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라는 존재에는 저마다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축구가 인생의 성공을 가르는 중요한 일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주말을 즐겁게 보내게 해주는 좋은 취미일 수도 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축구가 그저 돈벌이 수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오늘 소개할 이들만큼 축구에 대해 특별함을 가진 이들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지금부터 약 50년 전으로 시계를 돌리려 한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축구팀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축구가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특별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 번쯤은 많은 이들이 떠올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오늘 칼럼을 시작하려 한다.

기사 이미지

청소년개척단에서 합동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 이들은 사회에서 외면을 받는받는 신분이라는 이유로 이곳에 오게 됐다.

‘사회명랑화사업’과 청소년 개척단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6개월 뒤 전국을 떠도는 노숙자와 전과자, 윤락 여성 등을 잡아 들였다. 이른바 ‘사회명랑화사업’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이들을 반강제적으로 체포한 것이다. 처음에 잡아들인 인원은 50여명에 불과했는데 이들은 곧바로 열차를 타고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향해야 했다. 미리 짐을 쌀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달랑 옷가지 몇 벌만을 챙겨 가방 하나만 들고 목적지도 모른 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인솔자에 의해 척박한 곳에 버려지다시피 했다. “이곳이 어딘가요?” 누군가가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여긴 충남 서산군 인지면 모월리다. 청소년 개척단에 온 걸 환영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황량한 바다와 갯벌뿐이었고 이들은 처음 듣는 ‘청소년 개척단’이라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염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방을 축조해 놓았지만 이후 염전 사업이 지지부진하면서 결국 방치된 곳으로 이들을 강제 집단 이주시킨 것이다. 1980년대 삼청교육대의 원조(?) 격이라고 할 만한 이 국가적 사업에는 ‘청소년 개척단’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이 붙었다. 군사정권의 사회정화 시책 차원에서 시작된 이 사업은 간단히 말해 갯벌을 농지로 메우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강제 이주된 이들 외에도 여기저기에서 “서산으로 가면 경작지를 준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청소년 개척단에 들어온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청소년 개척단은 사회를 정화한다는 야심찬 계획 하에 1961년 11월 14일 시작됐다. 하지만 이들의 생활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잠 잘 곳이 없어 추운 겨울에도 산비탈에 땅굴을 파고 지내야 할 만큼 시설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부모나 형제들이 찾아와 수용자를 만나고 가는 일도 있었지만 도주하지 못하도록 밤에는 서치라이트까지 이용해 감시를 할 정도로 분위기는 살벌했다. 그들에게 자유는 없었다.

억울하게 끌려 왔다가 가족이 나타나 뒤늦게 신원을 확인시켜 줘 가까스로 풀려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청소년 개척단 수용자들은 매일 줄지 않고 늘었다. 처음 50명으로 시작한 청소년 개척단은 이후 남녀를 모두 합쳐 3천여 명으로 불어날 만큼 규모가 커졌다. 수용자들 중 100여 명이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래도 수용자 수는 급속도로 불어났다. 매일 사회에서 방황하는 이들은 이곳으로 실어 왔기 때문이다. 한 번에 200명씩이나 이곳으로 이송(?)된 적도 있다. 청소년 개척단은 아침에 점호를 하고 구보를 한 뒤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는 등 철저히 군대처럼 움직였고 자체 감시원을 둬 서로를 감시하기도 했다. 건장한 감시원 60명이 20명씩 3교대로 강제 이주자를 24시간 감시했는데 탈출을 하다 붙잡힐 경우에는 무차별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청소년 개척단은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연일 이 청소년 개척단 수용자들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서산에서 농경지를 일구며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이 보도에 감동한 젊은이들이 언론사로 찾아가 “나도 서산으로 보내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기사 이미지

청소년 개척단은 이렇게 매년 합동 결혼식을 열었다. 시립부녀보호지도소생과도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었다.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그들에게서 피어난 축구에 대한 희망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수용자들이었지만 이 와중에도 이들은 서서히 이곳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청소년 개척단이 창설되고 1년 뒤인 1962년 11월 수용자들 125쌍의 합동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은 청소년 개척단에서 강제로 짝을 맺어준 이들이었지만 이들에게 가족이 생겼다는 건 큰 의미였다. 이들은 이때부터 척박한 땅에서 부부의 연을 맺고 가족이 돼 갯벌을 농지로 메우는 일에 몰두했다. 농지를 가꾸면서도 이들은 아주 작은 희망을 품었다. 바로 축구였다. 그나마 여럿이 모여 할 수 있는 놀이라고는 다 떨어진 공 하나를 우르르 모여 차는 일뿐이었다. 고된 노동 후에도 공을 차는 시간 만큼은 힘든 줄 몰랐다. 그렇게 수용자들은 축구에 대한 열망 하나 만으로 농지를 메우면서도 작은 운동장 하나를 만들었다. 축구를 제대로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희망 없는 감옥과도 같은 곳에서 수용자들은 가족을 꾸리고 축구를 하며 그나마 하루 하루를 버텨 나갔다.

수용자 중에서는 사회에 있을 때 공 좀 찬다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가정 형편이 좋지 못하거나 보살핌을 받지 못해 축구선수로의 꿈을 키우지는 못하고 방황했지만 재능 만큼은 뛰어난 이들이 즐비했다. 이들은 이때부터 지옥과도 같은 청소년 개척단 생활의 스트레스를 축구로 풀기 시작했다. 사회에 있을 때는 축구에 관심이 없던 여성들도 유일하게 수용자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축구 응원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청소년 개척단 수용자들이 민정식 단장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됐다. “정식으로 축구팀을 만들 수 있게 해주세요.” 다소 황당한 부탁이었지만 민정식 단장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이를 허락했다. 언론에 좋은 이미지로 알려지고 있는 청소년 개척단을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청소년 개척단은 고된 노동이 끝난 시간에 모여 정식으로 훈련을 할 수 있게 됐다. 비록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쉴 곳도 없이 천막 생활을 하는 이들이었지만 함께 발을 맞추면서 축구 실력은 날로 늘어갔다. 이제 정식 대회에 나설 수 있다는 기대도 생겼다.

청소년 개척단 축구팀은 창단 초기 충남 지역에서 최약체로 손꼽혔다. 경기에서 지는 날이면 민정식 단장이 관중이 다 보는 앞에서 선수들의 뺨을 때리고 ‘빠따’를 들고 구타하는 일도 잦았다. 제대로 된 지원도 없었지만 그래도 경기에서 패하면 그 분을 참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청소년 개척단 축구팀은 충남 지역에서 점점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발이 맞아가면서 성적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1965년에는 충남 지역에서나 이름을 조금 알리던 수준에서 벗어나 충남대표로 전국체전에 참가하기도 했고 청소년 개척단의 에이스 최인열은 공병학교와 대전상고 위주로 구성된 충남 대표에 당당히 선발돼 전국시도대항청소년축구대회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워낙 축구에 대한 열망이 가득찬 이들이 많아 선수단을 A팀과 B팀으로 나눠 A팀은 전국 규모 대회에 나섰고 B팀은 지역 대회에 나설 만큼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게 됐다. 청소년 개척단의 실력은 날로 성장했고 그들의 인지도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최전성기 축구단이 해체되기까지

1965년은 청소년 개척단의 최전성기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충남 대표 자격을 얻었고 대표 선수까지 배출했기 때문이다. 비록 제19회 전국종합축구선수권대회에서 경희대에 0-11로 대패하기도 했지만 노숙자라는 이유로, 전과자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격리돼 강제로 수용소나 나름 없는 시설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전국 대회에 나서 당당히 맞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넝마주이 축구단’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이렇게 청소년 개척단 축구팀은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조금씩 성장해 나가고 있었고 수용자들은 축구를 통해 그나마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심지어 청소년 개척단 텐트촌에서 친선 경기를 펼쳐 다른 팀 축구선수들이 이 텐트촌으로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경계가 삼엄한 당시 상황을 감안한다면 축구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청소년 개척단은 어느덧 충남 지역의 강호로 인식되고 있었고 군내 체육대회를 하면 인지면 대표로 이들이 대거 참가해 압도적인 축구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이 축구팀은 1966년 9월 해체되고 말았다. 정부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시작한 이 사업을 접어 버렸기 때문이다. 강제적으로 집단 이주까지 하며 시작한 사업치고는 끝이 너무 허무했다. 당시로는 큰 돈인 8천여 만원의 막대한 손실이 있었고 결국 정부가 관리권을 서산군수에게 넘겨 버리고 만 것이다. 여기에 민간인인 민정식 단장과 정부가 서로 책임을 회피하는 등 그 누구도 청소년 개척단의 운영 주체라고 자처하지 않았다. 5년 동안 총 350커플이 이 안에서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렸지만 이들은 비가 새는 천막에서 보리죽을 끓여 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다. 민정식 단장은 청소년 개척단이 문을 닫을 당시 이렇게 말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던 것이니 미련은 없다. 정부에서 전적으로 책임질 문제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 결국 이제 막 주가를 올리려던 청소년 개척단 축구팀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반강제 이주 정책이 끝났다는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어렵게 시작한 축구팀이 하루 아침에 해체됐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이들이 무려 5년 동안 개간한 토지만 하더라도 약 80만 평에 이른다. 5년 동안 마땅한 장비도 없이 직접 손으로 메운 토지가 이만큼이나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청소년 개척단이 문을 닫은 이후로 대부분은 이곳을 떠났고 남은 이들은 몇 없었다. 서순군수가 세대당 3천여 평씩을 무상으로 분배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분배’였다. 목숨을 걸고 죽어라 일을 해 이 땅을 실제로 손에 넣은 이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곧바로 자유를 찾아 떠나면서 청소년 개척단에서의 생활을 빨리 잊으려 했지만 265세대는 정부를 상대로 기나긴 싸움에 들어갔다. 하지만 5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까지도 이들에 대한 국가의 보상은 극히 부족한 상황이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지난 2011년 당시 개간에 참여한 이들의 요구대로 개량비를 인정하라는 의견표명을 했지만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는 아직까지도 권익위원회의 의견표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런 사이 당시 강제 이주해 목숨을 걸고 일을 했던 이들은 대부분 노령으로 기나긴 싸움을 포기하고 있다.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자

이제는 과거 청소년 개척단 텐트촌의 운동장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너른 밭이 펼쳐져 있다. 아마 아무도 이곳이 그 누군가의 꿈을 위한 축구장이었다는 걸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또한 청소년 개척단과 관련한 자료도 극히 적다. 서산시청에도 청소년 개척단과 관련한 자료는 없고 정부에서도 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료가 없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취재를 위해 여러 곳에 자료를 요청했지만 청소년 개척단과 관련해 처음 들어본다는 답변을 가장 많이 들었다. 그 누구도 청소년 개척단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니, 군사독재 시절 우리의 부끄러웠던 강제 이주와 노동 탄압, 그리고 그 와중에 창단된 축구팀의 존재 자체는 이 땅에 흔적조차 남아있질 않다. 아픈 과거도 다 우리의 역사인데 한 번쯤은 청소년 개척단과 그들의 축구팀에 관해서도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한다. 가족 없이 거리를 떠돈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을 받으며 황량한 갯벌로 강제 이주해야 했던 이들에게 축구란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 아니었을까. 지금껏 이런 사실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한 후대로서 청소년 개척단으로 인해 고통 받은 많은 이들에게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