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전이 부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같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축구라면 최고를 자부하던 서울과 평양이 다시 격돌하는 모습은 우리 모두의 바람이다.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에 대한 이야기는 과거 칼럼을 통해 몇 차례 해온 적이 있고 축구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이 팀들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팀 못지 않은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이 두 팀에 비해 조명 받지 못한 팀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오늘은 경성과 평양이 조선 축구를 양분하던 시기 화려하게 등장했던 바로 그 팀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우리에게는 냉면으로 유명한 곳, 바로 함경남도 함흥에 있던 그 축구팀 함흥축구단에 관한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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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3도시대항전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기념 촬영을 하는 함흥축구단의 모습.

경성과 평양에 도전장 내민 함흥축구단

1925년 평양에서 관서체육회가 출범하면서 이북 지역 스포츠가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축구와 정구, 탁구, 수영, 배구, 농구 등 다양한 스포츠를 묶어 관리하는 관서체육회 출범은 평양을 스포츠에 강한 도시로 이끌기 시작했다. 1928년 평양에 기반을 둔 숭실중학이 전일본중등학교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평양은 한반도는 물론 일본까지 포함해 가장 축구를 잘하는 곳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평양의 축구가 발전하는 동안 함경남도 함흥은 축구 열기에 비해 인프라가 부족했다. 일본인으로만 구성된 야구팀과 한국인과 일본인이 반반 섞인 럭비팀이 존재하긴 했지만 일본색이 짙어 지역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훗날 국제심판 1호로 이름을 날린 김덕준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 팀들이 경기를 할 때마다 ‘한국 속의 일본’이 판치는 모습이었다.”

당시 경성과 평양은 이미 뜨거운 열기를 뿜는 경평전을 열며 축구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 단장을 만난 이가 있었다. 바로 의사로 함흥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김명학이었다. “우리도 더해 세 개 도시대항 축구대회를 개최합시다.” 김명학은 이 자리에서 함흥도 경성과 평양과 더불어 축구대회에 참가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1920년대부터 펼쳐진 경평전은 승부욕이 워낙 대단해 마찰을 일으키다가 1935년을 끝으로 잠정 중단된 상황이었다. 여기에 함흥을 포함시키면 과열된 분위기도 어느 정도 잦아들 것이라는 게 김명학의 주장이었다. 이 시기 함흥은 지역 내에 있는 영생고등보통학교와 함흥고등보통학교 올스타(?)를 선발해 서울에서 열린 조선신궁경기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성인 축구단 창단에 대한 열기도 서서히 달아올랐다.

김명학은 3도시대항축구전을 제안한 뒤 곧바로 함흥체육회 활동을 하며 알게된 이성주에게 손을 뻗쳤다. 이성주는 당시 함흥 지역에서 양조장을 크게 운영하는 부자 중의 부자였다. 축구단 창단을 위해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만수르에게 손을 뻗은 셈이다. 그러자 이성주도 흔쾌히 이에 동의했다. 경성과 평양에 버금가는 축구 열기를 자랑하면서도 변변한 성인팀 하나 없던 함흥을 위해 팀 창단을 함께하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창단은 쉽지 않았다. 성인팀으로 끌어올만한 지역내 선수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함흥 지역에서 자격을 갖춘 선수들을 다 끌어 모았지만 채 11명도 갖출 수가 없었다. 결국 이들은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에서 출전하지 못하고 있는 어린 후보 선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경성축구단에서는 오의근과 정국진 등을 데려왔고 평양축구단에서는 차순옥과 옥정빈 등이 선택을 받았다. 경성축구단의 간판이었던 김성간도 어렵게 모셔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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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가대표로도 활약한 이유형(맨 오른쪽)은 함흥축구단을 강팀으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의 대단한 경기력과 관중의 열기

하지만 감독을 맡을 인물이 마땅히 없었다. 고민하던 김명학은 당시 조선축구협회 여운형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창단팀을 이끌 감독을 좀 소개해 주세요.” 그러자 여운형 회장은 곧바로 이유형을 소개했다. 이유형은 당시 경성축구단과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던 슈퍼스타였다. 일본 무대까지 경험한 그에게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당시 이유형은 신생팀 지도자로 가는 게 걱정스러워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랜 친구 김용식의 집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함흥축구단에서 오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어?” 그러자 김용식은 주저 없이 답했다. “네가 가서 그 팀을 강하게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결국 고민하던 이유형은 김용식의 조언을 듣고 전격적으로 함흥행을 확정지었다. 이렇게 최고의 지도자와 선수들이 함께 모여 1938년 6월 20일 함흥시 군영통에 있는 김명학의 외과병원에서 함흥축구단이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게 됐다.

이유형 코치는 선수들에게 영생중학 운동장을 지칠 때까지 뛰게 했고 짧은 패스 위주의 경기를 지시했다. 그렇게 넉 달 가량 발을 맞춘 함흥축구단은 1938년 10월 그토록 기다리던 제1회 3도시대항축구전에 나서게 됐다. 경성과 평양 등 한반도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고 가장 축구 열기가 뜨거운 팀과의 맞대결이 펼쳐진 것이다. 신생팀 함흥축구단으로서는 참가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러운 대회였다. 하지만 함흥축구단은 믿을 수 없는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평양과 경성을 연달아 제압하며 초대 챔피언에 오른 것이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한 달 뒤 열린 FA컵의 전신인 전조선종합축구대회에 출전해서도 또 다시 결승에서 경성축구단을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었다. 신생팀이 전국 최강으로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우승을 거두고 1938년 11월 5일 오후 5시 선수단이 열차를 타고 함흥역에 도착하자 역에는 이미 수백 명의 시민이 나와 이들을 환영했고 곧바로 함흥관으로 가 성대한 환영회를 열 었다. 함흥은 축구의 열기로 뒤덮였다.

함흥축구단은 늘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끼리 모여 경기 내용을 놓고 토론을 할 정도로 다들 주인 의식이 강했다.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보다는 축구를 놓고 토론하며 밤을 새울 만큼 서로를 존중했고 축구를 아꼈다. 또한 이성주는 선수들을 자신들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시킨 뒤 하루 6시간의 훈련을 보장한 건 물론 월급 이외의 수당 지급과 일주일에 갈비 회식을 한 번씩 제공하는 파격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 함흥공설운동장에서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3만 명 수용의 경기장이 관중으로 꽉 들어찰 정도로 열기도 대단했다. 함흥축구단 경기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인해 시내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질 않았다. 선수들의 책임 의식과 전폭적인 구단의 지원, 그리고 지역민의 뜨거운 성원까지 등에 업은 함흥축구단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 조선 축구를 양분해 온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도 더 이상 함흥축구단을 얕볼 수가 없었다. 아니, 함흥축구단은 짧은 시간 그들을 추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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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에 나선 경성축구단의 모습. 경성축구단에 이어 1939년과 1940년에는 함흥축구단이 이 대회에서 2연패를 차지했다.

함흥축구단, 일본을 제패하다

함흥축구단의 대활약은 여기에서 멈추질 않았다. 1939년 일본에서 열린 명치신궁경기대회(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에 나선 함흥축구단은 첫 경기에서 8-0 대승을 거두더니 두 번째 경기에서는 관서학원을 5-0으로 대파했다. 당시 함흥축구단 플레잉코치인 이유형은 결승을 앞두고 고국으로 긴장된 마음을 담아 보냈다. “지금 동경은 방공 훈련으로 밤이면 밖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숙소에서 경기 준비에 대한 이야기만을 나누며 긴장된 생활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의 기대를 어기지 않고 우리의 숙망을 달성하려 합니다.”하지만 결승 상대는 일본 축구계 최강자인 게이오대학이었다. 당시 게이오대학은 전년도 연희전문을 4-0으로 크게 이길 만큼 대단한 강팀이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함흥축구단은 게이오대학을 무려 3-0이라는 믿기지 않는 점수차로 제압하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935년 경성축구단에 이어 명치신궁에서 우승을 거둔 조선팀으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듬해 열린 명치신궁대회에서도 함흥축구단은 무려 23득점 무실점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4전 전승하며 또 다시 우승 트로피를 지켜냈다. 한반도는 물론 일본에서도 함흥축구단을 당해낼 팀은 없었다. 그러자 일본은 아예 이듬해부터 함흥축구단이 대회에 나서지 못하도록 규정을 바꿔버렸다. 지역 연고팀 출전을 금지시키고 단일 실업팀만을 출전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함흥축구단의 대회 3연패를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비록 함흥축구단은 규정 변경으로 이후 대회에 나설 수 없게 됐지만 2연패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함흥축구단은 불참한 제2회 3도시대항축구전과 중단됐던 제3회 3도시대항축구전을 건너 뛰고 제4회 3도시대항축구전에서는 평양과 공동 우승을 차지하더니 제5회 3도시대항축구전에서는 또 다시 단독 우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는 말 그대로 함흥축구단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함흥축구단은 여기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1942년 일본이 조선축구협회를 자신들의 조종이 가능한 조선체육진흥회로 흡수하려고 하자 조선축구협회가 이 명령에 불복하며 해산하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1942년 11월 일본은 아예 조선 내에서 구기 종목 금지 조치를 내리며 모든 구기 스포츠의 활동을 차단해 버렸다. 결국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성장하던 함흥축구단 역시 다른 축구단과 함께 1942년 11월을 기점으로 강제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강렬하고도 찬란한 4년을 보낸 함흥축구단은 이렇게 일본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함흥축구단의 성적이 대단했음에도 그들이 경성축구단이나 평양축구단보다 한국 축구사에서 언급이 덜 되는 건 아마도 활동 시기가 너무나도 짧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찌 됐건 조선의 신흥 강호는 이렇게 짧고 굵게 활약한 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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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렇게 함흥축구단은 그 명맥만을 근근이 유지하고 있다. (사진=FC함경남도)

짧지만 강렬했던 함흥축구단의 발자취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을 맞았지만 우리는 이후에도 가슴 아픈 민족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나면서 함흥축구단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잊게 됐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함흥축구단이 다시 뭉친 적이 있었다. 6.25 이후 월남한 함흥축구단 선수들이 1964년 8월 일시적으로 팀을 결성한 것이었다. 1930~40년대 열렸던 3도시대항축구전이 잠깐 재개된 것이었다. 1964년 8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단장은 여전히 김명학이 맡고 있었고 이유형은 코치로 다시 선수들을 지휘했다. 옥정빈과 정국진, 차순종 등 1930~40년대 그라운드를 펄펄 누비던 이들도 모두 모였다. 하지만 이들은 어느덧 배 나온 아저씨가 돼 있었다. 치열하게 승패를 놓고 다투는 경기가 아니라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 그리고 함흥축구단을 추억하는 이들이 모여 치르는 친선경기 형태였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생업에 종사하게 됐다. 1년에 한 번 서울에서 모여 추억을 되새기는 게 이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데 2003년 의미 있는 일이 벌어졌다. 함흥축구단을 이어 받은 함경남도축구단이 실향민 2,3세 위주로 재창단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한축구협회 등록 이종클럽 대회인 코니그린컵에 참가하는 등 뜻 깊은 행보를 이어 나갔다. 지금은 왕성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실향민 3세는 물론 4세까지도 함께 어울리며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함흥축구단을 그리워하던 실향민 2세들도 어느덧 나이를 먹고 그 시절의 기억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함흥축구단은 누군가 이렇게 칼럼으로나마 언급하지 않으면 우리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잠자고 있을 것이다. 비록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팀이지만 한때 경성, 평양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그들을 한 번쯤은 반드시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한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전조선축구대회와 명치신궁경기대회를 제패하며 뜨겁게 타올랐던 함흥축구단이 언젠가는 다시 제대로 된 위용을 갖추고 그때의 기적을 써내려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들의 발자취는 위대했다.

*알리는 글1
오늘 소개한 칼럼 내용에 등장하는 김명학은 이후 일제 강점기 말기 징병제 실시 감사 담화를 발표하고 흥아보국단 함남지역 위원과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지내며 일제에 협력한 행적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선정되었습니다.

*알리는 글2
건전한 비판은 언제든 겸허히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도를 넘은 악성 댓글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4년 넘게 악성 댓글에 참아왔지만 더는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법적인 절차를 밟기로 했습니다. 현재 한 법무법인과 위임 계약을 마쳤고 법무팀에서 실시간으로 댓글을 모니터링 하고 있습니다. 법무법인과의 계약서 사진은 제 트위터에 올려 놓았습니다. 선량한 대다수의 네티즌 분들께는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는 반드시 욕설과 인신공격 등을 일삼는 악플러들에 대해 경종을 울리려 합니다. 절대 선처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또한 이후에도 건전한 비판에 대해서는 낮은 자세로 새기겠지만 도를 넘은 악성 댓글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대응할 계획입니다. 그럼 모두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