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멋진 축구단이 두 팀이나 있다. K리그 클래식의 FC서울은 이미 서울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고 새로 창단한 서울이랜드FC도 파격적인 마케팅으로 팬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하지만 이 두 팀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서울을 대표하는 또 다른 팀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과거 서울을 대표하던 유일한 성인팀이었던 서울시청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과연 서울시청 축구단이 지금도 남아 있었더라면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지금부터 서울시청 축구단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서울시청 축구단, 25년 만의 부활

광복을 맞고 1년 뒤인 1946년 의미 있는 축구팀이 창단하게 됐다. 평양과 늘 축구로는 가장 치열한 라이벌로 평가받았던 서울을 대표하는 팀이 만들어진 것이다. 바로 서울시청 축구단이었다. 이 축구팀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한 도시를 대표하는 것 정도가 아니었다. 수도인 서울을 대변하는 대단한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서울시청 축구단은 서울 대표 자격으로 전국 각지를 돌며 경기를 치르기 시작했다. 서울을 기반으로 한 조선축구단과 경성축구단, 특무대 축구단 등과 함께 서울에서 라이벌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해 보였다. 역시나 ‘경평전’을 통해 실력을 키워온 서울답게 서울시청 축구단은 경기력은 물론 각 지역을 돌 때마다 많은 관중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서울시청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 어쩔 수 없이 해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시청은 이렇게 4년의 짧은 역사만을 뒤로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휴전이 선언된 뒤에도 한국 축구는 군팀 위주로 돌아가게 되면서 서울시청에 대한 이야기도 쏙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1975년 7월 서울시 체육회가 한 가지 소식을 발표했다. “서울시를 대표하는 시청 축구단을 재창단하겠습니다.”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무려 25년 만에 서울시청 축구단이 부활을 알린 것이었다. “박종환씨를 초대 감독으로 선임하겠습니다.” 당시 제8회 대통령금배 전국고교축구대회에서 공동 우승을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던 전남기공 박종환 감독이 지휘봉을 잡게 되면서 영영 역사 속에 묻힐 것만 같았던 서울시청은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서울시청은 재창단이라는 숙제는 풀었지만 선수 수급에 대한 여유가 별로 없었다. 군팀이 좋은 선수를 싹쓸이 해가는 상황에서 스카우트를 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박종환 감독은 곧바로 졸업 예정이던 모교 전남기공 선수들을 대거 불러들였다. 그렇게 이들을 중심으로 고교 졸업생 16명으로 구성된 단촐한 팀이 마침내 출범하게 됐다. 이들은 1976년 1월 15일 서울시청 회의실에서 역사적인 창단을 가졌다. 6.25 전쟁 후 대표하는 팀이 없던 서울의 최초 실업 축구단이었다.

하지만 서울시청은 강했다. 창단 2년 만에 1978년 실업축구연맹전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이었다. 당시 평균 나이 21세의 서울시청은 준결승전에서 노장들이 포진한 국민은행을 3-1로 제압하더니 우천으로 연기돼 가까스로 치른 결승전에서는 120분 간의 혈투 끝에 해군과 2-2 무승부를 기록하며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면서 서울시청 박종환 감독은 청소년 대표팀 감독에 이름을 올리는 겹경사를 누리기도 했다. 지금이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실업팀과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동시에 맡는 게 가능했던 때였다. 박종환 감독은 1980년 10월 청소년 대표팀을 맡으면서 동시에 두 팀을 지휘하는 이중 생활을 시작했다. 이쯤 되면 서울시청의 기세가 한풀 꺾일 법도 했지만 서울시청의 대단한 선전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80년 실업 춘계연맹전에서도 충의와 공동 우승을 차지한 서울시청은 이어 지금 열리는 FA컵의 전신인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도 믿기지 않는 우승을 거뒀다. 1980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 나선 서울시청은 대학 강호 건국대와 광운공대 등을 제압하고 결승에서 한양대를 만났다.

그들의 찬란했던 영광

당시 한양대에는 박항서와 박경훈, 오연교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서울시청은 결승전 1차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고 재경기에서도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뒤 열린 승부차기에서 4-3 승리를 거두며 감격적으로 한국 축구 정상 무대에 섰다.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한 팀들을 상대로 고등학교 졸업 후 갈 곳 없던 선수들이 모여 거둔 의미 있는 우승이었다. 이 우승은 전국축구선수권대회 35년 역사상 첫 재경기에 의해 우승팀이 가려진 대회이기도 했다. 당시 서울시청은 다른 실업팀에 비해 현저히 적은 월급을 받고 시에서의 예산 지원도 턱없이 부족해 박종환 감독이 직접 주머니를 털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이를 이겨낸 것이었다. 또한 박종환 감독의 살인적인 훈련 방식으로 인해 선수들은 ‘전사’가 돼 있었다. 당시 서울시청은 따로 선수 스카우트비도 없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갈 곳 없어진 선수들이 입단하는 팀에 불과했다. 선수 전원이 대학 문턱도 밟지 못한 이들은 낮에는 훈련을 하고 밤에는 서울시립대에서 공부를 할 정도로 밤낮 없이 꿈을 쫓았고 1981년에는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제1회 골든컵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무대에서도 실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울시청은 1982년에도 결승전에서 한국전력을 4-1로 대파하며 또 다시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서울시청은 선수들에 대한 지원이 열악한 탓에 키워낸 선수들을 프로팀으로 보내야 했다. 1982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MVP를 차지한 박윤기는 정상급 실력을 갖췄지만 집안 형편은 그대로여서 결국 유공으로 떠나야 했고 서울시청에서 국가대표까지 지낸 김창호와 신윤기, 이강조 등도 유공으로 떠났다. 마찬가지로 국가대표로 뽑힌 공격수 이태엽은 할렐루야로 이적했다. 이 사이 서울시청 선수들은 대다수가 국가대표 주전으로 활약하기 시작했지만 좋은 선수들을 키워내고 아무리 좋은 성적을 낸다고 하더라도 선수들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니 선수들이 빠져 나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듬해인 1983년에는 최인영과 권오손이 각각 국민은행으로 이적했고 1984년에는 전종선도 럭키금성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서울시청은 서울시와 합작해 선수 생활을 마친 뒤 이들에게 4급 국가 공무원으로 특채될 수 있는 혜택을 주기도 했지만 선수들의 프로 진출에 대한 열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박종환 감독은 본인의 집을 선수단 숙소로 활용했다. 워낙 예산이 부족한 탓에 선수들 대부분이 박종환 감독 자택에서 그의 아내가 해준 밥을 먹고 생활할 정도로 열악했다. 그러면서 박종환 감독은 1983년 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 신화를 달성했고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한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리고 대표팀 감독으로 확정된 다음 날인 1986년 11월 21일 또 한 번 서울시청 축구단의 역사를 새로 썼다. 주축 선수들이 대거 팀을 떠나 약체로 꼽히던 서울시청이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흥기와 김길수, 구한식, 이칠성, 김영주 등을 앞세운 서울시청은 결승전에서 아주대를 3-1로 완파하고 다시 한 번 아마추어 축구 최강자로 이름을 올렸다. 주요 선수들이 다 이적한 뒤 4년 만에 다시 한 번 정상을 되찾은 것이었다. 무명의 선수들이 모인 열악한 구단은 어느덧 국가대표 선수와 지도자를 배출한 최고의 팀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 사이 선수들은 밤에는 대학교에 다니며 공부와 축구를 병행했다. 열악하지만 서울시청은 이 상황을 딛고 점점 더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서울시청의 끝없는 추락과 프로화 추진

하지만 서울시청의 영광은 여기까지였다. 박종환 감독이 1988년 올림픽 대표팀 지도에만 전념하기 위해 서울시청에 휴직계를 내고 팀을 떠나게 되면서 서울시청도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후 박종환 감독은 1988년 7월 축구협회와의 갈등 끝에 결국 올림픽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서울시청으로 복귀하지 않고 프로축구 일화천마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서울시청과의 인연을 끝냈다. 이후 서울시청은 1990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도 1승 1무 1패로 탈락했고 같은 해 봄철실업축구연맹전에서도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프로축구가 자리를 잡으면서 이제는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시청팀을 택하는 선수들도 줄었고 여기에 무명 선수들을 혹독한 조련 끝에 키워내던 박종환 감독도 없으니 서울시청의 추락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때부터 서울시청은 실업 무대에서 동네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수도 서울을 연고로 하는 유일한 축구단이었지만 서울시청은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팀의 위용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게 됐고 근근이 유지되는 신세였다. 1988년 이후 기업은행과 주택은행, 국민은행, 할렐루야, 한일생명 등 실업 무대를 함께 주름잡던 팀들은 모두 해체되면서 실업 축구도 황금기도 저물어 갔다.

2002년 한일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서울시청은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를 잡는 듯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을 연고로 하는 성인팀은 서울시청 뿐이어서 이 팀을 프로화 하자는 이야기가 흘러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 서울시의 부족한 지원으로 미운 오리 새끼로 전락해 있던 서울시청이 기회를 잡을 것처럼 보였다. 서울시는 2003년 K리그 참가를 목표로 100억 원의 서울시 체육회 발전 기금을 활용하고 나머지는 시민주 공모를 통해 서울시청을 프로화 하기로 추진했다. 기존 프로팀 선수와 외국인 선수를 주축으로 하고 서울시청 실업팀을 프로 2부로 전환한다는 게 골자였다. 그 사이 토너먼트 대회 위주로 운영되던 실업 축구는 2003년 K2리그로 새롭게 출범하게 됐다. 강릉시청과 수원시청 등 시청 팀들이 참가하게 됐고 이외에도 김포국민은행과 의정부험멜, 익산할렐루야, 인천한국철도, 대전한수원, 용인상무, 울산미포조선, 서산시민축구단 등이 K2리그 초대 참가팀으로 확정됐다. 하지만 유일한 서울 연고 팀인 서울시청은 2003년 K2리그에 참가할 수 없었다. K2리그 참가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로화 추진 이야기가 흘러 나오는 판국에 K2리그 참가 요건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다.

대한축구협회는 K2리그 참가를 위해 5천명 이상의 관중석을 갖춘 천연잔디 홈 구장과 연중리그를 소화할 25명 이상의 선수단 구성을 내세웠다. 하지만 서울시청은 이 조건을 충족할 수가 없었다. 일단 경기장부터가 문제였다. 서울에는 여러 천연잔디 구장이 있었지만 서울시청에는 그림의 떡이었다. 서울월드컵경기장과 잠실종합운동장은 한 번 쓰기 위해서 2~3억 원에 이르는 이용료가 필요해 엄두도 낼 수 없었고 목동경기장은 이미 생활체육 팀의 사용 예약이 꽉 차 있는 상태였다. 유일한 서울 연고팀이 쓸 수 있는 경기장이 없다는 건 서글픈 현실이었다. 효창운동장은 인조잔디여서 쓸 수가 없었다. 또한 선수단도 18명 뿐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선수단 규모를 늘릴 수가 없었고 축구단 정원을 늘릴 경우 서울시 조례에 따라 서울시청 운동부 중 육상이나 배구, 양궁, 사이클, 복싱 등 다른 종목 선수들을 줄여야 했다. 결국 서울시청은 서울을 대표하는 유일한 서울 연고 성인팀이었음에도 K리그도 아닌, K2리그에도 참가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서울시청은 2003년 상반기 동안 대통령배 축구대회에만 출전했을 뿐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로 명맥만 이어가게 됐다.

팩스 한 장으로 이뤄진 믿을 수 없는 해체

결국 서울시청은 2003년 K2리그 후반기가 돼서야 가까스로 리그에 참가할 수 있게 됐다. 목동운동장을 홈으로 해 18명의 선수만으로 겨우 리그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서울시청의 투혼은 대단했다. 개막전에서 대전한수원을 2-0으로 제압한 서울시청은 강릉시청도 2-1로 제압하고 단독 선두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서울시청 소속이었던 이동준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비록 실업팀이었지만 동료들과 지도자들이 사람 대 사람으로 끈끈히 이어져 있는 팀이었죠. 선수 생활을 하면서 이런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강호’ 국민은행과의 후반기 8라운드 경기에서 0-1로 패해 선두 다툼에서 밀려나고 사흘 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것도 달랑 팩스 한 장으로 날아든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소외 종목을 집중 육성하기 위해 서울시청 축구단을 해체합니다. 서울특별시장 이명박.” 하루 아침에 날아든 날벼락이었다. 서울시가 비교적 저변이 넓다는 이유로 단체 종목인 축구와 배구단을 전격 해체하기로 한 것이다. 서울시청 배구단은 내달 열리는 V투어리그에 참가할 수 없게 됐고 서울시청 축구단은 사흘 뒤 이천상무와의 K2리그 경기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서울시는 대신 18억 원의 예산을 책정해 여자축구팀을 창단하기로 했고 사이클과 양궁, 복싱 등의 종목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선수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하루 아침에 갈 곳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축구가 비교적 저변이 넓은 종목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서울시청 축구단이 호화롭게 선수 생활을 하거나 스타 선수들을 영입할 만큼의 투자도 없던 터였다. 당시 서울시청 배구단의 1년 예산은 8억 원이었고 서울시청 축구단의 예산은 5억 원 정도였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하루 아침에 해체 소식을 접한 선수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예정된 마지막 경기가 열렸다. 2003년 11월 9일 서울 목동운동장에서 서울시청은 이천상무와 고별전을 치렀다. 경기장에는 100여 명의 서울시청 팬들이 모여 ‘해체란 없다. 반드시 다시 뛰리라. 서울FC 파이팅’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같이 해체 통보를 받은 서울시청 배구팀 선수들과 감독들도 응원을 나왔다. 그리고 전반 9분 서울시청은 김홍기가 ‘강호’ 이천상무를 상대로 선취골을 넣는 저력을 발휘했다. 이후 내리 네 골을 내주며 패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선수들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펑펑 우는 선수도 있었다. 이 경기 승리로 이천상무는 우승을 확정지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한 팀의 우승이 확정되는 경기였지만 모두가 슬픔에 빠졌다. 27년 역사의 서울시청은 이렇게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선수들은 시즌이 끝난 뒤 거리로 나가 축구팬과 서울시민에게 탄원서를 돌리는 등 백방으로 뛰었고 2003년 11월 18일 불가리아와의 A매치가 열리는 서울월드컵경기장 앞 지하철역 입구에서는 서울시청 권오손 감독과 서포터스, 실업축구연맹 직원 등 10여 명이 나와 서울시청의 부활에 지지를 보내달라고 팬들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인기 없는, 스타 없는 서울시청 축구단에 대한 관심은 턱없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직접 히딩크 감독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명예서울시민증을 수여하며 슬리퍼를 신은 아들, 사위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정도로 축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팩스 한 장으로 27년 역사의 축구단을 해체했으니 축구인들의 배신감은 오죽했을까. 하지만 결국 대다수 선수들은 서울시청이 해체된 뒤 은퇴를 선언했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동준과 박병원, 김승호 등 새롭게 팀을 찾아간 몇몇을 제외하고는 축구화를 벗어야 했다. 이때쯤 서울시민구단 창단을 대대적으로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서울시는 이듬해 안양LG의 서울 연고 이전을 승인했고 서울시민축구단 창단은 결국 백지화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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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고별전에서 팬들이 건 현수막. 하지만 그들의 바람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언젠간 그들이 다시 부활하길

하지만 소외종목 육성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서울시청 축구단과 배구단을 해체한 서울시는 5년 뒤인 2008년 연간 25억 원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투자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서울시가 맨유 공식 후원자로 참여해 맨유 홈구장에 서울시를 알리는 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 5억 원을 아껴 소외종목을 육성하기 위해 27년 역사의 팀을 해체한 뒤 세계 최고 인기 구단에 연간 25억 원을 투자하는 행동은 앞뒤가 전혀 맞질 않았다. 그렇게 FA컵의 전신 대회에서 세 번이나 우승을 차지하고 박종환 감독과 최인영 등 걸출한 축구인을 배출해낸 서울 유일의 성인 팀이던 서울시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제는 아무도 그들을 떠올리지 않는다. 낮에는 공을 차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기적을 써내려간 그들을 이제 우리는 잊고 산다. 시간이 흘렀어도 이런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의미 있는 축구팀이 팩스 한 장으로 사라졌다는 건 참으로 아쉽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마 지금까지 서울시청이 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주인이 필요했던 2003년 즈음 프로화가 됐을 수도 있고 아니면 K리그 챌린지가 출범한 2013년에는 프로 2부로 나섰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내셔널리그에 남아 오래된 역사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방식이건 서울시청은 서울을 연고로 하는 팀으로서 한국 축구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지 않았을까. 비록 1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우리는 반드시 서울시청 해체를 기억해야 한다. 시민구단은 아니지만 이제 서울시는 K리그 클래식과 K리그 챌린지에 그럴싸한 팀을 두 개나 보유하고 있다. 서울시청은 그런 대단한 팀은 아니었지만 그 의미 만큼은 이 두 팀 못지 않았다. 6.25 전쟁 이후 해체된 팀이 다시 부활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서울시청이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는 날도 올 수 있지 않을까. 그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그때는 서울을 가슴에 달고 뛰는 이들이 팩스 한 장으로 하루 아침에 해체될 만큼 찬밥 신세가 아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