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한 축구경기가 열렸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경기도 화성종합경기타운에 등장했고 상대팀 선수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상대팀 선수들 유니폼에는 ‘JAPAN’이라는 글자가 선명했고 한국 선수들 유니폼에는 그간 보지 못했던 태극기까지 달려있었다. 하지만 이 한일전이 열리는 경기장은 텅 비어있었다. 한일전이라면 가위 바위 보도 져서는 안 된다고 믿는 세상인데 도대체 어찌된 일이었을까. 바로 이 경기가 사람들의 관심에서는 한 발 물러나 있는 또 다른 한일전인 한일 대학 축구 정기전 ‘덴소컵’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덴소컵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월드컵 공동 개최 후 손 잡은 한일 대학 축구

고려대학교와 와세다대학교의 축구 정기전은 1960년대부터 시행돼 왔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대학생들의 축구 경기가 정례화된 건 1970년대부터였다. 한국과 일본은 1972년부터 대학생간 친선경기를 열었다. 뮌헨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과 일본이 모두 탈락하자 양국 축구협회가 서로의 실력 향상을 위해 정기전을 개최하기로 한 것이다. 성인 대표팀 한일정기전에 앞서 양국 대학 선수들 간의 경기를 먼저 치르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1972년 처음 정기전을 통해 일본 대학 선발과 격돌한 한국 대학 선발은 수중전 끝에 일본 도쿄에서 1-1 무승부를 거뒀다. 이때부터 1991년까지 한국과 일본은 한일 대학축구 정기전을 꾸준히 개최했다. 한국은 1991년까지 무려 8승 6무 1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일본을 크게 앞섰다. 하지만 한일 대학축구 정기전은 폐지되고 말았다. 성인 대표팀은 그나마 한국과 일본이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지만 대학 축구는 한국과 일본의 격차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한일 대학축구 정기전이 부활한 건 1997년이었다. 1996년 한국과 일본이 2002 월드컵 공동 개최를 확정지은 터라 축구로 인한 양국의 화합 분위기가 조성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소 친분이 두터운 한일 축구 지도자들이 자주 만나 축구 발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결국 이를 각국 대학연맹에 건의하면서 대회 개최가 가시화됐다. 여기에 일본 도요타 자동차 부품회사인 ‘덴소’가 후원을 맡으며 한일 대학축구 정기전은 ‘덴소컵’이라는 이름이 붙게 됐고 동아일보와 아사히 신문이 공동 주최하기로 했다. 당시 ‘덴소’는 ‘덴소 챌린지컵’이라는 일본 대학생 축구대회를 개최할 만큼 대학 축구에 대한 관심이 컸다. ‘덴소 챌린지컵’은 일본을 6개 지역으로 나눠 그 선발팀끼리의 경기를 펼치는 독특한 방식을 채용했고 일본 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전통을 자랑하는 ‘덴소 챌린지컵’과 달리 한일 대학축구 친선전 성격인 ‘덴소컵’은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일회성으로 열리는 대회라는 인식이 강한 것도 사실이었다.

첫 대회 명칭은 ‘2002월드컵 한일 공동 주최 기념 덴소컵 97’이었다. 한국이 일본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서 대회를 여는 방식이었고 한국 대학 선발은 1997년 4월 도쿄 니시가오카 국립경기장으로 향했다. 당시 한국은 아주대 소속의 안정환을 비롯해 장대일(연세대), 박성배(숭실대), 이길용(광운대) 등이 첫 덴소컵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한국은 결국 0-1로 패하고 말았다. 이때 결승골을 넣은 이가 이후 한일전 등 굵직한 경기에서 일본 대표로 나선 모리타 코헤이였다. 이후에도 한국은 덴소컵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한국은 보통 2월에서 3월에 춘계 대학연맹전을 여는데 이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을 따로 뽑아 덴소컵을 준비했다. 하지만 덴소컵이 열리는 시기는 보통 3월이나 4월이었다. 짧게는 일주일, 길어도 보름 정도의 훈련만을 소화한 채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으니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일본은 아예 석 달 전부터 선수를 선발해 유럽 전지훈련을 가는 등 한국을 이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일본은 J리그 출범 초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선수들이 프로 무대에 곧바로 뛰어드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원래부터 대학 축구가 상당히 강한 편이었고 대학 축구의 중요성도 잊지 않았다. 무려 400여 개의 대학팀이 토너먼트를 통해 일본 대학 챔피언을 가리는 대회를 열기도 하고 지역리그를 통해 잘하는 팀만을 모아서 왕중왕전을 치르기도 할 만큼 굉장히 체계적인 대학 리그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전세계 대학 축구 최강자를 가리는 유니버시아드 대회 준비를 위해 선수들을 소집해 무려 2년 넘게 발을 맞추는 시스템을 구축해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2001년부터 2005년까지 3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고 통산 5회 우승의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 선수들이 곧바로 출전하는 대회가 덴소컵이었으니 이제 막 춘계연맹전을 마치고 선수를 선발해 일주일 정도 발을 맞춘 게 전부인 한국과의 차이가 컸다. 여기에 어마어마한 선수층이 차이까지 있으니 대학 선발 간의 대결에서 한국이 일본과 대등하게 싸운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우여곡절에도 명맥 유지하는 덴소컵

2004년 덴소컵 이후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대회를 주최하던 동아일보와 아사히 신문이 후원사로 탈바꿈했고 한일 대학축구연맹이 주최하기로 한 것이었다. 2004년 대회를 지금은 제1회 덴소컵으로 친다. 여기에 일본에서만 열리던 대회가 한국과 일본이 번갈아 자국에서 개최하기로 하면서 양국 대학축구 교류에 큰 변화가 생기는 듯했다. 하지만 미묘한 양국 감정 탓에 오히려 변화를 맞은 2004년 이후 덴소컵의 존폐가 위태로웠던 적도 있다.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에 따른 양국간 갈등의 골이 깊어져 2005년 3월 열리기로 했던 덴소컵이 무기한 연기된 것이었다. 당시 일본대학축구연맹은 한국에서 경기를 해야 하는 선수단 안전 등을 우려하고 있었고 한국대학축구연맹도 긴급 이사회를 열어 “반일 감정이 고조된 상황에서 대회를 강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해 취소를 결정했다. 한국에서 열기로 한 첫 덴소컵은 이렇게 무기한 연기됐다. 하지만 2005년 덴소컵은 예정보다 9개월 늦은 2005년 12월 가까스로 한국에서 개최됐다. "올해 안에 꼭 대회를 열겠다“는 변석화 한국대학축구연맹 회장의 확고한 의지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1년에도 덴소컵 개최가 불투명했다. 대회를 앞두고 일본 대지진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대회 역시 한국에서 개최하기로 했는데 대지진 이후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일본 선수들의 대회 참가는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일본이 더 적극적으로 참가 의사를 밝혔다.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 위해 참가하겠다.” 일본의 덴소컵 참가는 대지진 이후 일본 스포츠팀 가운데 처음 나서는 국제경기여서 그 의미가 더했다. 심지어 일본 대학 선발 선수 중에는 지진 피해가 가장 심했던 센다이 지역 출신 선수도 있었다. 대지진까지 이겨내고 일본 선수들이 한국에 입국하자 한국은 경기도 안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리는 경기에 앞서 일본 지진피해를 돕는 의미의 성금 전달식을 열기도 했다. 당시 일본 대학 선발 나카노 유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보내준 많은 도움과 온정의 손길에 대해 일본인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덴소컵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1997년 이후 단 한 차례로 거르지 않고 열리는 중이다.

또 다른 논란도 있다. 이 대회가 일본 스카우트의 한국 선수 빼가기를 위한 대회로 전락했다는 시선이다. 유망한 한국 선수를 J리그로 데려가려는 열풍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중 특히 한국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대학 선수들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덴소컵은 일본 스카우트에겐 최고의 시장이었다. 대회가 열릴 때마다 일본 스카우트 수십 명이 카메라로 경기 영상을 담고 메모를 해가며 한국 선수들을 파악하는 데 열을 올린다. 실제로 김신영, 김근환, 여성해, 배천석, 김영근, 백성동 등 전도유망한 선수들이 2000년대 중반 이후 덴소컵에 참가한 뒤 일본으로 이적했다. 취업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대학 선수들이 프로 무대를 경험할 수 있다는 건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일이지만 이들 대부분이 J2리그로 진출했고 이후 별다른 활약 없이 국내에 복귀했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무분별한 유출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고 덴소컵에 대한 평가가 좋을 수만은 없었다. 또한 체계적으로 덴소컵을 준비하는 일본과 달리 잠깐 모여 발만 맞춰보고 이 대회에 나서는 한국으로서는 덴소컵이 유망주의 일본 진출 테스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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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덴소컵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는 한일 대학 선발 선수들. (사진=한국대학축구연맹)

덴소컵의 긍정적인 영향, 그리고 지난해 대패의 설욕

하지만 덴소컵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대회를 경험하고 성장한 이들이 많다는 점도 꼭 짚어 넘어가야 한다. 1997년 안정환과 박성배 등을 시작으로 이 대회가 배출한 스타는 줄을 이었다. 1998년에는 박호진(연세대)과 박진섭(고려대), 김남일(한양대)이 덴소컵을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2002년에는 김정우(고려대)와 정경호(울산대)가 등장했다. 2005년 덴소컵 멤버도 상당히 화려하다. 박희철(홍익대)-정인환(연세대)-안재준(고려대)-안태은(조선대)이 포백 수비를 구성했고 전방에는 염기훈(호남대)과 김영후(숭실대)가 포진했다. 골문은 권순태(전주대)와 유현(중앙대)이 경쟁을 펼쳤다. 이후에도 김성환(동아대), 김근환(경희대), 조동건(건국대), 정혁(전주대), 조찬호(연세대), 권순형(고려대), 이승기(울산대), 박진포(대구대), 신진호(영남대), 고무열(숭실대) 등이 모두 덴소컵을 거쳤고 최근 국가대표팀에서도 가장 뜨고 있는 이재성도 고려대 시절 덴소컵에서 활약한 바 있다. 쉽게 말해 덴소컵은 K리그의 주축을 이루는 선수들의 등용문 같은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클럽형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대학 축구가 위축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학 축구는 절대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한국 축구의 요소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매년 J리그에 진출하는 100여 명의 신인 중 60명 이상이 대학 출신일 정도다.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로 직행하는 경우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불황으로 선수단 규모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대학을 거치며 검증받은 선수를 중용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린 선수를 뽑아 키우는 것보다 대학을 거친 이들이 더 실패 부담이 적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면에서 한국도 대학 축구의 비중이 늘면 늘었지 줄어들 수는 없다. 지금도 K리그에서 뛰는 많은 이들은 대학을 졸업했거나 중퇴한 이들이다. 덴소컵처럼 대학 선수들이 뛸 수 있는 무대가 있어야 대학 축구도 활성화 될 수 있다. 비록 언론이나 팬들의 관심은 덜하지만 실제로 한국 대학 무대에서 덴소컵 출전은 자신의 프로 스카우트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이고 일본에서도 덴소컵 출전이 대학 선수들에게는 하나의 꿈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대학 생활을 경험하며 우정을 나누는 정기 교류전을 치른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추억이 될 것이다.

한국 대학 선발은 지난해 덴소컵에서 참패를 당했다. 일본 도우토우리키 경기장에서 지난해 3월 열린 덴소컵에서 한국은 무려 0-6이라는 믿을 수 없는 점수차로 일본에 패하고 말았다. 특히 고야 히로토(간사이학원대학)는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비록 성인대표팀 간의 경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일전에서 이런 대패를 당했으니 지탄의 목소리가 이어진 건 당연했다. 경기에 나선 선수들 역시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런 대패를 당한 한국은 올해 안방에서 열리는 덴소컵을 위해 칼을 갈았다. 하지만 한국은 늘 그랬듯이 춘계연맹전을 치른 뒤 소집돼 고작 열흘 동안 연습경기 몇 번을 치른 게 전부였다. 넉 달 전부터 대학교 4학년을 중심으로 모여 유럽으로 전지훈련을 다녀온 일본에 비해서는 준비 상황이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 대학 선발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유니폼에 태극기를 새겨 넣고 전의를 불태웠다. 이번 만큼은 반드시 지난해 대패를 설욕하겠다고 칼을 갈았다. 그리고 한국은 지난달 29일 화성종합경기타운에서 열린 제12회 덴소컵에서 김건희(고려대)가 1골 1도움을 올리며 일본을 2-1로 격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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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화성종합경기타운에서 열린 덴소컵에서 역전 결승골을 넣은 김민규가 기뻐하고 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덴소컵이 지금껏 남긴 것들

비록 오랜 시간 발을 맞추지는 못했지만 지난해 대패를 시원하게 설욕하는 순간이었다. 한국 대학 선발 지휘봉을 잡은 김재소 선문대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의 수모를 갚기 위해 선수 모두가 패할 수 없다는 각오로 나섰다. 광복 70주년에 이겨 더 뜻깊다.” 한국은 이 승리로 2004년 이후 재편된 덴소컵에서 5승 2무 5패로 일본과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됐다. 이제 한국은 이 선수들을 주축으로 오는 7월 광주에서 열리는 하계 유니버시아드를 준비할 예정이다. 1991년 세필드 유니버시아드 대회 이후 24년 만의 정상을 노리는 한국은 유니버시아드 통산 5회 우승을 자랑하는 일본을 덴소컵에서 누르며 상당한 자신감을 얻었다. 김건희 외에도 이번 덴소컵 명단에는 명준재(고려대)와 김민규(단국대), 박인혁, 고승범(이상 경희대), 최준기(연세대), 박동진(한남대), 문준호(용인대), 이정빈(인천대) 등 앞으로 K리그는 물론 대표팀에서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선수들이 즐비하다. 아마 몇 년 후 이 명단 중 누군가는 한국 축구를 짊어질 기둥으로 성장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덴소컵은 무용론이 적지 않게 나오는 대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대회를 통해 그 동안 많은 대학 축구선수들이 꿈을 키워왔고 추억을 쌓아왔다. 프로리그의 투자 위축으로 대학 축구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는 상황에서 덴소컵과 같은 대회는 더 많은 관심 속에 열려야 한다. J리그 스카우트만 열을 올리고 대중의 무관심 속에 열리는 대회라면 덴소컵은 선수 유출만을 초래하는 불필요한 대회로 전락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대회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 선수들에게는 덴소컵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대학 무대 최고의 영광이 될 수 있고 그 사이 우리의 축구 뿌리는 더욱 튼튼해지지 않을까. 지난해 대패를 멋지게 설욕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도 많은 대학 축구선수들이 이 대회를 통해 대학 생활의 멋진 추억을 만들고 더 큰 꿈을 품었으면 좋겠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덴소컵이 더욱 번창하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