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매주 K리그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을 관찰한다. “소속팀에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꾸준히 출장하는 선수에게 대표팀 기회를 주겠다”는 그의 말은 진짜였다. 그렇게 이정협(상주상무)을 국가대표로 발탁했고 이재성(전북현대)이라는 새로운 자원도 발굴했다. 아마 지금도 슈틸리케 감독은 다양한 선수들을 살펴보고 있을 것이다. 슈틸리케 감독이 너무나도 잘 하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반드시 한 선수를 국가대표로 추천하고 싶어 오늘 칼럼을 준비했다. 바로 염기훈(수원블루윙즈)이다. 지금의 염기훈이라면 충분히 국가대표팀에서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염기훈은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다시 한 번 그라운드에 설 자격이 충분한 선수다.

K리그는 지금 ‘염기훈 천하’

최근 경기력만 놓고 본다면 K리그는 ‘염기훈 천하’다. 단연 가장 돋보이는 선수다. 시즌 첫 경기인 우라와 레즈와의 AFC 챔피언스리그 맞대결에서 경기 종료 직전 레오의 결승골을 도우며 산뜻하게 출발한 그는 K리그 클래식 2라운드 인천전에서도 경기 막판 극적인 결승골을 뽑아냈다. 이게 다가 아니다. 브리즈번 로어와의 AFC 챔피언스리그 원정경기에서 정대세에게 ‘택배 크로스’를 보내 득점을 도운 그는 K리그 클래식 성남전에서도 날카로운 프리킥 등으로 두 골이나 퍼부었다. 이어 부산전에서는 위협적인 세트피스로 골을 도왔고 브리즈번과의 홈 경기에서도 기가 막힌 장거리 프리킥을 상대 골문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염기훈은 지난 주말 전남과의 K리그 클래식 원정경기에서 다시 한 번 정확한 왼발 킥으로 양상만의 헤딩골을 도왔다. 6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한 순간이었다. 염기훈은 벌써 올 시즌 4골 4도움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내고 있다.

염기훈은 당연히 국가대표로서의 자격이 있다. 국가대표라는 건 현재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유망주를 키우거나 부진한 선수의 재활 무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가장 잘하는 이들을 선발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염기훈이 대표팀에 발탁되는데 이견이 있을까. 벌써 32살이 된 염기훈은 올 시즌 들어 축구에 완전히 눈을 뜬 모습이다. 브리즈번과의 홈 경기에서 염기훈이 뽑아낸 프리킥 골은 시속이 101km/h에 이를 정도로 엄청났고 경기가 끝나자 상대팀 감독 역시 “그는 예리한 왼발을 갖췄다. 훌륭한 선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비단 프리킥 골이나 어시스트 등 공격 포인트가 아니더라도 염기훈은 90분 동안 가장 눈에 들어오는 선수로 성장해 있다. 다음 월드컵까지는 3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지만 일단 대표팀의 지상과제는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가장 돋보이는 선수가 대표팀에 가야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 염기훈보다 더 활약이 대단한 선수는 K리그에서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대표팀의 측면 공격은 그리 날카롭지 않다. 손흥민(레버쿠젠)은 소속팀에서의 활약이 대단하지만 대표팀만 오면 만족스럽지 못한 모습에 머물고 있다. 레버쿠젠의 손흥민과 대표팀의 손흥민은 전혀 다른 사람 같다. 이청용(크리스탈 팰리스)은 지난 1월 아시안컵에서 부상을 당한 뒤 또 다시 다쳐 오는 5월은 돼야 복귀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둘이 펄펄 날고 있다고 해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그 대안이 필요한 법인데 지금 상황이라면 더더욱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해야 한다. 측면에서 올 시즌 최고의 활약을 보이고 있는 염기훈이라면 손흥민이나 이청용의 좋은 경쟁자가 되기에 충분하다. 꼭 염기훈이 손흥민이나 이청용을 밀어내고 대표팀 주전 선수로 뛰어야한다는 게 아니라 염기훈이라면 그들과의 경쟁도 해볼 만하고 등장 자체로도 치열한 포지션 경쟁을 일으켜 대표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대표팀은 이정협을 기용하며 원톱을 고집하고 있는데 이게 잘 살아나기 위해서는 측면 공격이 강해져야 한다. 이정협을 겨냥한 플레이를 위해서라면 크로스가 대단히 정확한 염기훈이 필요하지 않을까. 염기훈은 대표팀의 측면을 훨씬 더 강하게 해줄 수 있는 선수다.

대표팀에 그가 필요한 이유

또한 대표팀은 최근 들어 세트피스에서 전혀 위협적이지 못한 모습에 머물고 있다. 기성용(스완지)을 대신해 손흥민이 세트피스를 담당하고 있지만 최근 날카로운 세트피스는 고사하고 이를 통해 유효 슈팅으로 이어지는 모습도 잘 찾아볼 수가 없다. 한국의 강점은 세트피스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세트피스 상황이 되면 기대감이 들지 않는 게 사실이다. 곽태휘(알 힐랄)나 김영권(광저우헝다), 기성용 등 제공권이 뛰어난 선수들이 즐비하지만 그럼에도 세트피스를 위협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그런데 염기훈이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것 같다. 그가 지난 부산전에서 민상기의 골을 도운 장면을 보았나. 날카롭고 강하게 휘어 부산 수비수들을 완벽히 속인 염기훈의 프리킥은 가히 탄성을 지를 정도였다. 이런 세트피스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선수가 팀에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다. 또한 대표팀의 간접 프리킥보다 더 심각한 건 직접 골문을 겨냥하는 프리킥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골문을 향해 날리는 염기훈의 프리킥을 대표팀 경기에서 꼭 보고 싶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왼발은 대표팀의 세트피스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경험적인 측면도 꼭 이야기하고 싶다. 최근 대표팀에서는 차두리(FC서울)가 은퇴하며 연령대가 확 낮아졌다. 그나마 곽태휘 정도가 팀의 구심점 역할을 해줄 선수로 남아있다. 염기훈이 대표팀에서의 A매치 기록이 그리 뛰어난 건 아니지만 그는 어느덧 수원에서 주장 역할까지 맡는 등 고참이 돼 선수들을 이끄는 존재가 됐다. 나는 늘 대표팀에는 경험 많은 선수가 여럿 있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어린 선수들이 넘쳐난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농 익은 선수 몇몇이 좋은 리더 역할을 해줘야 다 같이 훌륭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30대 중반을 향해 가는 염기훈은 ‘스타 군단’ 수원에서의 주장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팀에서도 젊은 선수들을 잘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염기훈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측면 공격수로 주로 활약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최전방 공격수로서의 능력도 발휘할 수 있는 선수다. 현재 이정협 카드 외에 마땅한 ‘플랜B’가 없는 상황에서 염기훈의 가세는 공격 패턴을 다양화할 수 있다. 공격진에 이렇게 프리킥이 날카롭고 멀티 플레이어로서의 능력을 갖춘 선수 한 명쯤 있다면 참 든든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아직도 염기훈 이름을 꺼내면 5년 전 이야기를 한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르헨티나전 당시 득점 찬스를 놓쳤던 염기훈을 거론하며 그를 폄하한다. 당시 나도 염기훈을 응원하는 내용의 칼럼을 썼다가 호된 비난을 겪기도 했다. 염기훈에 대한 여론이 여전히 좋지 않은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지금 잘하면 다시 쓰는 게 맞는 거다. 과거의 실수 한 번으로 낙인을 찍어 버리면 지금 대표팀에 남아있을 선수가 없다. 5년 전 염기훈과 지금의 염기훈은 분명히 다른데 아직도 그때 그 슈팅 한 번으로 그를 폄하하는 이들이 있다면 5년 동안 염기훈이 뛰는 경기를 한 번도 보지 않은 것 아닐까. 지금의 염기훈은 엄청난 활약으로 다시 국가대표에 꼭 불러야 하는 선수로 성장했는데도 말이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2010년에 살고 있으면서 “그때 왜 오른발로 슈팅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지긋지긋한 논쟁만을 하고 있다면 한국 축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다. 염기훈의 왼발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누군가를 조롱하는 우리 손보다도 훨씬 더 정교하지 않을까.

염기훈은 대표팀에서 아직 보여줄 게 많다

염기훈을 향한 지도자들의 극찬도 이어지고 있다. 프란스 티센 브리즈번 감독은 “염기훈이 있어 세트피스 기회를 주지 말라고 선수들에게 당부했지만 결국 기회를 내주고 말았고 골까지 허용했다”고 했고 윤성효 감독은 부산과의 경기가 끝난 뒤 “워낙 킥이 좋아 대비하는 게 어렵다”고 혀를 내둘렀다. 서정원 감독 역시 “주장인 염기훈은 경기를 준비할 때부터도 가장 믿음직하다”고 밝힌 바 있다.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재계약 문제 때문에 전지훈련에 늦게 합류한 염기훈은 몸상태를 빨리 끌어 올리기 위해 매일 아침 가장 먼저 훈련장에 나와 프리킥 연습을 할 정도로 책임감이 강하다. 꾸준히 노력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기 때문에 지금의 염기훈이 될 수 있었다. 한 번 대표팀에서 실패를 경험한 이런 선수가 성실한 노력 끝에 다시 살아난 뒤 한 번 더 기회를 부여받는 건 염기훈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는 많은 선수들에게도 아주 좋은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염기훈은 전술적인 면은 물론 대표팀의 상징성을 위해서도 한 번 더 기회를 얻어야 하는 선수다.

아마 슈틸리케 감독이 알아서 판단을 잘 할 것이다. 내 의견이 모두 맞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염기훈이라면 대표팀에서도 보여줄 게 더 많을 것이다. 이정협이 그랬고 이재성이 그랬던 것처럼 슈틸리케 감독은 소속팀이나 인지도에 연연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염기훈을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아직까지도 5년 전 슈팅 한 번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는 그 동안 엄청나게 성숙했고 성장했다.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염기훈이 프리킥을 위해 공 앞에 서 있다면 대단한 기대감이 들 것 같다. 또한 단순히 왼발 킥과 세트피스 때문이 아니더라도 염기훈은 다재다능한 플레이로 대표팀에 충분히 긍정적인 효과를 선사할 선수다. 2010년 한 번의 슈팅 실수로 지금까지 비난받고 조롱받지만 그는 충분히 다시 대표팀에서 능력을 입증할 가치를 지녔다. 수원의 사나이 염기훈은 수원을 위해서만 왼발을 쓸 아니라 이제는 대표팀을 위해서도 그 왼발을 좀 써줬으면 한다. 염기훈은 왼발의 지배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