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김종필. 한국 정치사를 휘어 잡았던 이른바 '3金'이다. 이제 이 '3金'은 고인이 됐거나 정계를 떠나고 말았지만 이 시대를 기억하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 DJ와 YS, JP가 이끌던 '3金시대'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래서 또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다. 하지만 DJ와 YS, JP의 경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정치계 못지 않게 치열한 축구계에 '3金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라운드에서 서로 격돌하게 된 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김종필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한 시대에 DJ와 YS, JP가 K리그에서 뛰고 있다는 건 우연으로 설명하기에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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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올 시즌 인천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 나가고 있다. (사진=인천유나이티드)

'선생님' 소리 듣는 1992년생 선수, 김대중

인천유나이티드 수비수 김대중은 어딜 가든 '선생님'이라고 불린다. 은행이나 병원 등에 가 생년월일과 이름을 적어 내면 한참 뒤 이런 소리가 들린다. "김대중 고객님, 아니 김대중 선생님 들어오세요." 1992년생이라고 적어 내도 김대중 뒤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여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다. "김대중 선생님"이라는 우렁찬 소리가 들리면 주변에서는 다들 그를 쳐다 본다. 김대중은 이런 반응이 이제는 익숙하다. "초등학교 때는 이름 때문에 놀리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텔레비전 뉴스에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오면 다들 저를 쳐다 보더라고요. 그런데 이제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 않은데 주위에서는 제 이름이 특이하다고 생각하시나봐요. 지금은 오히려 당당하고 부각되는 이름이라 자신 있게 제 이름을 말하고 다니거든요."

김대중은 원래 '김소중'이 될 뻔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작을 소(小)'보다는 '큰 대(大)'가 훨씬 더 의미가 좋을 것 같다면서 '소중'을 '대중'으로 바꿨다. 그의 이름은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한자까지도 똑같다. 더 놀라운 사실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모 모두 고향이 전라도라는 것이다. 그 역시 전남 함평에서 나고 자랐다. 사실 할아버지가 김대중 전 대통령 이름을 염두에 두고 그의 이름을 지은 건 아니다. "당시에는 DJ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는 예상 못하셨대요. 그냥 의미가 좋아 이름을 '김대중'으로 지으셨다네요." 그런 그에게 광주FC에서 이적 제의가 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유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광주에서 뛴다면 아마 많은 분들이 더 저를 사랑해 주시지 않을까요. 제 고향이기도 하고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하잖아요. 이적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일단은 인천에서 최선을 다해야죠. 저는 인천이 지금 너무 좋아요."

그에게는 아주 기막히고 특별한 인연이 있다. 홍익대 재학 시절 그를 지도했던 감독의 이름이 다름 아닌 김종필이었기 때문이다. JP와 DJ가 사제지간으로 만나는 아주 절묘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학교 시절 학부모 모임이 열리면 부모님들께서 아주 정신 없어 하시더라고요. '여기에는 DJ도 있고 JP도 있다'면서요." 김종필이 "야, 대중아"라고 부르는 독특한 상황도 연출됐다. 이뿐 아니다. 김대중이 U-17 청소년 대표로 발탁돼 파주트레이닝센터에 가 한 방에 배정된 동료의 이름도 놀라웠다. 그 역시 김종필이었다. 한 방에서 김대중과 김종필이 생활하는 역사적인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둘은 서로 "종필아", "대중아"라고 부르며 무척이나 친하게 지냈지만 주위에서는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김종필은 현재 J리그 쇼난 벨마레에서 활약 중이다. "저는 JP와 인연이 깊은가 봐요." 김대중은 김종필과의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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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정치계가 아니라 축구계에서도 이름을 크게 떨칠 수 있을까. (사진=인천유나이티드)

뼈아픈 자책골, 하필이면 상대가 광주

김대중은 홍익대를 졸업하고 2014년 인천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었다. 190cm에 이르는 큰 키를 이용한 수비력을 인천이 좋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대중은 인천에서 데뷔전도 치르지 못하고 경쟁에서 밀렸다. "몸 상태도 정상적이지 않았고 갑자기 프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적응도 쉽지 않았다"고 했지만 무엇보다도 성인 무대에서 자신감이 뚝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김대중은 인천에서 주전 경쟁에 밀린 채 K리그 챌린지 대전시티즌으로 임대를 떠났다. 하지만 김대중은 대전에서 종종 경기에 나서며 실전 감각을 익혔고 자신감도 찾은 채 한 시즌을 마무리하고 인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비록 완벽한 주전은 아니었지만 동계훈련을 통해 주전으로 도약하기위한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는 개막전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시즌 1호 자책골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것도 상대는 정치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던 도시, 광주FC였다. 김대중이 광주를 위해 희생(?)한 것이었다. 김대중은 2라운드 수원전에서도 종료 직전 어이없는 패스 미스로 결승골을 내주고 말았다. 김대중에게는 엄청난 시련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경기를 쉽게 생각한 것 같아요. 감독님께서도 'SNS를 너무 많이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자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곧바로 탈퇴하고 축구에만 집중하기로 했어요." 그는 마음을 다잡고 3라운드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리그에서 가장 공격력이 좋은 전북이었다. 김대중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게 제 마지막 경기라고 생각했죠. 이번에도 제대로 못하면 축구를 그만두겠다는 각오로 임했어요." 김대중의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그는 이 경기에서 에두와 이동국을 완벽히 막아내며 0-0 무승부를 이끌었고 경기 MVP에까지 뽑히는 영예를 누렸다. 최강 공격력을 자랑하는 전북을 상대로 거둔 의미 있는 무실점이었다. "그냥 제가 너무 불쌍해서 경기 MVP를 주신 것 같아요. 또 제 수비 파트너인 요니치 덕을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 다시 치열한 주전 경쟁에 돌입했다. 아직 확실한 주전으로 도약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시 기회를 노리고 있어요. 계속 경기에 나가고 나가는 경기마다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김대중은 아직 완성된 선수가 아니다. 힘겹지만 주전 경쟁을 펼쳐야 하고 이걸 이겨내야 오랜 시간 K리그에 남을 수 있다. 아직 그는 꿈을 위해 전진하는 중이다.

'갱제를 학실히' 잘 아는 김영삼

인천에 차세대 리더 김대중이 있다면 울산에는 김영삼이 있다. 울산현대에서 뛰고 있는 김영삼은 현재 울산 선수들 중 가장 오래 이 팀에서 헌신하고 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2005년 울산에 입단한 김영삼은 2010년과 2011년 군 입대 시기를 제외하고는 울산에서만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원클럽맨'이다. 2005년 그가 처음 K리그에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김영삼의 실력은 둘째 치고 그의 이름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영삼도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친구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 역시 이제는 이름으로 거론되는 게 익숙하다. "아무래도 제 이름이 특이하다보니 남들이 저를 잘 기억해 주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는 참 좋은 이름이죠. 어릴 때는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다 그러려니 해요." 김영삼은 K리그에서 10년 넘게 활약하면서 이름이 아닌 실력으로 자신을 각인시켰다.

그는 YS와 같은 이름으로 사는 게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편한 점은 있다. "아. 가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제 이름을 검색해 보면 제 이야기는 별로 없고 김영삼 전 대통령에 관한 글들만 수두룩하더라고요. 그럴 때 조금 서운하거나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거 말고는 별로 불편한 일이 없어요." 그에게 "인천 김대중에 대해 아느냐"고 묻자 신기해한다. "김대중이라는 축구선수가 있다고요? 처음 들었어요. 축구선수 이름이 김대중이에요?" 그는 자기 이름은 김영삼이면서 김대중이라는 축구선수는 또 무척 신기해했다. 그러면서 다가올 6월 21일 울산에서 열리는 울산-인천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한참 후배인 김대중이 다가와 인사하면 더 반갑게 맞아줄 수 있느냐"고 묻자 답변이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김대중입니다'라고 인사해 오면 '안녕하세요. 저는 김영삼입니다'라고 받아줄게요. 재미있는 그림이 연출 되겠네요." 둘 모두 경기에 나서면 경기 종료 뒤 이 둘이 유니폼을 교환하는 모습도 상상해 보자.

또한 YS 재임 시절 IMF 경제 위기 사태가 터진 것과 달리 울산 김영삼은 경제적으로도 뛰어난 투자 능력을 갖췄다. 신인 때부터 펀드에 조금씩 투자한 김영삼은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인한 주가 하락 때도 전혀 손해를 보지 않을 정도로 투자의 귀재다. 펀드 열풍이 불 때는 주변에 조언을 해줄 만큼 경제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울산의 워렌 버핏'이었다. 김영삼의 방에는 재테크 관련 책이 빼곡히 쌓여 있고 그는 늘 경제와 재테크에 관심을 갖고 있다. "어릴 때부터 돈 관리 잘하라고 주위에서 하도 말씀을 하셔서 관심을 갖고 있는 편"이라고 겸손을 떨지만 김영삼은 YS보다 '갱제를 학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김영삼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의 경제 관념이 불안하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원클럽맨' 김영삼, "늘 도전한다"

김영삼은 K리그에 몇 남지 않은 '원클럽맨'이다. 이름뿐 아니라 그의 가치는 여기에서 더 빛난다. "저는 엄청난 행운을 타고 났다고 생각해요. 울산에서 2005년부터 벌써 네 명의 감독님(김정남, 김호곤, 조민국, 윤정환)과 함께 했어요. 감독님이 바뀔 때마다 그분들께 다행히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지 않아 계속 팀에 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는 울산에서만 무려 207경기에 나서며 4골 6도움의 기록을 올리고 있다. 입단 후 첫 해에 K리그 우승을 경험했고 2012년에는 울산의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도 함께했다. 하지만 그는 올 시즌에는 경쟁에서 밀려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윤정환 감독 부임 이후 좀처럼 선택을 받지 못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김영삼은 프로다. "경쟁에서 밀린 건 아쉽지만 이건 감독님이 선택하는 거잖아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받아들여야죠."

그는 말을 이었다. "은퇴하기 전까지는 늘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시 주전으로 도약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윤정환 감독님 부임 전 세 명의 감독님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번에도 극복할 겁니다." 2013년 인천과의 K리그 클래식 경기 도중 상대의 '살인 태클'에 좌측 내측 인대 부분 파열로 시즌 아웃되는 큰 부상을 경험하기도 했던 그는 보란 듯이 이 부상을 이겨내고 돌아왔고 지난 시즌 역시 든든히 책임지며 울산을 이끌었다. 비록 지금은 살짝 주전 경쟁에서 밀려 있지만 '원클럽맨'으로서, 큰 부상을 한 번 이겨낸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이 위기를 극복할 생각이다. 또한 이미 그가 K리그와 울산에서 일궈낸 업적은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 받을 만큼 대단했다. 김영삼은 멀티 플레이어이면서 성실한 자기 관리를 통해 박수를 받기에 충분한 선수로 인정 받고 있다. 그가 김대중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만날 날이 오길 기대한다.

김대중을 제자로 둔 김종필

김대중과 김영삼만 K리그에 있는 게 아니다. '3金'이 완성되려면 김종필도 있어야 한다. 물론 K리그에도 김종필이 있다. 앞서 김대중의 대학 시절 스승이었던 김종필 감독이 2013년 K리그 챌린지 충주 험멜의 지휘봉을 잡았기 때문이다. DJ와 YS, JP가 모두 K리그 무대에서 한 시대에 뛰는 아주 독특하고도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김종필 감독 역시 친구들 사이에서의 별명이 '총리님'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친구들 사이에서 대통령으로 불리는 동안 김종필 감독은 한국 정치사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지 못했다. 아마 JP가 대통령이 됐더라면 그의 별명 역시 바뀌지 않았을까. 또한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홍익대 시절 김대중을 지도한 것도 특별한 기억이다. "저는 대중이가 제 제자니까 '야, 대중아.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해'라고 했죠. 그런데 주변에서 되게 이상하게 생각하대요. JP가 DJ한테 막 한다면서요. 허허." 그런 김대중과 김종필 감독은 이제 K리그 무대에서 경쟁하게 됐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축구에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내 편도 없는 모양이다.

또한 그가 홍익대 감독으로 부임하던 시기 동국대 감독 이름 역시 김종필이었다. 그보다 한참 후배인 동명이인 감독이었다. "후배들한테 전화해 '나 김종필 감독이야'라고 하면 '어 그래. 종필아 오랜 만이다. 너 인마 연락도 안하냐'라고 하더라고요. 동국대 김종필 감독인 줄 알고 그러는 거죠. 그럴 때마다 '아, 내가 이름 때문에 손해를 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죠. 정치인과 이름이 같아 불편하기 이전에 같은 업계에 있는 감독과 이름이 같아 불편한 게 더 많았어요. 어린 시절부터 JP와 이름이 같다고 하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와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별로 느낌이 없어요." 2011년 U리그 챔피언십 준결승에서는 김종필의 홍익대와 김종필의 동국대가 격돌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경기에서 홍익대 김종필 감독은 심동운의 결승골에 힘입어 동국대를 1-0으로 제압했다. 참고로 당시 동국대를 이끌던 김종필 감독은 현재 용인시청 감독으로 활약 중이다. 축구계에는 이 두 명의 김종필 감독과 J리그에서 뛰는 선수 김종필 등 다양한 JP가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그를 단순히 특이한 이름으로 기억해서는 안 된다. 김종필 감독은 엄청난 선수들을 길러낸 대학 축구의 대부다. 안양중학교와 안양공고를 졸업하고 경희대에 진학했다가 상업은행과 대우 등을 거치며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그는 지도자로 변신한 뒤 더 크게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안양공고 감독으로 이영표와 김동진 등을 키워낸 김종필 감독은 홍익대에서는 김보경과 유병수, 신형민, 김기희 등을 길러냈다. 그가 홍익대에서 정년을 마치자 대학축구연맹 회장이면서 충주험멜 구단주인 변석화 구단주가 김종필 감독을 가만 놔둘리 없었다. 대학축구연맹 회장으로 늘 김종필 감독을 지켜보던 변석화 구단주는 곧바로 그에게 충주험멜 감독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김종필 감독이라면 전력이 약한 충주험멜을 서서히 강팀으로 만들어낼 명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종필 감독은 2013년 7월 충주험멜 감독이 돼 K리그 무대에 입성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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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팀에서 김종필 감독이 이끌고 김대중과 김영삼이 활약하는 '3金시대'가 열릴 수 있을까. (사진=프로축구연맹)

K리그에서 열린 '3金시대'

첫 시즌 중반부터 지휘봉을 잡은 김종필 감독은 결국 충주험멜의 리그 꼴찌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k리그 챌린지 팀 중 가장 열악한 충주험멜로서는 프로 무대에서의 첫 시즌이 무척이나 버거웠다. 2014 시즌에는 탈꼴찌에 성공하긴 했지만 10개 팀 중 9위에 머물렀고 올 시즌 초반 분위기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주험멜은 최근 강원과 경남을 상대로 2연승을 기록하며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 김종필 감독이 팀을 맡은 지 세 시즌 만에 경기력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팀과 맞붙더라도 상대가 강팀이라 해서 수비적으로 경기에 임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내셔널리그에서도 그리 강한 팀이 아니었던 충주험멜은 K리그 챌린지에 합류한 뒤 눈에 띌 만큼은 아니지만 김종필 감독과 함께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홍익대 시절 유망한 선수들을 키워낸 것처럼 충주험멜에서도 비록 유명하진 않지만 가능성 있는 선수들을 배출해 낼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K리그에서 '3金시대'가 열렸지만 한 팀에서 '3金시대'가 펼쳐지는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날 수는 없을까. 선택은 아무래도 지도자인 김종필 감독에게 달려있다. 그가 김대중과 김영삼을 충주험멜에 데려오면 농담에서나 가능했던 K리그에서의 완벽한 '3金시대'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종필 감독에게 물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을 영입해 ''3金 축구' 한 번 해볼 생각 없으십니까." 그러자 김종필 감독은 한참 동안 껄껄거리며 웃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김영삼은 경험도 많고 실력도 있어 탐나는 선수지만 비싸서 우리가 영입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김)대중이는 지난 시즌 인천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팀으로 임대 이야기가 실제로 나왔었어요. 또 JP가 DJ를 부리는 그림이 된 거지. 그런데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무산되고 말았어요.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3金 축구'가 성사되면 재밌기는 하겠네요. 정치계에서는 JP만 대통령을 못했는데 축구계에서는 JP가 감독으로 DJ하고 YS를 지휘하는 그림이잖아요. 허허."

'3金시대'의 정치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긍정적인 평가건 부정적인 평가건 DJ와 YS, JP는 앞으로도 한국 정치사를 논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고 거론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연이라기엔 너무나도 절묘한 축구계 '3金시대' 역시 한 번쯤은 흥미롭게 바라보는 건 어떨까. K리그 축구장에는 김대중도 있고 김영삼도 있고 김종필도 있다. 비록 정치계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지만 YS의 크로스를 DJ가 헤딩골로 연결한 뒤 함께 JP의 품에 안기는 모습을 언젠가는 K리그에서 한 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게 바로 K리그를 통해 배우는 근현대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