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올림픽에 출전했던 김덕현을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스포츠니어스|박소영 기자] 지난 22일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화려한 폐막식을 끝으로 12일 간의 여정을 끝맺음 했다. 무더위 속에서 한국 대표팀을 응원했던 많은 사람들은 무더위가 풀리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올림픽을 머리 속에서 지워갔다. 리우의 열기가 수그러들고 있는 지금, 리우에서 행복하게 날아오르고 싶다고 밝혔던 한국 육상 간판, 김덕현(광주광역시청)을 만났다.

“아쉬웠지만 이미 다 지나간 걸 후회해서 뭐하겠어요.” 김덕현의 첫마디에는 아쉬움이 짙게 남아있었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잘 안됐어요. ‘역시 올림픽은 올림픽이다. 확실히 올림픽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결과가 나오기 힘들구나’하는 걸 또 느꼈죠.” 그러면서 김덕현은 이번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느낀 점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경험한 세 번의 올림픽과 육상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파란만장했다.

운이 없었던 그의 첫 번째 올림픽

김덕현은 자신의 첫 올림픽이었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직전까지는 승승장구했다. 2005년 인천에서 열린 아시아육상선수권에서 16m78을 뛰며 박민수가 세운 16m73의 기록을 무려 11년 만에 경신한 것이다. 이해 11월에는 마카오 동아시아경기에서 16m79의 한국신기록을 다시 세웠고 10개월 뒤에는 요코하마 슈퍼그랑프리대회에서 16m88을 뛰면서 자신의 한국신기록을 또 다시 깼다. 이뿐 아니었다. 2006년 10월 전국체전에서는 17m7의 기록을 세우며 한국세단뛰기의 숙원인 17m 벽을 깨고 금메달을 따냈다.

하지만 자신감 넘치던 김덕현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운이 따르지 않았다. 세단뛰기 예선에서 16.88m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그 해 유난히 예선에서 좋은 기록이 쏟아져 나오면서 결선진출에 실패했다. 당시 김덕현의 기록은 39명 중 18위로 12위까지 주어지는 본선 진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 기록이 올해 나왔다면 무난하게 결선 진출에 성공했을 성적이었다. 내심 스텝만 잘 맞고 운이 좋으면 메달까지도 바랐던 한국 육상은 김덕현이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김덕현은 그렇게 첫 번째 올림픽을 아쉬움 속에 마무리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을 1년 앞두고 나선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김덕현은 좌절을 맛봤다. “대구 육상선수권대회가 선수 생활의 최대 위기 아니었나요?”라는 기자의 말에 김덕현은 긴 한숨을 쉬며 답했다. “선수 생활의 위기가 아니라 인생 최대의 위기였죠. 우리 육상에서는 두 종목의 출전권을 가지고 있으면 두 종목에 모두 출전해야 해요. 대구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대구 육상선수권대회의 일정이 다른 대회와는 조금 달랐어요.”

김덕현은 세 번의 올림픽에 나섰지만 아쉽게도 결선에는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방송 화면 캡처

악몽이 된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김덕현은 말을 이었다. “보통 다른 대회 같으면 멀리뛰기 예선과 결선이 끝나고 세단뛰기가 시작돼요. 그런데 대구 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멀리뛰기 예선을 치르고 다음날 오후가 멀리뛰기 결선이었는데 그날 오전에 세단뛰기 예선이 있었죠. 그 세단뛰기 예선에 출전 했다가 심각한 부상을 당했어요. 그래서 오후에 있던 멀리뛰기 결선을 포기해야만 했죠.” 이미 왼 발목에 통증이 느껴지는 순간 큰 부상임을 직감한 김덕현은 “왼발목이 아예 부러진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바로 병원으로 이동한 김덕현은 의사에게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평소 꾸준했던 운동 덕분에 발목이 힘이 좋아 뼈가 부러지는 것은 다행히 면했지만 보통 많이 파열되는 바깥쪽의 얇은 인대가 아닌 안 쪽의 두꺼운 인대가 끊어 졌다는 이야기였어요. 대구와 서울에서 두 의사 선생님께 진단을 받았는데 두 분 다 똑같이 이렇게 얘기하셨어요. 웬만해서는 끊어지지 않는 인대인데 어떻게 안쪽 인대가 끊어지느냐며 복귀하기 힘들 수 도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막막해지고요.” 안방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그것도 결선진출에 성공하고도 부상으로 이를 포기해야 했던 김덕현의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더군다나 부상의 정도까지 가볍지 않았으니 그에게는 인생 최대의 고비가 맞는 듯했다.

이 부상은 런던 올림픽 그리고 이 후 선수 생활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대구 육상선수권대회 이전에 이미 런던올림픽 세단뛰기 기준기록을 넘겨놓은 김덕현은 생각보다 이른 런던올림픽에 초점을 맞추고 재활해야 했다. “런던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이 쫓기는 것 같았어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재활했다면 지금까지 아프지는 않았을 거에요. 다 지난 일이죠 뭐.” 김덕현은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런던에서의 아쉬움과 리우에서의 도전

결국 김덕현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자신의 평소 기록보다 훨씬 저조한 16m22를 뛰며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다시 4년을 절치부심했다. 본인 스스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2016년 리우 올림픽을 준비한 것이다. 더군다나 김덕현은 리우 올림픽에서 자신의 주족몽인 세단뛰기 뿐 아니라 어느덧 주종목보다도 더 기록이 잘 나오는 멀리뛰기에서도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 쾌거를 이룬 상황이었다. 한국 육상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두 종목 동시 출전이었다.

“세단뛰기보다 멀리뛰기가 메달권 진입 가능성이 더 높았어요. 멀리뛰기가 기준기록만 통과해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으면 좋은 성적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원래는 세단뛰기에 중점을 두고 있었는데 올해 들어 운동하면서 변화를 좀 줘봤더니 멀리뛰기 기록이 생각보다 잘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코치님과 상의 끝에 멀리뛰기에 집중해보자고 했고 올림픽 출전 기준 기록도 통과했어요. 분위기 좋게 잘 나가고 있었죠.” 하지만 그에게 있어 영광스러운 올림픽 육상 두 종목 출전은 오히려 그에게 고민으로 다가왔다.

“올림픽 메달권에 근접했던 멀리뛰기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한국 육상의 현실상 세단뛰기를 포기할 수 없었어요. 우리 육상 같은 경우는 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대회를 나가는 것 조차 너무 힘들어요. 제가 세단뛰기 기준 기록을 통과해 올림픽 출전권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안 뛴다고 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사실 세단뛰기에 출전해야 된다는 압박감과 부담감이 분명히 있었어요.” 이러한 사명감이 화를 불렀다. 주종목인 멀리뛰기에 집중해 연습하던 중 이 상태로 세단뛰기 올림픽에 나설 수 없어 세단뛰기 연습에 들어갔다. 부담감을 가지고 시작한 훈련 도중 왼발뒤꿈치에 무리가 왔다.

또 다시 찾아온 부상, 그리고 통한의 3cm

“왼발뒤꿈치 부상 때문에 온전히 제가 생각한 스케줄을 소화하지 못했어요. 부상 때문에 도약 종목에 필요한 기술 훈련을 거의 못하고 시합을 뛴 케이스죠. 시합 준비과정에서 저만의 패턴이 있는데 제 패턴대로 진행할 수 없었어요. 원래 훈련하던 대로 하려는 순간 아프더라고요. 그때 ‘아 이러다가 진짜 본 시합을 뛰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지난 13일 열린 멀리뛰기 예선에서 김덕현은 7m82의 기록을 남겼다. 이날 12위로 결선행 막차를 탄 다마르 포브스(자메이카)의 기록은 7m85로 김덕현과 격차는 3㎝에 불과했다. 부상을 안고 뛴 김덕현에게는 통한의 3cm였다.

멀리뛰기 예선에서 무리한 탓에 부상을 당한 왼발뒤꿈치의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세단뛰기는 출전 자체를 포기할까에 대해서도 고민할 정도였다. “결선 진출은 고사하고 세단뛰기에 나가는 것 자체가 무리에 가까웠어요. 통증에 제대로 훈련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하지만 김덕현은 마지막 올림픽에서 끝까지 뛰기로 마음 먹었고 세단뛰기 경기 직전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주사까지 맞았다. 이 주사도 소용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지만 김덕현은 출전을 강행했다. 더 이상 기록이나 결선 진출을 위한 도전이 아니었다. 본인 스스로를 위한 마지막 도전이었다.

결국 김덕현은 16m36의 기록으로 경기를 마쳤고 예선 탈락했다. 첫 번째 올림픽은 라이벌들이 너무 잘해 운이 없었고 이후 두 번의 올림픽은 지긋지긋한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올림픽 때 마다 이러니까, 뭐 한두 번 그랬던 것도 아니고… 요즘은 운동 생각 안 하면서 잘 추스르고 있어요.” 말끝이 흐렸던 이 한마디에 김덕현의 10년의 국가대표로서의 세월이 묻어났다. 김덕현은 출전한 3번의 올림픽에서 모두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누군가 그의 육상 인생에 대해 묻는다면 실패라고 대답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척박한 한국 육상에서 그나마 세계 무대를 두드릴 수 있는 유일한 선수였고 한국 육상사에 전설로 남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김덕현은 세 번의 올림픽에 나섰지만 아쉽게도 결선에는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방송 화면 캡처

김덕현의 기록을 향한 고독한 레이스

김덕현은 한국 육상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만큼 고독했고 외로웠다. 2006년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이번 2016년까지 국가대표로서 7번의 메이저 대회에 출전했다.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세단뛰기에서는 동메달을 따냈고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멀리뛰기에서는 감격적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도 김덕현은 멀리뛰기 은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2007년 방콕 하계유니버시아드와 2009년 베오그라드 하계유니버시아드에서는 각각 세단뛰기와 멀리뛰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한국 육상에서 이는 당분간 깨질 수 없는 기록이다.

항상 자신의 기록과의 싸움이었고 큰 무대와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라이벌이 있었으면 더 좋은 기록을 냈을 거에요. 저는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4년 동안 정말 많이 성장했어요. 고등학생 때는 분명 경쟁하던 선수들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저를 따라 오지 않고 있더라고요.” 국내에서 적수가 없는 김덕현은 본인 스스로 한국신기록을 7번이나 깨며 혼자만의 싸움을 펼쳐왔다. 심지어 올 6월에는 7년이나 깨지지 않던 자신의 멀리뛰기 기록을 깨면서 왕성한 실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김덕현은 후배 선수들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다. “고등학생들 중에서 기대되는 선수가 꼭 한두 명씩 보여요. 그런데 어느 순간 사라지죠. 저는 대학교 때도 우리 안에 살았거든요.` 저는 팀에서 외박을 줘도 잘 안 나갔어요. 심지어 6개월 동안 외박을 줘도 한 번도 안 나간 적도 있어요. 포기할 건 포기해야죠."

김덕현이 한국 육상에 던지는 메시지

그러면서 한국 육상 시스템상 선수들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문제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김덕현은 첫 엘리트 육상을 시작할 때 진학한 광주체고에서 그를 지도한 김혁 코치와 2013년까지 함께했다. 중간에 잠깐 다른 코치와 함께 했던 적도 있지만 긴 세월을 한 코치와 함께한 게 큰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시스템 자체가 저처럼 한 코치에게 배울 수가 없어요.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대학교에서 실업팀, 실업팀에서 대표팀까지 올라가면서 계속 코치가 바뀌거든요.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새로운 코치에게 적응할 시간이 굉장히 많이 필요하게 되죠. 그리고 코치가 선수의 장 단점을 파악을 하고 계속 밀고 나가야 되는데 그게 안돼요. 코치가 바뀔 때마다 다른 곳에 손대고 또 변화를 주고 하게 되니까요. 흐름이 연결되지 않아요.”

이러한 문제는 대표팀에서도 계속 되는 것이었다. 비슷한 기록 때문에 한국 육상 대표팀은 유난히 많은 선수들이 거쳐간다. 월등한 선수가 아니고서야 계속해서 대표팀에서 훈련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계속 적응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그 월등한 선수가 김덕현이었고 김덕현만이 일관된 흐름으로 운동할 수 있었다. 김덕현은 척박한 한국 육상에서 홀로 자신의 기록을 깨는 선수였고 세계 무대에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선수였다.

김덕현은 이미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이번이 마지막 올림픽이 될 것이다. 내년에 열리는 런던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지금부터 다시 선수권대회를 준비하기에는 기준기록에 대한 부담감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요즘은 바뀐 규정 탓에 기준기록을 통과하는 거 자체가 되게 힘들어요. 출전권을 가지기 위해선 계속해서 대회에 나가야 되고 그 시합에 온 힘을 쏟아야 되죠. 그러다 보면 본 대회에서 힘을 쓰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세계육상선수권에 포커스를 맞추기 보다는 국내 시합들을 뛰다가 기준 기록을 넘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려고요.”

김덕현의 도전은 실패가 아니다

김덕현은 향후 계획을 전하면서 지금까지 자신을 응원해 주신 분들께 감사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전했다. “코치님과 연맹 그리고 팬들이 기대한 것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미안하고 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그는 가족들에게도 공을 돌렸다. “육상선수 중 결혼하고 나서 계속해서 기록이 유지되는 선수도 많지 않은데 저는 7년 만에 또 기록을 경신했어요. 집에서 항상 배려해주는 아내와 지극정성으로 도와주시는 장모님 덕분이죠. 최근에 몸도 더 튼튼해 진 거 같아요.” 김덕현은 32세로 이제 육상선수 치고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그럼에도 최근 한국신기록을 또 다시 깨는 등 여전히 국내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서 있다.

김덕현은 다시 태릉선수촌으로 향했다. 훈련을 하면서 올 시즌을 마무리하는 전국 체전에 나설 예정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김덕현은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 중인데 내년 졸업 예정이라 올해는 논문도 써야 해서 할 게 많다고 바쁘게 살 예정”이라며 웃음 지었다. 김덕현이 이번 올림픽 경기를 마친 후 한국 취재진에 가장 처음 했던 한마디는 바로 “실패네요”였다. 김덕현이 오랜 시간 동안 세계대회라는 무대에 도전하고 치열하게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한마디였다. 물론 올림픽 무대에서 결선 진출이라는 목표를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그 누가 김덕현을 보고 실패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앞으로 한국 육상의 살아있는 전설이 돼 가고 있는 김덕현의 도전에 실패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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