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회] 차범근은 어떻게 6분 만에 세 골을 넣었나

차범근
차범근은 한국 축구의 영웅이다. 그가 40년 전 한 일을 알면 더 그렇게 느낄 것이다. ⓒ분데스리가 공식 홈페이지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1976년 9월 11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어제다. 이날 한국 축구사에서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적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불세출의 스타’ 차범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해트트릭을 기록했다는 바로 그 역사적인 날이었기 때문이다. 5분인지, 6분인지, 7분인지 말도 많고 세 골인지, 다섯 골인지도 분분한 바로 그 위대한 경기의 발자취를 쫓아봤다. 우리는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그 경기에 대해 너무 잊고 있었다. 지금부터 전설의 그 경기를 집중 조명해 보려 한다.

서울신탁은행과 자동차보험의 차범근 영입 전쟁
1976년 고려대를 졸업한 만22세의 차범근을 노리는 팀은 많았다. 실업팀 포항제철을 비롯해 자동차보험과 신탁은행 등이 차범근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차범근의 행선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신탁은행이 차범근의 대학 시절 장학금을 지급하며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결국 차범근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다른 팀이 있었음에도 신탁은행에 입단해야 했고 1976년 봄철실업연맹전에서 신탁은행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하지만 7개월 만에 신탁은행의 상황이 변하고 말았다. 1976년 8월 말, 신탁은행이 서울은행과 합병이 됐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차범근과 신탁은행 측의 해석은 달랐다. 차범근 측은 “신탁은행과 서울은행이 합병이 되면서 내 기존 소속팀은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다. 해체되는 팀의 선수는 임의로 소속을 옮길 수 있다는 협회 규정에 따라 자유롭게 이적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입장이었다. 평소 존경해 오던 문정식 감독을 따라 자동차보험으로 옮기겠다고 한 것이다. 반면 서울신탁은행 측은 “팀이 해체된 게 아니라 합병한 것이기 때문에 차범근은 이적 금지규정에 걸리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만약 협회 이사회에서 차범근의 이적을 허락한다면 우리는 축구단을 해체해 버리겠다. 그 책임은 영원히 협회가 져야 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서울신탁은행은 차범근을 절대 다른 팀으로 내주고 싶지 않았다.

협회는 난감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스타 플레이어의 이야기를 들어주자니 하나가 아쉬운 축구팀이 해체하겠다고 으름장을 놨고 서울신탁은행의 손을 들어주려면 차범근에게 2년간 출장금지처분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서울신탁은행은 사표를 제출한 차범근을 실업연맹전에 나서는 23명 중 한 명으로 엔트리에 포함 시켜버렸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제6회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일명 박스컵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어서 축구협회는 비상이 걸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이 초대형 스타의 손실을 막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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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은 독일에 진출하기 전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분데스리가 공식 홈페이지

‘축구협회 소속’으로 태극마크 단 차범근
팀 해체에 따른 규정만 있었을 뿐 두 팀이 하나로 합칠 경우의 상황에 대해서는 규정에 없던 협회로서는 난감한 처지였다. 유권 해석에 따라 누군가는 엄청난 손실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서울신탁은행과 자동차보험이 한발도 물러서지 않자 결국 1976년 9월 2일 김윤하 축구협회장이 개입했다. “두 팀 다 차범근 영입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었다. 차범근도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그가 선택한 건 파격 그 자체였다. “소속팀 없이 지내다 다음 달에 군에 입대하겠습니다.” 언젠가는 병역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차범근은 결국 이 복잡한 상황에서 군 입대를 선언했다. 또한 당장 치러야 하는 박스컵에서는 사상초유의 ‘축구협회’ 소속으로 참가하기로 했다. 소속팀이 없는 차범근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원래 있지도 않은 ‘축구협회 소속 선수’를 만든 것이다.

당시 대표팀은 이원화 돼 있었다. 1진인 화랑에는 김호곤과 박성화, 황재만, 최종덕, 이영무, 박상인, 김진국, 김강남 등 대표팀 주전들이 대거 합류해 있었다. 물론 만 22세의 차범근 역시 이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2진인 충무에는 박창선을 비롯해 김성남, 유동춘, 한문배, 조광래, 김황호 등 유망주들이 포진해 있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특명이 내려졌으니 바로 지금이야 추억 속으로 사라진 박스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었다. 박스컵은 메르데카컵(말레이시아), 킹스컵(태국)과 함께 아시아 3대 국제축구대회로 성장해 있었고 안방에서 열리는 터라 반드시 우승컵을 들어야 했다. 한국은 이 3대 국제축구대회에서 우승하면 서울 시내를 돌며 카퍼레이드를 할 정도였다.

차범근이 속한 화랑은 말레이시아, 인도, 싱가포르, 상파울루주 U-21 선발팀과 한 조에 속했다. 이중 특히나 말레이시아는 무척이나 강한 상대였다. 소친온, 찬드란, 아무르감 등을 앞세운 말레이시아는 늘 미얀마(당시 버마)와 함께 우리를 괴롭히던 아시아의 축구 강호였다. 아시아축구연맹(AFC) 본부가 1965년부터 말레이시아의 수도 콸라룸푸르에 있을 만큼 말레이시아가 아시아 축구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컸다. 당연히 한국이 박스컵을 품기 위해서는 말레이시아를 넘어야 했다. 말레이시아는 특히 수중전에 강했는데 1971년 서울에서 열린 뮌헨 올림픽 아시아 동부지역 예선에서 한국을 상대로 수중전 끝에 1-0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말레이시아는 지금으로 치면 이란이나 일본, 호주 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한국의 라이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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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셋째 아들 차세찌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었다.

40년 전 어제 벌어진 기적 같았던 경기
1976년 9월 11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어제였다. 이후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뀐 서울운동장에는 무려 3만 명의 관중이 들어찼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1진 화랑의 경기를 지켜보기 위한 사람들이 넘쳐났다. 한국은 차범근을 비롯해 주전이 대거 출장했고 말레이시아에도 경험이 풍부하고 늘 한국만 만나면 펄펄 나는 골키퍼 아무르감과 수비수 소친온이 포진해 있었다. 그렇게 오후 3시 반 경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자 예상밖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전반 12분 만에 수비수 김호곤의 실수로 완 라시드에게 한 골을 허용한 한국은 9분 뒤 이사 바카르에 또 한 골을 내주며 0-2로 끌려갔다. 절망적인 일은 더 이어졌다. 전반 32분 수비수 김철수의 패스 미스로 자책골까지 허용한 것이다.

전반전이 끝날 때의 점수는 0-3이었다.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한국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전반전을 마쳤다. 한국 문정식 감독은 실수를 범한 수비수 김철수를 제외하고 일찌감치 박성화를 투입했지만 수비는 여전히 불안했다. 골키퍼도 전반이 끝난 뒤 김희천에서 김진복으로 교체했다. 후반 24분 차범근이 슈팅이 골대를 맞고 나오자 박상인이 이를 밀어 넣으며 한 골을 만회했지만 말레이시아는 또 달아났다. 후반 34분 목타르 다하리가 또 다시 한 골을 기록한 것이다. 1-4. 경기 종료 시간이 11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건 절망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수중전에서 맹위를 떨치는 말레이시아였다. 관중석에서는 “그러니까 왜 대표팀을 1,2진으로 나누느냐”는 비난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슬슬 자리를 뜨는 이들도 있었다. 1-4는 이미 끝난 것과 다름 없는 점수차였다. 한 골도 아니고 세 골 차였다.

후반 38분 차범근이 추격골을 뽑아냈다. 페널티 에어리어 오른쪽에서 차범근이 넘어지면서 왼발로 때린 공이 말레이시아 골문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7분밖에 없었는데 두 골이나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4분 뒤 또 한 번 말레이시아 골문이 열렸다. 이번 골의 주인공 역시 놀랍게도 차범근이었다. 1-4였던 점수가 졸지에 3-4로 변했다. 차범근이 4분 사이에 두 골을 기록했고 자리를 뜨려던 관중은 다시 뜨거운 함성을 보내기 시작했다. 한국 선수들은 시간이 부족하다며 다시 공을 들고 하프라인으로 뛰어갔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기필코 동점을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김이 빠졌던 경기장은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전광판 시계는 후반 42분에서 43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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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은 한국 축구를 넘어 세계 축구계를 호령했다. ⓒSBS 방송화면 캡처

이제는 전설로만 내려오는 ‘6분 세 골’
그런데 여기에서 한국 축구사에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말았다. 후반 44분 김진국이 날카롭게 날린 슈팅이 흐르자 누군가 주저 앉으며 오른발을 내밀었고 이게 그대로 말레이시아 골문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또 한 번 차범근이 일을 내고야 말았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이들은 이 믿기지 않는 이 믿기지 않는 순간을 바라보며 뜨거운 함성을 내질렀고 다 잡았던 경기에서 동점을 허용한 말레이시아 선수들은 잔디에 벌렁 누워버렸다. 1-4로 끌려가던 경기는 이렇게 순식간에 4-4 무승부를 막을 내렸고 차범근의 기적 같은 스토리는 완성됐다. 이 경기는 지금까지도 한국 축구사에서, 차범근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경기로 회자된다. 차범근은 훗날 이 경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전반에 세 골을 먹힌 뒤 화가 나더라고요.” 소속팀도 없던 ‘축구협회’ 차범근이 역사를 쓴 경기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차범근은 이날 세 골을 포함해 이 대회 7경기에서 7골을 뽑아냈고 특히나 네 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며 한국 공격을 이끌었다. 또한 차범근의 활약을 앞세운 한국은 결승전에서 상파울루주 U-21세 선발팀과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공동우승으로 대회 3연패를 확정지었다. 그리고 결승전 이틀 뒤 차범근은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공군에 입대했고 한 달 만에 대통령배 전국 축구선수권대회에서 무명에 가까운 공군을 준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차범근의 업적을 평가하는 여러 지표가 있지만 누가 뭐래도 차범근의 전설적인 한 경기를 꼽자면 이 말레이시아전의 기적 같은 해트트릭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믿기지 않는 경기가 펼쳐진 게 바로 40년 전 어제라는 점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대목이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6분 동안 세 골’이 정확하다. 이는 대한축구협회의 공식 경기 기록지에도 마찬가지로 표기돼 있다. 세 골을 기록하기까지 5분이 걸렸다는 설과 7분이 걸렸다는 설이 있지만 공식적인 기록을 참조하는 게 옳다. 앞으로는 ‘6분 세 골’이라는 표기로 통일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지난해 독일분데스리가에서 9분 동안 다섯 골을 뽑아낸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기록과 견주어도 차범근의 기록이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것도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 이미 앞선 상황에서 추격 의지를 잃은 상대의 골문을 공략하는 것보다 뒤진 상황에서 추격해 기어코 동점을 만든 차범근의 의지는 충분히 ‘9분 다섯 골’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우리와 엇비슷한 전력의 팀이었고 이 ‘6분 세 골’은 만 22세의 어린 선수가 훗날 세울 위업의 초석이었다는 점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날의 차범근, 우리가 기억하자
안타깝게도 전설적인 차범근의 이 활약은 우리가 영상으로 접할 수가 없다. 기록 보존에 서툴렀던 1970년대의 활약이었기 때문이다. 취재를 위해 축구 원로들과 접촉하고 과거 자료를 뒤져 퍼즐 조각을 맞추듯 기억을 하나 하나 조합해야 했다. 당시의 분위기 또한 전해 들어야 했다. 한국 축구사에서 잊어선 안 될 귀중한 장면이 이제는 마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입으로만 전해져야 한다는 점은 아쉽다. 앞으로는 한국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명장면들이 기록으로 잘 보존되었으면 한다. 40년 전 어제,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차범근의 기적 같은 ‘6분 세 골’이 있었다는 걸 알리고 기억하는 게 현시대를 사는 축구인들의 의무 아닐까. ‘차두리의 아버지’가 아닌 ‘전설의 슈퍼스타 차범근’을 기억하는 하루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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