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가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축구팬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소개할 인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알려진 바가 없다.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 올스타팀’을 만들어 낸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오늘 이야기에는 친일과 종북에 관한 다소 민감한 내용도 있지만 절대 그들을 미화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알린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하면서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에 대해 전달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럼 지금부터 ‘원조 만수르’ 백명곤과 조선축구단, 그리고 여기에 더불어 한국 재즈의 초창기 역사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축구와 재즈가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한국 축구와 한국 재즈에는 묘한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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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서울 거리 모습. 이 한적한 거리에서 스포츠카를 타고 돌아다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백명곤이었다.

호남의 대부호 아들로 태어난 백명곤의 사치

1858년 출생한 백남신은 1893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대궐에서 사용되는 물품의 구입을 담당하는 등 잘 나가는 인물이었다. 전주진위대의 향관을 겸하여 군량 및 군수물자를 조달했고 축적한 부를 이용해 토지를 사들이거나 사채업에 이용하며 전라도의 부호가 됐다. 관직에서 물러난 1905년 이후에는 농장형태의 농업 경영을 통해 더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그의 아들 백인기 또한 무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1903년 대한제국의 육군 참위로 임관한 뒤 이후 금융인으로 변신해 한일은행을 설립하는 등 잘 나가는 금융인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백남신과 백인기는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을 주도하거나 감사를 지냈다는 등의 이유로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함께 포함됐다.

백남신의 손자이자 백인기의 아들인 백명곤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당시 철 없는 재벌 3세(?)로 방탕한 생활을 했다. 집에 넘쳐나는 게 돈이었던 백명곤은 호화로운 생활로 호남 지역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아버지 백인기가 하루는 백명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선에 남아서 그렇게 한량처럼 살 바에는 외국으로 나가 견문을 넓히도록 하라.” 말이 좋아 유학이지 사실은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들이 해외에 나가면 돈을 좀 덜 쓸까 싶은 마음에 권한 것이었다. 그 길로 백명곤은 일본을 거쳐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물론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자였던 백명곤은 유학도 혼자 떠나지 않았다. 그는 몸종 한 명을 데리고 그렇게 일본과 독일을 경험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백명곤의 몸종이었던 이가 훗날 화가로 이름을 날린 배운성이었다는 점이다. 백명곤의 유학 길에 몸종으로 동행했다가 유럽에서 미술을 공부한 배운성은 이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초대 학부장 등을 지내다가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월북했다. 김일성의 판화 초상화를 처음 제작한 것도 배운성이었다.

이념을 떠나 그가 한국인 최초로 유럽 지역에서 미술을 공부하며 실력을 키운 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배운성은 월북 화가라는 이유로 미술계에서는 오랜 시간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 됐지만 1988년 월북 예술인 해금 조치 이후에야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후 유럽 시절 작품이 발굴돼 소개되며 여전히 미술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몸종 배운성이 유럽에서 열심히 미술을 공부하는 동안에도 백명곤은 별로 변한 게 없었다. 3년 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방탕하게 살았다. 1920년대에 스포츠카를 타고 서울 시내를 누볐으니 지금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부자에 낭비벽도 대단했다. 스포츠카를 타지 않는 날에는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거리를 질주했다. 그냥 평범한 자가용도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던 시대에 스포츠카와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는 엄청난 사치였다. 유학을 다녀오면 좀 철이 들까 싶었지만 아버지 백인기의 기대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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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원정을 떠나기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조선축구단 선수들의 모습.

해체 위기의 불교청년회, 그때 등장한 백명곤

비슷한 시기 서울을 연고로 하는 축구팀이 창단됐다. 현재의 휘문고등학교인 휘문의숙 출신 스님들이 주축이 된 이 팀은 불교청년회 축구단이라는 이름으로 1917년 창단했다. 창단 초기 불교청년회는 전조선축구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했고 세 번의 준우승을 차지하며 일약 강팀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서울을 연고로 한 불교청년회는 평양을 연고로 한 무오축구단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는데 이를 이후 내려져 온 경평축구단의 효시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더군다나 평양 무오축구단은 숭실대학을 졸업하고 전도사가 된 박종은에 의해 창단된 팀으로 서울과 평양, 불교와 기독교라는 라이벌의 성격을 제대로 갖춘 채 경쟁했다. 하지만 불교청년회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8년 동안 버텼지만 1925년 4월 해체의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됐다. 서울을 대표하는 팀이 이렇게 사라질 운명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 한 인물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 팀을 제가 살리겠습니다.” 바로 조선 최고의 부호이자 사치스럽기로는 으뜸인 백명곤이었다. ‘원조 만수르’의 등장이었다. 평소 축구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백명곤은 불교청년회 이건표 감독과 협의한 끝에 이 팀을 그대로 자기가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불교청년회 선수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역사까지도 계승하며 이름을 조선축구단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명맥이 끊길 뻔한 서울 연고의 축구팀이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아니, 백명곤이 손을 쓰면서 조선축구단은 국가대표 수준의 팀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현재 낙원상가 일대인 백명곤의 으리으리한 집이 곧장 조선축구단 선수들의 합숙소로 변신했고 선수들에게는 월급까지 주며 축구에 집중하도록 했다. 이전까지 구락부 성격의 팀만으로 유지되거나 학교 동문 위주로 운영되던 조선 축구계에서 실력 있는 선수를 스카우트하고 월급을 쥐어주는 실질적인 최초의 프로팀이 바로 조선축구단이었다. 조선축구단은 재출범 후 곧바로 열린 제6회 전조선축구대회에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했고 7개월 뒤에는 평양기독청년회 주최의 전조선축구대회 결승에서 평양의 무오축구단을 꺾고 또 다시 우승을 차지하며 기세를 올렸다.

대중교통은커녕 직접 걸어서 경기장까지 가야 했던 다른 팀과는 달리 조선축구단은 부자구단으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검은색 승용차가 경기장 출입구에 등장했고 선수들이 여기에서 내리면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감탄했다.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승용차가 놀라웠고 여기에서 멋지게 차려 입은 선수들이 내리는 게 신기했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나면 백명곤은 다시 승용차를 경기장 앞에 대기시켜 놓았다가 기사를 시켜 선수들을 자신의 집이자 합숙소로 불렀다. 그런데 선수들은 또 다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 요리사가 직접 선수들을 위한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껏 드세요. 오늘 경기 좋았습니다.” 백명곤의 씀씀이는 다른 팀의 단장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몇몇 선수들은 평생 처음 경험해 보는 중식을 너무 과하게 먹어 “몸이 둔해졌다”고 할 정도였다. 백명곤은 가친 재산의 일부만으로도 조선축구단을 ‘모든 선수들이 오고 싶어하는 팀’으로 만들었다. ‘원조 만수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백명곤은 늘 중국인 요리사를 대기시켜 놓고 있다가 선수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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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재즈 밴드를 결성한 백명곤(맨 왼쪽)을 비롯한 이들의 모습.

백명곤의 조선축구단, 그리고 한국 재즈

백명곤은 단장 신분으로 1925년 조선축구단과 함께 중국 상하이 원정을 떠났다. 물론 원정 일체의 비용은 백명곤이 부담했다. 그런데 백명곤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때 무언가 신기한 걸 가지고 돌아왔다. 색소폰과 트럼본, 트럼펫, 드럼 등 악기와 재즈 악보였다. 그리고는 평소 친분이 있던 홍난파와 훗날 초대 의사협회 회장인된 박건원 등을 불러 악기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색소폰도 불어보고 트럼본도 불어보며 음악에도 몰두했다. 그리고는 서로 마음을 합쳤다. “우리가 한 번 악단을 만들어보면 좋겠어.” 그렇게 해 제1색소폰에 백명곤, 피아노에 홍난파, 트럼본에 박건원, 보컬 이인선 등 8인조로 된 악단이 탄생했는데 이게 바로 한국 최초의 재즈 악단인 코리안 재즈 밴드의 탄생이었다. 백명곤이 조선축구단 단장으로 상하이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재즈가 이 땅에 도입되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방식도 달라졌을 것이다. 축구와 재즈는 그리 많은 공통점이 있어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한국 축구사와 한국 재즈사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론 그 연결고리는 백명곤이었다. 백명곤이 결성한 이 코리안 재즈 밴드가 1926년 2월 종로 청년회간에서 연 재즈 연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 연주로 기록돼 있다.

1926년에는 조선축구단이 일본 원정을 계획했는데 당시 모든 원정 경비 역시 백명곤이 부담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당시로서는 평생 한 번 입어보기도 어려웠던 양복을 모든 선수들에게 맞춰준 것이었다. 그것도 초고가의 영국제 홈스펀 양복이었다. 조선축구단 선수들은 최고급 양복을 단복으로 맞춰 입고 일본 원정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 비용을 모두 댄 백명곤은 정작 원정길에 동행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백명곤이 아버지 명의로 된 어음으로 몰래 돈을 조달했다가 아버지에게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백명곤은 일본 원정을 떠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걱정 말고 가서 이기고 돌아오라.” 철없는(?) 백명곤의 막대한 투자에 보답이라도 하듯 조선축구단은 일본 원정에서 5승 3무라는 대단한 성적을 내고 돌아왔다. 이후 크리스마스가 되자 백명곤은 자신의 집에 선수들을 불러 놓고 산타클로스 분장을 직접 한 뒤 비싼 선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수십 명의 기생도 그 자리에 함께했고 백명곤이 직접 코리안 재즈 밴드와 함께 연주를 하기도 했다.

이후 백명곤은 1927년 1월 직접 조선축구단 감독을 맡아 경성역을 출발해 부산으로 가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다시 그곳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갔다. 꼬박 닷새가 걸리는 여정이었고 물론 모든 경비를 백명곤이 댔다. 그렇게 치른 중국 상하이 원정에서 조선축구단은 영국 육군 팀과의 3차례 대결을 펼쳐 2승 1패를 기록했다. 첫 경기는 3-4으로 패했지만 이후 두 경기에서는 각각 4-3, 5-4 승리를 따냈다. 이 대결은 체격이 월등한 서양 축구를 경험할 수 있는 귀중한 토대가 됐다. 조선축구단은 백명곤과 함께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던 백명곤은 벌여놓은 사업이 실패하면서 결국 파산하고 말았고 그 사이 서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경성축구단이 창단되면서 좋은 선수들이 대거 경성축구단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면서 조선축구단도 1935년 영광스러웠던 역사를 뒤로하고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조선축구단은 백명곤의 과감한 투자와 함께 뻗어나갔지만 결국 백명곤이 힘을 잃게 되면서 그들의 찬란했던 역사로 이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백명곤을 미화할 생각은 없다. 그는 대단히 사치스러운 인물이었고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친일파로 분류돼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행적 자체까지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또한 한국 축구사와 한국 재즈사에는 상당한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사실 또한 상당히 흥미롭다.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지만 ‘원조 만수르’ 백명곤이 한국 축구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