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시사 토크 프로그램을 보는데 한 시사평론가가 아들을 호되게 질책했다고 했다. 이유는 현 상황에 대해 아들이 마음이 맞는 또래 젊은이들과 함께 성명서를 냈는데 아버지인 시사평론가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왜일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다른 정치적인 현안에 관심을 둬서일까. 아니다. 밖에 나가 시위하며 몸으로 맞서 싸워야 할 나이에 한가롭게 성명서나 적는 아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나 역시 크게 동감했다. 부딪히고 싸워 목소리를 내야 할 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성명서라는 편한 방법을 택하기 시작한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성명서를 냈다고 해 기득권 세력이 여기에 응답하거나 사죄하는 일 따위도 본 적이 없어서 더더욱 그렇다. 따뜻한 방안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성명서를 타자로 치고 있는 건 추운 거리로 나가 싸우고 부딪혀 얻어내야 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큰 사치다.

축구계에도 넘쳐나는 성명서들

최근 축구계에도 성명서가 넘쳐나고 있다. 최근 5년 동안 축구계에서 발표된 성명서만 해도 수두룩하다. 울산현대의 홈 경기 서산 개최에 반대하는 울산 서포터스 성명서, 이회택 기술위원장이 대표팀 감독 권한을 침범한다고 밝힌 조광래 감독의 성명서, 구단 경영 정상화를 촉구하는 강원 서포터스의 성명서, R리그 축소와 폐지에 반발하는 대학축구 지도자들의 성명서, 승강제 도입에 반대한다는 K리그 6개 시도민구단의 성명서, 안양시민축구단 창단을 지지하는 이들의 성명서, 신태용 감독과의 면담을 요구한다는 성남 서포터스의 성명서, 고양국민은행의 흡수 및 통합 논란에 대한 안양 서포터스의 성명서, 김재하 단장 사의 반대를 주장하는 대구 서포터스의 성명서, 페트코비치 감독 계약해지와 조광래 감독 복귀를 요구하는 경남 서포터스 성명서, 성남시민구단 전환을 요구하는 성남 팬들의 성명서, 황보관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붉은악마 성명서, 낙하산 인사 반대의 주장을 담은 안양 서포터스 성명서, 청춘FC와의 경기를 반대하는 K리그 챌린지 7개 구단 서포터스의 성명서 등이 최근 5년간 발표된 성명서다.

여기에 최근 경남 서포터스 연합회가 홍준표 구단주가 도민 앞에 사죄하고 박치근 대표이사를 경질하라는 주장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말 그대로 ‘성명서 홍수시대’다. 물론 나는 축구 칼럼을 쓰는 입장에서 이들의 목소리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 중이고 대다수 성명서에도 그들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성명서의 효력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성명서가 사과를 요구하거나 책임을 지라는 내용이거나 아니면 장기적인 ‘플랜’을 제시하라는 내용 등이 들어가 있는데 이 성명서에 움찔해 반응을 보이는 기득권 세력을 지금까지 본 적은 없다. 성명서는 말 그대로 글을 통해 주장을 전달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는 어렵다. 그저 칼럼으로 “내 주장은 이러하니 이런 식으로도 한 번 생각을 해주세요”가 아니라 성명서를 내는 이들은 “꼭 바꿔야 한다”고 강력하게 의견을 전달해야 하는데 그 방식으로는 성명서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의 간절함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와중에도 폼나고 편한 성명서 발표가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앞서 시사평론가가 이야기 한 것처럼 부딪히고 싸워 내 주장을 관철시키려면 거리로 나와야 한다. 내 말이 폭력 시위를 조장하는 게 아니라는 건 다들 알 것이다. 같은 의견을 가진 이들이 거리로 나와 함께 구호를 외치고 피켓을 들고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의견을 내면 된다. 그게 성명서 수백 장보다도 훨씬 더 큰 효과다. 기득권 세력이 수백 장의 성명서보다도 더 무서워하는 게 바로 내 눈 앞에 모여 있는 성난 민심이라는 거다.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우리 입장은 이러니 너희가 사과하라. 재발 방지를 약속하라. 장기적인 플랜을 제시하라”고 해봤자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수천, 수백 명이 모이면 더 좋겠지만 나 혼자의 목소리라도 거리로 나가 이걸 대중들에게 알리고 기득권 세력에게 항의하는 게 훨씬 더 현명한 방법이다. 추운 겨울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애처롭고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기득권 세력이 부당하게 가진 걸 포기하게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별로 없다는 걸 다들 잘 알지 않는가. 또한 이건 어디까지나 사족인 이야기지만 언론에서 현안을 보도할 때 거리로 나와 시위하는 이들은 보도용 사진이라도 있지 성명서만 달랑 발표하면 쓸 자료화면도 없다.

추워도 거리로 나와 목소리 내야한다

앞서 성명서를 냈다고 언급한 단체 중 실제로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목소리를 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성남 서포터스가 시민구단 전환을 주장할 때 성남 팬들을 비롯한 여러 구단 팬들이 거리로 나와 함께 했고 안양 서포터스도 창단 촉구 성명서 이후 창단 궐기대회를 거리에서 진행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성명서를 내고 이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답변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일이 마무리 됐고 성명서를 낸 측에서 원하는 결과를 낸 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성남시민축구단 전환 궐기대회와 안양 구단 창단 촉구 궐기대회에 모두 참여했었는데 이게 성명서 몇 줄 보다 훨씬 더 큰 파급력이 있다는 걸 몸소 느끼기도 했다.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도 관심을 가졌고 언론도 이를 더 크게 보도했으며 결국에는 여론이 움직여 원하는 바를 이뤄낸 것이다. 2006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연고이전 반대 항의 시위가 펼쳐졌을 때도 나 역시 그 자리에서 함께 목소리를 냈다. 비록 당시 부천SK의 연고이전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리던 “연고이전 반대”라는 목소리는 축구계에 더 이상 연고이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거리로 나와야 한다. 백날 성명서를 내 “사과하라”고 해봤자 이건 그저 온라인에서 수 없이 오고가는 글에 지나지 않는다. 나 역시 이번 경남 서포터스 연합회의 성명서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앞서 칼럼에서도 언급했듯 경남FC는 구단주부터 팀에 대한 애정과 노력이 부족했고 낙하산 인사를 통해 팀이 점점 망가지고 말았다.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고 팀이 정상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성명서 몇 줄로 그 동안 많은 걸 누렸던 기득권 세력이 잔뜩 겁을 먹고 모든 걸 포기할까. 이미 정치적으로 고단수인 그들은 이런 성명서 몇 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경남FC가 제대로 돌아가길 진심으로 바라는 이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높여야 이야기를 들을까 말까다. 나는 고양국민은행의 승격 거부 당시와 K리그가 승부조작 선수들의 징계 감면을 논할 때 두 번의 일인시위를 한 적이 있었다. 주위에서는 특히 두 번째 일인시위 당시 “칼럼니스트는 글로서 말해야지 왜 네가 거리로 나가느냐”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당시 칼럼니스트라는 신분보다는 한 명의 축구팬으로서 기득권 세력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축구회관 앞에 가 피켓을 들었다.

물론 내 의사가 반영된 건 아니겠지만 결국 K리그에서는 승부조작 가담자들의 징계 감면 계획을 철회했다. 당시 피켓을 들고 서 있던 내 앞을 지나가던 여러 축구계 인사들은 내 어깨를 두드려 주거나 악수를 하며 “고생이 많다. 이해한다”고 했다. 그들도 내가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기득권 세력에 대항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거리로 나가야 한다는 거다.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이들의 성명서를 일일이 읽어보지도 않을뿐더러 아예 관심도 없다. 자기들 눈 앞에서 피켓을 들거나 구호를 외쳐야 이 공허한 외침을 들을까 말까다. 이미 기력이 다해 더 이상 거리로 나가지 못할 어르신들이 아니라면 젊은 나이에 기득권 세력에 맞서 거리에서 목소리 높여 무언가를 외치는 건 젊은이들의 특권이기도 하지 않은가. 물론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다시 하는 말이지만 이게 폭력 시위를 조장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같은 의견을 가진 이들이 거리에 모여 정당한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는 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얼마든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믿는다. 어느 순간부터 부당한 일이 생기면 거리로 뛰쳐 나와 싸우는 게 아니라 컴퓨터 앞으로 가 자판을 두드리는 세상이 됐다는 게 참으로 아쉽다.

싸울 수 있으니 청춘이다

이번에 성명서를 낸 경남 서포터스 연합회를 성토하는 칼럼이 아니다. 나는 그들을 지지한다. 또한 그들이 성명서를 내고 분명히 오프라인에서의 움직임도 시작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경남 서포터스 연합회를 지칭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근래 들어 ‘성명서 만능주의’가 세상이 된 게 다소 아쉽다는 거다. 성명서를 낭독하는 것 역시 함께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와 있을 때 해야 진정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마치 보도자료를 보내듯 컴퓨터 앞에 앉아 성명서만으로 의견을 주장하고 관철하려 한다면 그건 기득권 세력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일 아닌가. 가까운 곳에서 기득권 세력에 대항해 한국 축구가 발전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는 약자들이 있다면 나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곧장 달려가 언제나 함께할 생각이다. 또한 조금 먼 곳에서 이렇게 투쟁하는 이들이 있다면 어떻게든 많은 독자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다. 이런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 거리로 나와야 한국 축구가 밥그릇 싸움에만 혈안인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제 성명서로 기득권 세력을 압박하는 대신 거리로 함께 나오지 않겠나. 컴퓨터 앞 자판이 편하기는 하지만 이런 성명서 글 몇 줄에 기득권 세력이 부당하게 취하는 이득을 놓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희대의 헛소리지만 나는 “싸울 수 있으니 청춘이다”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