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3월 28일) 전국에서 2015 하나은행 FA컵 1라운드 8경기가 열렸다. 직장인 축구팀과 K3리그 및 대학교팀이 격돌하는 FA컵의 첫 관문이었다. 당연히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경기라고 해 특별한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다. 오늘은 이번 FA컵 1라운드를 통해 지난 주말 마침내 9년 전의 약속을 지킨 한 어린 선수와 어린 팬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그들에게 있어 FA컵 1라운드는 참으로 특별하고 아름다웠던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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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많던 10대의 어린 진민호는 부산에서 K리그 생활을 시작했다. (사진=부산아이파크)

늘 벤치를 지켜야 했던 무명의 어린 선수

진민호는 브라질 축구 유학을 다녀온 뒤 2003년 만 17세의 어린 나이에 K리그 부산아이파크에 입단했다. 즉시 전력감은 아니었지만 이호, 송한복 등과 함께 브라질 축구를 경험한 진민호는 부산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고 브라질 유학 후 국내에 돌아올 때는 부산에서 네덜란드 헤렌벤으로 3개월 연수를 보내줄 만큼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당시 부산에는 유망주급 선수들 외에도 김용대와 이장관, 이임생, 노정윤, 안효연 등 쟁쟁한 선수들이 즐비했고 2004년 FA컵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물론 어린 진민호에게는 당장 기회가 주어질 리 없었다. 그는 2003년 부산에 입단해 2군 경기를 전전하다 2005년 5월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G조 태국 크룽타이 뱅크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처음 공식 데뷔전을 치를 기회가 생겼다. 당시 부산은 이미 5전 전승으로 조별예선 통과를 확정지은 상태였기 때문에 부산은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부여했다. 진민호는 데뷔전에서 75분을 뛰며 가능성을 보였다.

하지만 이게 다였다. 워낙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 만20세의 어린 선수는 더 이상 기회를 잡을 수 없었고 결국 경험을 쌓기 위해 내셔널리그행을 택했다. 그의 다음 행선지는 바로 고양국민은행이었다. 성남일화와 좋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당시 성남 김학범 감독은 진민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셔널리그에서 경험을 쌓고 와.” 2006년 진민호는 내셔널리그 고양국민은행으로 이적했다. 물론 인지도가 높지 않은 그의 이적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진민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셔널리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어요. 내셔널리그로 가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양국민은행에 가 경험을 좀 쌓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고양국민은행에서도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내셔널리그의 수준이, 특히 고양국민은행의 수준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고양국민은행은 내셔널리그의 전신인 K2리그를 포함해 2년 연속 우승을 한 강호였다.

고민기와 김종현을 비롯해 윤보영, 김요환, 김동민, 차종윤 등 K리그를 경험한 뛰어난 선수들을 보유한 고양국민은행은 내셔널리그의 압도적인 1강이었다. 강릉시청을 상대로 7-0 대승을 거두는 등 무시무시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말이 내셔널리그지 실상 전력은 이미 K리그 수준이었다. 진민호가 이적한 첫 시즌인 2006년 FA컵에서는 K리그 팀 울산현대와, 광주상무, 경남FC를 모두 제압하고 4강에 오를 정도로 강했다. 어리고 가능성 있는 선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특히나 고양국민은행 이우형 감독은 시즌 내내 잘 짜여진 베스트11에 큰 변화를 주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진민호는 늘 벤치에서 하늘 같은 선배들의 경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진민호는 2006년 11월 이미 내셔널리그 정규리그 3연패를 확정지은 뒤 치른 마지막 경기에서 처음으로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몸만 풀다 경기를 마쳐야 했다. 2006년 고양국민은행에서 단 1분도 뛰지 못한 선수는 진민호가 유일했다. “너무나 실망스러웠죠. 단 1분이라도 기회가 주어질 줄 알았는데 결국 저만 경기에 나서지 못했어요.”

힘겨운 그의 도전과 어렵게 결정한 현역 은퇴

결국 그는 내셔널리그 고양국민은행에서 1분도 뛰지 못한 채 성남일화로 이적했다. 그의 가능성을 알아 본 김학범 감독이 1년 전 약속대로 진민호를 영입한 것이었다. 하지만 영광의 마지막 시대를 보내고 있던 성남은 이제 갓 만으로 스무 살이 된 어린 선수가 경쟁하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한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다. 네아가를 비롯해 장학영, 전광진, 조병국, 남기일, 박진섭, 모따, 서동원, 손대호, 이따마르, 김용대, 김철호, 조용형, 김동현, 최성국, 이동국, 정성룡, 김정우, 두두 등이 펄펄 날고 있던 성남은 진민호가 입단한 2007년 K리그에서 2위를 차지할 만큼 강했다. 당시 성남은 2군도 어지간한 다른 K리그팀 1군보다도 강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전상욱과 김태윤, 신동근, 이정용, 김연건, 도재준, 신영철, 권오규 등이 버티고 있는 2군은 R리그에서도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R리그 결승전에서 황진성과 최태욱, 오승범 등 1군 선수들을 대거 기용한 포항에 패하기는 했지만 순수한 2군리그에서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뽐냈다. 진민호는 2군에서 꾸준히 경기에 나섰지만 1군과 경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가 가는 팀은 이렇게 늘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진민호는 3년 동안 성남에서 단 한 번의 공식적인 1군 경기에 나서지 못한 채 짐을 싸야 했다. “죽어라 노력했어요. 당시 성남 훈련이 혹독하기로 유명했는데 체력 테스트에서도 늘 상위권이었어요. 늘 새벽에 나가 개인 운동을 했고 언제 올지 모를 기회를 위해 준비했죠. 하지만 워낙 훌륭한 선배들이 많아 기회가 찾아오지 않더라고요. 제 실력 부족이었겠지만 3년 동안 죽어라 해도 안 되니 그게 더 답답했습니다.” 결국 그는 무려 3년 동안 도전했음에도 단 한 번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새로 창단된 내셔널리그 목포시청으로 이적했다. 하지만 목포시청에서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브라질 유학을 다녀온 그는 국내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고 결국 호남 지역 선수들을 중용하는 목포시청에서도 찬밥 신세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당시 R리그 최강이던 성남일화에서 꾸준히 경기에 나섰던 선수가 내셔널리그에서도 최약체인 목포시청에서 벤치만 지키고 있었지만 이런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워낙 관심이 부족한 리그였기 때문이다. 진민호는 그렇게 2010년 목포시청에서 조용히 짐을 싸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만 24살 때의 일이었다.

만 17세의 어린 나이에 꿈을 품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어린 선수는 그렇게 7년 동안 도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쟁쟁한 선수들을 상대하기에는 어렸고 부족했다. 또 국내에서 그를 도와줄 은사도 없었고 그가 가는 팀은 늘 리그에서 가장 잘 나가 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만 19세의 나이에 AFC 챔피언스리그를 딱 한 번 경험한 뒤로는 공식적인 경기에 나서지도 못했던 이 무명의 선수는 그렇게 은퇴를 택했다. 하지만 그렇게 떠나는 진민호에게 그 동안 고생했다고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별로 없었다. 그가 철저한 무명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는 지도자로 변신했다. “제가 선수로서는 결국 실패했잖아요. 하지만 어린 선수들이 저처럼 축구를 통해 상처 받지 않고 즐겁게 공을 찰 수 있도록 가르치고 싶었어요.” 브라질과 네덜란드를 경험하며 선진 축구 훈련을 체험한 그는 국내에서 가장 혹독하다는 김학범 감독의 훈련 방식까지 거치며 배워온 게 많아 유소년 선수들과 학부형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여기에 먼저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 선배들로부터 조언을 구하고 홀로 터득한 훈련 방식까지 더해졌다. 정식 축구부 선수들이 방과 후 따로 개인 레슨을 청할 만큼 그는 지도자로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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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K3리그 고양시민축구단을 응원하고 있는 라대관 씨의 모습.

한 어린 팬과 진민호의 약속

경기도 고양시에서 나고 자란 라대관 씨는 내셔널리그 고양국민은행의 열정적인 팬이었다. 비록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내셔널리그였지만 그는 고향팀을 응원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06년에는 박스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독일 월드컵 원정을 떠나기도 했고 독일 월드컵에서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붉은악마 원정 응원단 콜리더로 발탁되기도 했다. 이 어린 소년이 선창을 하면 수천 명의 붉은악마가 독일 월드컵 현지에서 응원가를 따라 불렀다. 이때 고양국민은행 소속이던 진민호와 처음 만났다. 축구선수로서의 성공을 꿈꾸는 만19세의 어린 선수와 고등학교 2학년 팬의 만남이었다. 라대관 씨는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벤치만 지키는 진민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형, 저는 언제나 형을 응원하고 있어요. 꼭 형이 그라운드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진민호도 그런 어린 팬의 응원에 화답했다. “지금은 비록 후보지만 언젠가 네 앞에서 경기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 둘은 2006년 이렇게 서로에게 약속했다.

그런데 결국 이 둘은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 진민호는 고양국민은행에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팀을 떠나야 했고 라대관 씨도 자신의 인생과도 같던 고양국민은행과 작별했기 때문이다. 2007년 고양국민은행이 K리그 승격 자격을 얻고도 이를 거부하자 결국 우리가 직접 시민구단을 만들어 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고 라대관 씨도 고양국민은행 대신 진정 팬들과 함께 하는 팀을 만들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팬들과 선수들에게 승격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제시한 뒤 말을 바꾸는 기업을 보며 진정한 시민구단이 창단돼야 이런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라대관 씨는 그렇게 1년여 간의 노력 끝에 K3리그 고양시민축구단 창단과 함께 했다. 라대관 씨가 만으로 18세가 된 2008년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고양시민구단이 창단됐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고양시민구단과 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창단할 때의 기대와는 다르게 고양시민축구단은 열악한 K3리그에서도 가장 약체로 손꼽혔다. 연패를 거듭하며 K3리그에서도 최약체로 추락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호기심 있게 고양시민축구단을 지켜보던 팬들도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라대관 씨도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군대에 가야 했고 그가 제대하고 돌아왔을 때는 고양시민축구단을 응원하는 이들 대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는 홀로 서포터스석에 서 응원가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홀로 얼굴에 페인트를 묻혀가며 직접 걸개를 제작했고 이 걸개를 가방에 넣어 대중교통을 이용해 전국 각지로 원정 응원을 다녔다. 전남 영광 원정을 위해 혼자 걸개를 등에 지고 지하철을 타고 터미널에 가 고속버스를 타고 택시까지 이용해 경기장까지 가는데 무려 6시간이나 걸린 적도 있었다. 혼자 응원하는 게 고마워 구단에서는 걸개 제작에 도움을 주고 원정 응원에도 배려를 하려고 했지만 라대관 씨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가까운 수도권 원정 경기를 치를 때면 구단에서는 “한 자리 비워줄 테니 선수단 승합차에 같이 타고 가자”고 제안했지만 라대관 씨는 선수들에게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아 홀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원정 응원을 떠난다. 라대관 씨는 그렇게 고양시민축구단의 열혈 팬으로 여전히 활동 중이다. 물론 2006년 함께 경기장에서 선수와 팬으로 만나자던 진민호와의 약속도 어느새 잊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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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민호는 목포기독병원 소속으로 다시 한 번 FA컵 무대에 서게 됐다. 그 상대는 바로 고양시민축구단이었다. (사진=고양시민축구단)

9년 만에 다시 만난 어린 팬과 선수

그 사이 진민호는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2015년 초 목포기독병원의 입단 제안을 받았다. 직장인 축구팀이었지만 만만치 않은 실력을 과시하는 목포기독병원에서 진민호에게 함께 하자고 손을 내민 것이었다. 이제 현역 선수의 꿈을 접었지만 그래도 진민호는 취미 삼아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목포기독병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이제는 더 이상 전문적인 선수는 아니었지만 직장인 축구팀에 속해 취미로 축구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새벽부터 일어나 몸을 만들고 혹독한 훈련을 버텨내도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 늘 벤치만 지켜야 했던 때와는 달랐다. 축구를 하는 게 즐거웠다. 더군다나 목포기독병원은 2012년부터 대한중소병원협회장배 축구대회에서 3년 연패의 쾌거를 이룬 직장인 축구계의 강팀이었고 지난해 노동부장관기 전국 직장인 축구대회 2부리그 준우승 자격으로 2015년 FA컵 1라운드 진출 티켓까지 거머쥐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2월 말 FA컵 1라운드 대진 추첨이 이뤄진 뒤 진민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목포기독병원의 FA컵 1라운드 상대가 라대관 씨가 응원하는 고양시민축구단이었기 때문이다.

9년 전 약속이 떠올랐다. “비록 아직 형의 경기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늘 응원하고 있다”던 고등학생 팬과 했던 바로 그 약속이었다. “언젠가는 꼭 네 앞에서 경기하는 모습을 보여줄게.” 그 약속을 무려 9년 만에 지키게 된 것이었다. 물론 세월은 흘렀고 상황도 변해 있었다. 9년 전 함께 했던 고양국민은행은 이제 해체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라대관 씨는 그때보다 상황이 더 열악한 K3리그 고양시민축구단을 응원하고 있었다. 진민호 역시 이제는 더 이상 고양국민은행의 후보 선수가 아니라 새로운 팀 목포기독병원 소속이었다. 만 17세의 어린 팬은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돼 있었고 만 19세의 어린 선수는 이제 현역에서 물러나 직장인 팀에서 뛰는 30대 축구 지도자가 돼 있었다. 하지만 진민호는 9년 전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9년 전 고양국민은행 열혈 팬이었던 라대관 씨가 이제는 고양시민축구단의 열정적인 팬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일 혼자 체력 훈련을 하며 FA컵 1라운드를 준비했다. 오랜 만에 경기에 나선다는 설렘도 있었지만 그보다 한 팬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지난달 28일 고양별무리운동장에서 그 약속이 지켜졌다. 목포기독병원 소속인 진민호는 푸른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들어섰고 경기장 한 켠에서는 그와 9년 전 약속했던 한 팬이 고양시민축구단을 응원하기 위해 서 있었다. 바로 라대관 씨였다. 그렇게 9년 만의 특별한 경기가 펼쳐졌다. 진민호는 “현역 은퇴 후 90분 경기를 뛰어본 적이 없다”며 걱정했지만 역시 프로 출신다운 플레이를 선보이며 펄펄 날았다. 중원에서 양쪽 측면으로 공을 뿌려주며 현역 못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고 중원에서 강력한 중거리슛을 날리기도 했다. 라대관 씨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고양시민축구단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 응원을 시작했다. 전반전 목포기독병원이 고양시민축구단을 압도하는 경기를 펼쳤지만 결국 후반 들어 체력 저하로 고전했고 경기는 고양시민축구단의 2-0 승리로 막을 내렸다. 비록 패했지만 진민호는 90분 풀타임을 소화하며 가장 빛나는 활약을 펼쳤다. 그렇게 진민호와 라대관 씨의 특별했던 경기는 막을 내렸다. 9년 전 약속이 지켜진 아름다운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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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난 뒤 이 둘은 무려 9년 만에 다시 만났다. 9년 전 했던 약속을 지킨 셈이다.

늦었지만 약속 지킨 진민호의 특별했던 FA컵

경기가 끝난 뒤 진민호는 상대팀 팬인 라대관 씨에게 다가갔다. 비록 9년 전처럼 자신을 응원하는 팀의 팬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약속을 지킨 뒤 꼭 라대관 씨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민호가 다가오자 라대관 씨는 그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진민호, 진민호.” 이제는 적으로 만난 선수였지만 그에게는 소중했던 9년 전 함께 했던 진민호라는 선수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다. 그렇게 텅 빈 경기장,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경기에서 한 직장인 축구팀 선수와 그의 상대팀 팬이 마주했다. 진민호가 고개 숙여 라대관 씨에게 인사를 하자 라대관 씨는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러면서 진민호는 라대관 씨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형이 9년 전 약속 지켰어.” 라대관 씨도 말을 이었다. “9년 만에 형이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을 처음 보게 돼 너무 좋았어요.” 이 둘은 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 촬영을 했다. 그렇게 9년 전 한 팀의 선수와 팬으로 만난 이 둘은 무려 9년 만에 다시 그라운드에서 만났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던 팀은 이제 사라졌지만 이 둘은 여전히 운동장을 이렇게 지켰다.

남들에게는 그저 FA컵의 가장 첫 관문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하고 특별한 경기였다. 만 17세의 나이에 프로 무대에 뛰어든 어린 선수는 FA컵 공식 경기에 나서기까지 무려 1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 사이 많은 게 변했다. 이 어린 선수는 이제 축구선수의 꿈을 접은 뒤 30대에 접어들었고 지도자가 돼 있었다. 그는 이번 경기가 끝난 뒤 이런 말을 남겼다. “너무 너무 뛰고 싶었어요. 이 무대에 서기 위해 참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었고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다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기회가 찾아 왔네요. 비록 현역 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다시 FA컵이라는 꿈을 위해 뛰었던 순간이 너무 소중했습니다. 그리고 (라)대관이에게 제가 플레이하는 모습을 처음 보여줄 수 있게 돼 더욱 특별한 경기였어요. 그때는 풋풋했던 고등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살이 많이 쪘더라고요.” 고등학생 시절 고양국민은행의 승격이라는 꿈과 함께 자랐던 한 어린 팬도 이제 성인이 돼 고양시민축구단을 응원하며 여전히 관중석을 지키고 있다. 그 역시 FA컵 1라운드는 무척이나 특별했다. “(진)민호 형이 뛰는 모습을 마침내 봤어요. 그때는 늘 벤치에 있어서 안타까운 형이었는데 오늘 보니 지단이네요.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이 둘은 경기가 끝난 뒤 일상으로 돌아갔다. 진민호는 다시 취미로 축구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라대관 씨도 다시 생업에 종사하면서 고양시민축구단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경기장을 찾을 예정이다. 이 둘에게 지난 주말은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 됐다. 9년 전 풋풋했던 어린 선수와 고등학생 팬은 이렇게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났고 그때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비록 9년 전 그들이 원한 모습은 이게 아니었을 것이다. 고양국민은행이 승격을 하고 진민호가 그 중심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 세상은 흘러가지 않았다. 고양국민은행은 승격을 거부한 뒤 훗날 해체됐고 진민호는 힘겨운 주전 경쟁에서 밀려 결국 빛을 보지 못한 채 현역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 둘은 다시 만났다. 비록 원했던 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지만 이 둘은 다시 경기장에서 만나 마침내 약속을 지켰다. 9년 전의 약속을 이 둘은 잊지 않고 있었다.