후 신문용지사업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세풍그룹으로 발전했지만 결국 1988년 부도 처리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4. 극동철강

이런 회사에 다닌다면 어떨까. 극동철강은 1년에 한 번씩 사내 축구대회를 개최했는데 그냥 재미로 해도 되는 이 대회에서 이겨보겠다고 여기저기에서 ‘선출’을 불러 모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선수 생활을 했지만 이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이들을 각 부서별로 채용하기 시작하더니 심지어 실업무대 조흥은행에서 골키퍼로 활약하던 도은낙까지도 스카우트했다. 보통 사내 대항 축구대회가 아니라 이때부터는 실업팀 못지 않은 경기력을 뽐내기 시작했고 결국 극동철강은 1977년 9월 정식으로 실업 축구단을 창단했다. 부서들끼리 서로 경쟁하다가 결국에는 정식 축구팀이 탄생한 것이다.

도은낙을 플레잉코치로 임명한 극동철강의 실력은 애들 장난 수준이 아니었다. 창단 후 두 달 만에 곧바로 제32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 나선 극동철강은 박상인과 강병찬 등 국가대표 선수들이 포진한 상업은행을 1-0으로 제압하더니 16강전에서는 국민은행에 1-2로 지고 있다가 극적인 2-2 동점을 만들고 승부차기 끝에 4-3 승리를 따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극동철강은 더 많은 투자를 시작했다. 극동철강에서 모기업 이름이 금호산업으로 바뀌면서 팀명 또한 금호산업으로 바꾸고 국가대표를 지낸 서윤찬 코치를 데려왔다. 뿐만 아니라 홍콩 무대를 경험한 임태주를 비롯해 축구계에서 잔뼈가 굵은 선수들까지도 대거 영입했다.

하지만 창단 1년 반 만에 이 팀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1979년 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동국대를 3-0으로 대파하며 산뜻하게 출발한 금호산업은 조흥은행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 부정 선수를 출전시켰다는 이유로 몰수패를 당했고 결국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모기업은 경영 악화에 빠졌고 결국 1979년 5월 축구단 해체를 선언하고 말았다. 극동철강이 금호그룹으로 인수되는 과정에서부터 축구단을 달갑게 보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었다. 세계 철강 업계 제왕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세계 축구계를 주무르기 전 한국에서는 한국 철강 업계의 제왕 극동철강이 먼저 축구팀을 운영했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마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극동철강을 보고 첼시 운영의 꿈을 키운 걸 수도 있다.

슈퍼레즈는 창단 2년 만에 싱가포르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적을 썼다. 하지만 현재 이 팀은 존재하지 않는다. ⓒ슈퍼레즈

3. 챔프통상

1985년 동호인 축구단으로 출범한 크레용 아동복 축구단은 2년 뒤 실업축구단으로의 변신을 노렸지만 두 번이나 무산되고 말았다. 유니폼 대신 아동복을 입어야 해서가 아니다. 운영할 만한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팀을 이끌고 한양공고 출신 선수들을 이미 소집해 10개월 동안 자체 훈련을 하던 김창수 감독은 창단 2년차인 신생기업 챔프통상과 만나면서 인연을 시작했다. 크레용 아동복 축구단은 1988년 1월 챔프통상에 인수되면서 창단식을 갖고 정식으로 실업 축구 무대에 이름을 올렸다. 김창수 전한양공고 감독과 선수들이 이미 구성된 상태에서 운영할 기업을 물색해 창단하는 독특한 형태였다.

당시 챔프그룹은 전과자나 실직자들을 과감하게 채용하면서 인간 승리자들의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을 홍보해 나갔고 두 번이나 창단 무산으로 고심하던 선수들도 딱 챔프그룹이 원하는 이들이었다. 챔프그룹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승용차 카풀을 비롯해 챔프효부대상재정, 농어촌 총각 짝지어주기 등 독특하고 의미 있는 캠페인을 펼치며 세를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축구단 또한 창단 보름 만에 치른 1988년 춘계실업축구대회에서 2무 2패에 그쳤지만 할렐루야와 임마누엘 등을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선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창단 석 달 만에 챔프그룹 계열사인 챔프정수가 부도를 낸 것이다.

기업 규모가 급속도로 축소되는 와중에서 당연히 구단 해체가 논의됐다. 하지만 챔프통상 선수들이 읍소했다. “자비를 들여서라도 대회에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챔프통상 선수들이 돈을 걷어 1989년 실업축구대회 청룡리그에 나섰고 강원도민체전에서는 승부차기 끝에 철도청을 제압하고 전국체전 강원도 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강원도 축구협회는 이사회를 열고 전국체전 강원도 대표로 챔프통상이 아닌 철도청을 선발했다. “예선 통과팀이라도 협의에 따라 출전 팀을 교체할 수 있다”는 규정을 내세워 축구팀으로서는 결격 사유가 많은 챔프통상 대신 철도청이 전국체전에 나가기로 한 것이다. 챔프통상은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곧 챔프그룹이 완전히 폐업하면서 자비로 힘겹게 운영되던 이 축구단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독창적이고 파격적으로 운영되던 이 그룹이 지속됐더라면 한국 축구의 역사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2. 경남버스

경상남도의 시외버스 업체인 ‘경남버스’는 동호회 수준의 팀을 운영하다가 1979년 3월 마침내 실업 축구팀을 창단했다. 1979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참가를 목표로 해군 축구팀 감독을 지낸 유인갑 감독을 선임했고 청소년 대표팀 코치 출신 장원목 코치까지도 불러들였다. 국가대표 수비수 박병철을 비롯해 정호선과 김홍주 등 쟁쟁한 선수들도 경남버스 운전복, 아니 유니폼을 입었다. 대통령배에서 경남의 전차, 아니 버스들은 농협을 제압하는 등 쾌조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예선을 통과했고 경남 지역 축구붐 형성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실업팀 전환과 동시에 전국대통령배 축구대회 참가를 선언했고 이 대회에서 곧바로 예선을 통과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비록 16강전에서 이영무와 신현호, 박창선 등 쟁쟁한 멤버들을 앞세운 국가대표 충의에 1-3으로 패했지만 2,500여 명의 관중은 신생팀 경남버스의 선전에 매료됐다. 경남버스의 주전 수비수 박병철은 이 팀 소속으로도 국가대표에 발탁되는 영광까지도 누렸다. 하지만 창단 4개월 만인 1979년 7월 경남버스는 하루 아침에 해체되고 말았다. 경남버스 신달수 회장이 돌연 해체를 선언해 버린 것이다. 2차 오일쇼크 때문에 버스 회사 경영난이 심각해졌다는 게 이유였지만 기존 구단의 텃새 때문에 좋은 선수를 영입하는데 실패하면서 결국 운영의 의지를 잃었다는 지적도 지배적이었다.

결국 경남버스는 창단 4개월이 조금 넘은 시점에서 멈춰야 했고 선수들도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한창 나이 때였지만 받아주는 팀이 없어 은퇴해야 했는데 이중에는 국가대표 수비수 박병철도 있었다. 박병철은 경남버스 해체 이후 국가대표 은퇴까지 선언하며 축구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듯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홍콩 세미프로 팀 해봉에 진출하면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됐다. 지금 이 회사는 ‘경남고속’이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이다. 아마 지금까지도 경남버스 축구단이 있었더라면 서포터스 원정 응원 버스 대절은 기가 막히게 해줬을 것이다.

슈퍼레즈는 창단 2년 만에 싱가포르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적을 썼다. 하지만 현재 이 팀은 존재하지 않는다. ⓒ슈퍼레즈

1. 청구마린스

청구마린스의 시작은 대단했다. 청구상사 김석원 회장과 청구파이낸스 김석인 대표 형제가 부산 지역 최초의 실업 축구단을 창단했기 때문이다. 1999년 8월 10일 부산 롯데호텔에서 창단식을 열었고 김석원 구단주는 “3년 내로 프로축구단으로 전환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국가대표 출신이자 전년도 U-20 청소년 대표팀 코치를 맡았던 이재희 감독을 선임했고 창단식은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과 부산시체육회장인 안상영 부산시장 등이 참가할 정도로 성대했다. 18명의 선수 중 프로 출신만 무려 12명에 달했고 이정호(명지대)와 홍연기(단국대) 등 대학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선수까지도 영입한 청구마린스의 기세는 대단했다.

창단 후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추계실업축구대회연맹전에 출전한 청구마린스는 안양LG 2군을 4-2로 꺾으며 축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실업 무대의 정상을 노릴 만한 실력으로 급성장했고 김석원 구단주의 말처럼 정말 3년 내로 프로구단이 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양LG를 제압하고 일주일 뒤 날벼락이 떨어졌다. 김석원, 김석인 형제가 수백 억 원의 고객 투자금을 빼돌린 뒤 싱가포르로 도주해 버렸기 때문이다. 구단의 운영 주체가 졸지에 범죄자 신분으로 도주하자 청구마린스는 갈 길을 잃었다. 지정 식당으로 쓰던 한 횟집에는 순식간에 800만 원의 식대가 밀려버렸고 1억 원 상당의 전용 버스도 압류를 당하고 말았다. 선수단 월급도 당연히 끊겼다.

하지만 청구마린스는 당장 팀을 해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부산 유일의 실업팀으로 전국체전에 부산 대표로 출전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청구마린스 선수들은 밥을 사 먹을 돈도 없어 집에서 쌀을 챙겨오면서까지 대회에 나섰고 1999년 인천에서 열린 이 전국체전에서 기적과도 같은 은메달을 따냈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는 “청구마린스 축구단 해체는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며 부산시가 맡아줄 것을 요청했음에도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시로서도 별다른 대책이 없었고 결국 팀은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불과 창단에서부터 해체까지 석 달 남짓한 시간이었다. “내가 직접 밥 해 먹으면서 전국체전 은메달 땄다”고 주장하는 아저씨가 있다면 거짓말이라고 몰아 세우지 말자. 전설의 청구마린스 선수다.

역사는 강한 자만을 기억하고 정상에 섰던 자만을 기억한다. 그런 면에서 이렇게 짧은 역사만을 남기고 초라하게 사라진 이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 사라져버린 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 축구가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단명’한 팀들도 결국은 한국 축구의 역사다. 비록 짧게 활약하고 사라졌지만 역사에는 오래 남겨두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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